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인 북대서양. 독일 해군의 잠수함 유보트가 미국-영국 연합군의 수송 선단을 노리며 어둠 속을 항해한다. 미국과 영국을 잇는 북대서양은 유럽 전선의 핵심 보급로였지만, 수백만 톤(t)의 연합군 선박이 유보트에 희생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연합군 호위함이 투하한 폭뢰가 전세를 뒤바꿨다. RDX 폭뢰가 터지며 일으킨 가공할 충격파가 해저에 있는 유보트의 강철 선체까지 파괴한 것이다.
편집자 주
개발 시기 : 1898년
분류 : 폭발물질
특징 :
폭발력이 대표적 현대 폭발물인 TNT의 약 1.6배
1초당 연소 속도가 약 8750m로, 폭발 에너지의 집중도가 TNT보다 약 27% 높음
현재 세계적인 표준 화약인 ‘컴포지션 B’의 기반 물질로 쓰임
주요 사건 : 1943년 5월, 북대서양
미국-영국 해군이 RDX 폭뢰로 독일의 유보트 잠수함을 격침하며 대서양 보급로를 장악
폭발, 가장 극단적인 화학 반응
폭발물(Explosive)이란 무엇인가? ‘열, 충격 등의 외부 자극을 받으면 극히 짧은 시간 내에 대량의 가스와 열을 방출하는 발열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이 폭발물의 화학적 정의다. 모닥불과 폭발의 화학적 차이는 반응 속도에 있다. 모닥불은 초 단위로 연소하지만, 폭발물은 마이크로초 단위로 발열한다. 이 극단적으로 빠른 반응 속도가 일으키는 급격한 가스 팽창과 충격파가 폭발물이 갖는 파괴력의 본질이다.
폭발물의 위력을 결정하는 화학의 핵심 개념은 산소 균형이다. 폭발물 분자 속에는 탄소, 수소, 질소 등의 원소가 있고 이들이 폭발하려면 일정량의 산소가 필요하다. 산소가 탄소, 수소 등과 결합해 이산화탄소와 물을 만들면서 많은 열과 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폭발물 분자 속에 산소가 충분하면 외부의 산소가 없어도 폭발 반응이 가능하다. 이 단순한 원리가 TNT, RDX, HMX 같은 군용 폭발물부터 현대 폭탄 테러에 악용되는 과산화물까지 모든 폭발물의 성능을 좌우한다.
TNT는 현대 폭발물의 대표 격인 물질로, 1863년에 독일 화학자 율리우스 빌브란트가 처음 합성했다. 원래 빌브란트가 TNT를 합성한 용도는 화학 염료였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군사용 폭발물의 대명사가 됐다. 물질의 민감도가 매우 낮아, 뇌관(화약 점화용 폭약) 없이는 쉽게 터지지 않는다는 결정적 장점이 TNT의 위치를 바꿨다.
그러나 폭발 무기로서 TNT의 한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초기에 이미 드러났다. 강철 장갑차의 차체를 관통하기에는 폭발력이 부족한 데다, 전쟁 규모 자체가 커지면서 폭발력이 더 강한 무기의 필요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숨은 주인공, RDX
여기서 RDX가 등장했다. 화학명은 ‘사이클로트리메틸렌 트리나이트라민’, 1898년 독일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헤닝이 처음 합성했다. 당초 헤닝이 획득한 RDX 특허는 요로 감염을 막는 소독제로써의 효능만 언급했고 폭발력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
RDX의 폭발물로써의 잠재력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드러났다. 그 성능은 TNT를 압도했다. RDX는 폭속(폭발물의 1초당 연소 속도)이 초속 약 8750m로 TNT보다 27% 정도 빠르며, 폭발력은 TNT의 약 1.6배에 달했다. 폭속은 폭발 반응의 충격파가 폭약 내부에 전파되는 속도이며, 폭발력을 좌우하는 폭발 에너지의 집중도를 보여준다.
RDX의 이런 월등한 성능은 나이트로기(-NO2)가 질소(N)-질소 결합에 연결된 분자 구조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고성능 폭발물은 이처럼 질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나이트로기를 포함하며, 이것이 폭발의 에너지원이다. 앞서 나온 TNT는 나이트로기가 탄소에 직접 붙어있다.
RDX가 폭발하면 분자 속 나이트라민(N-NO2) 결합이 끊어지면서 대량의 질소 가스(N2), 이산화탄소, 수증기가 순식간에 발생한다. 고체였던 폭약이 뜨겁고 큰 부피의 기체로 바뀌고, 이 급격한 부피 팽창이 일으키는 충격파가 RDX의 가공할 파괴력의 본질이다.
