조각가 도나텔로,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 화가이자 기술자인 다 빈치, 과학자 갈릴레이. 이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무엇이 있을까? 먼저 모두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하여 과학이나 예술 등각자의 분야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언뜻 보면 알아채기 어려운 한가지 공통점이 또 있다. 바로 이들이 생활하고 연구했던 환경이다.과연 어떤 환경이었기에 그토록 창조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었던 걸까? 지금부터 그 비밀을 파헤쳐 보자~.
르네상스의 원동력, 메디치 효과
세상을 바꾸는 창의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비결, 그것은 바로 융합이었다.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다 빈치, 갈릴레이가 커다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데에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재능과 지식을 갖춘 과학자, 예술가, 시인, 철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메디치 가문이 큰 역할을 했다.
메디치 가문은 15~17세기에 걸쳐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방을 지배한 이탈리아의 유력한 가문이다. 특이하게도 무력이 아닌 재력과 정치력으로 권력을 잡았으며, 형식상으로는 끝까지 시민의 일원으로 남았다. 이들은 시민과 친숙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학문과 예술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도나텔로와 미켈란젤로, 다 빈치, 갈릴레이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후원 아래 수많은 과학자와 예술가가 활발히 교류하면서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고, 그 결과 피렌체에서 화려한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활약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창조적인 문화를 이끌어 내는 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오늘날에는 이렇게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분야가 융합한 결과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결과물이 탄생하는 현상을 ‘메디치 효과’라고 부른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다양한 분야의 융합은 점점 더 중요해질 전망이다. 전통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고 생각했던 과학과 인문학, 문화예술을 융합해 독특한 연구를 하거나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활발하다. 미항공우주국(NASA)의 ‘NASA 예술 프로그램’은 예술가들에게 연구시설을 개방해 창작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영국의 ‘사이아트’는 과학과 예술을 융합한 작품에 창작비를 지원하고, 프랑스의 ‘라보라토’는 요리사와 물리학자, 무용가와 수학자 등 과학자와 문화예술인이 협력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일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학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과학과 인문사회의 융합을 꾀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를 이용한 문화예술 작품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화화 수학의 아름다운 만남
20세기의 저명한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힐베르트가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수업에 들어간 힐베르트는 한 학생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슨 일인지 묻는다. 다른 학생이 자리에 없는 학생은 수학을 그만두고 시를 쓰기로 결심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힐베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잘됐군. 그 친구는 수학자가 되기엔 상상력이 부족하지.”
수학자가 시인보다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힐베르트의 일화는 수학이 상상력과 거리가 먼 딱딱한 학문이라는 흔한 편견을 통쾌히 깨뜨려 준다. 수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이런 수학적 상상력은 때때로 문화예술에 영감을 주어 독특하고 혁신적인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수학과 일러스트레이션의 만남
매년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는 라가치 상의 수상작이 발표된다. 그 해 디자인과 편집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책이 상을 받는데, 2009년에는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이 논픽션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바로 김윤주 작가의 ‘미술관에서 만난 수학’이다.
미술관을 찾은 한 가족이 명화 속에서 수, 도형, 대칭 등 다양한 수학 개념을 접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책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칸딘스키, 피카소 등의 유명한 화가가 그린 명화가 등장하며 그 안에서 수학 개념을 찾을 수 있다. 수학 개념과 명화가 융합된 그림은 독자를 적극적으로 책 읽기에 동참하게 하며, 지각 능력도 발달시킨다.
수학으로 디자인하고, 디자인으로 수학을 배운다
수학이 디자인과 만난다면 어떤 모습일까? 지난 10월 서울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서울디자인올림픽’에서 수학과 디자인의 융합을 체험할 수 있는 'i-DESIGN 놀이터'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UNESCO 국제수학체험전’은 수학과 디자인의 기본 원리에 공통점이 많다는 점을 이용해 디자인 작품과도 같은 전시물을 통해 수학의 원리를 체험하게 해 준다.
암호를 재즈로
인도 출신의 재즈 연주가인 러드레시 마한타파는 암호에서 영감을 얻은 음반을 발표했다. ‘코드북’이라는 제목의 이 음반에는 피보나치 수열, 모스 부호, 정수론 등을 주제로 한 곡이 담겨있다. 평소 재즈와 인도 전통 음악을 융합시킨 음악으로 이름을 알렸던 마한타파는 수학과 음악의 융합이라는 주제에서도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소설과 연극, 그리고 수학
소설 '셈도사 베레미즈의 모험'을 그림자극으로 만든 '이슬람 수학자'는 수학과 문학, 수학과 연극의 융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3세기 아라비아의 천재 수학자 베레미즈의 흥미롭고 감동적인 모험을 담았다. 13과 16 사이의 우정, 21개의 포도주통에 관한 논리, 새장의 새를 통한 완전수의 원리 등 수학적인 내용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면서 이야기 속의 세계를 더욱 재미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퓰리처상을 받은 연극 ‘프루프’는 존 내쉬와 가상의 딸을 소재로 천재수학자인 아버지와 딸의 인간관계를 다뤘다. 천재였지만 정신분열증을 앓는 아버지가 남긴 공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시작으로 수학과 연관된 낯선 소재를 일상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시켜 자연스럽게 극으로 풀어 냈다.
융합의 시대로
융합의 사례는 과학기술에서 더욱 폭넓게 찾아볼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던 19세기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맞물려 뛰어난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프랑스의 작가 쥘 베른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저 2만리’, ‘지구 속 여행’, ‘지구에서 달까지’ 등의 과학소설을 썼다. 쥘 베른의 과학적 상상력은 우주선, 압축공기, 잠수함 등의 현대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요즘에도 수많은 과학소설가들이 활동하며 과학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쓰고 있다. 과학과 문학적 상상력이 융합한 이런 이야기는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동시에 독자에게는 과학기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 생길 수 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생각하게 해 준다.
무대에서도 과학과의 융합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과학연극 ‘산소’, ‘코펜하겐’ 등이 작년에 무대에 올랐고, 올해에는 ‘다윈의 거북이’와 ‘생명의 나무, 다윈’ 등이 관객에게 선을 보였다. 이 중 '생명의 나무, 다윈’은 우리나라 순수 창작극으로 과학자 다윈의 고뇌와 갈등에 대해 다룬다.
한편 첨단 과학기술을 응용해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다. 비디오아트는 수많은 텔레비전으로 구조물을 만든 뒤 영상을 보여 주는 형식의 예술 작품이다. 텔레비전이 여러 대 놓여 있는 겉모습은 조각품의 형태를 띠면서도 끊임없이 변하는 영상으로 인해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융합 문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우리나라도 한국과학창의재단(이사장 정윤)을 중심으로 융합문화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분야는 과학연극, 미디어 퍼포먼스 등 과학과 공연예술의 융합을 추진하는 융합창작공연, 과학을 시각디자인, 그림, 사진, 일러스트레이션 등으로 보여 주는 과학 시각화, 과학적 소재나 내용을 이야기로 만드는 과학스토리텔링. 우리 사회에서 과학이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창의적인 융합문화가 확산되도록 다각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동시에 이렇게 탄생한 작품을 온라인에도 공개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또한 지난 6월부터 융합카페를 개설해 과학기술과 인문사회, 문화예술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참여해 생산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융합카페는 세미나, 워크숍, 공연 등 다양한 형태로 열리며 일반인도 참여해 전문가와 아이디어를 주고받을 수 있다.
11월 3~8일 국립과천과학관에 열리는 ‘2009 과학과 인문, 예술의 만남’은 과학창의재단이 지원하는 융합문화활동을 한자리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 융합문화축제다. 오감을 통해 과학을 쉽고 재미있고 친근하게 보고 만져 보고 이야기하고 즐김으로써 창의적인 융합문화를 체험할 수 좋은 기회다.
다양한 분야를 자유롭게 공부하고 융합하는 것은 창의력의 원천이다. 흔히 지식에 기반한 사회라 부르는 21세기에는 분야 간의 장벽을 허물고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빛나는 아이디어로 21세기의 리더가 되고 싶다면 ‘융합’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새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