큰 폭발력은 RDX의 질소-질소 결합처럼, 상대적으로 약하고 불안정한 분자 결합이 끊어지는 경우에 주로 발생한다. 폭발과 함께 약한 분자 결합이 끊어지고 큰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원자들이 강한 분자 결합을 이룬다. 특히 자연계에서 가장 강하고 안정한 결합 중 하나인 질소 가스의 삼중결합(N≡N)이 일어나는 과정에서는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된다. 이처럼 강한 분자 결합은 큰 폭발력의 원인이 아닌, 결과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특히 치열했던 대서양 전투의 판도를 바꾼 주역도 RDX다. 미국-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의 잠수함인 유보트에 고전했다. TNT가 유보트 선체에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유보트를 관통하는 위력의 RDX 폭뢰로 미국과 영국은 대서양에서 승기를 잡았다. 2차 대전을 끝낸 원자폭탄의 기폭 장치도 RDX가 핵심이었다.
터져야 할 때만 터지는 물질, RDX
폭발물은 파괴력만큼 안정성이 중요하다. 운반, 저장 과정에서 작은 충격만 받아도 터질 수 있는 폭발물은 아무리 강력해도 무기로 쓸 수 없다. RDX는 TNT보다 충격, 마찰에 훨씬 민감해 안정성이 낮다. 세계 각국은 RDX를 다른 물질과 혼합해서 단점을 보완했다. 특히 ‘컴포지션 B’는 RDX와 TNT, 왁스를 섞어 폭발력은 유지하고 민감도를 낮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포탄과 폭탄의 표준 화약으로 쓰인다.
오늘날 온라인 게임으로 익숙한 C-4 폭약도 RDX의 민감성을 섬세하게 보완한 사례다. 폭약의 약 91%를 차지한 RDX를 고무 계열 결합제와 가소제로 감싸 불로 태우거나 총으로 쏴도 안 터질 만큼 안정하고, 점토처럼 빚어 붙이는 폭약으로도 쓸 수 있다. C-4 폭약은 오직 뇌관의 충격으로만 폭발한다. 이처럼 RDX는 폭발력, 안정성은 물론 사용 편의성까지 갖춘 각종 폭약의 기반 물질로서 전 세계에 퍼졌다.
RDX의 장점은 분쟁과 살상을 조장하기도 한다. RDX 기반 폭약은 각국 정부에서 군사용으로 엄격히 통제하지만, 이 장점 때문에 여러 분쟁 지역에서 RDX가 유출되거나 급조폭발물의 주 폭약으로 제조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도 화학물질의 숙명적 양면성을 본다.
21세기 최악의 폭발물질, 악마의 어머니
한편 21세기부터 기존 방식을 벗어난 폭발물질들이 등장해 테러리즘의 위협을 키우고 있다. 대표적 물질인 TATP, 즉 ‘트리아세톤 트리퍼옥사이드’의 별명은 ‘악마의 어머니’다. 이 물질은 1895년 독일 화학자 리하르트 볼펜슈타인이 아세톤과 과산화수소로 처음 합성했고, 과산화 결합(-O-O-) 세 개가 고리 형태로 연결된 분자 구조가 특징이다.
TATP 분자에 질소가 전혀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폭발물 탐지기의 일반적인 작동 원리는 질소 원소 감지이므로, TATP는 질소 기반 탐지기를 피할 수 있다. 게다가 TATP는 구하기 쉬운 아세톤(매니큐어 제거제), 과산화수소(소독약)가 원료여서 현대 테러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탑승객 신발을 검색하는 전 세계 공항의 보안 절차도 TATP에서 비롯됐다. 2001년 12월,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의 국제 테러 단체인 알카에다 조직원이 비행 중인 여객기에서 신발 밑창에 숨긴 TATP를 폭발시키려다 제압된 사건을 계기로 이 절차가 도입됐다. 22명이 사망한 2017년 영국 맨체스터 아레나 테러는 범인이 유튜브 영상을 보고 TATP 폭탄을 만든 사실도 밝혀졌다. 21세기 유럽의 여러 테러에서 쓰인 TATP는, 현대의 테러 예방·방지 대책이 직면한 근본적 난제다.
안전한 일상을 위한, 안전한 폭발물 연구
폭발물 테러에 대응하는 현대 과학의 핵심은 사전 예방이다. 신종 폭발물 테러가 일어난 다음에 탐지법을 찾는 사후 대응은 한계가 크다. 한국의 국가 대테러센터 정책자문위원인 필자도 양자화학(DFT) 계산과 인공지능(AI)을 결합한 폭발물 예방 방식을 연구 중이다. 그 일환으로 TATP 같은 과산화물 폭발물을 식별한 논문은 미국화학회(ACS) 학술지 ‘ACS 오메가’ 7월호에 실렸다. doi: 10.1021/acsomega.6c02172 과산화물로 제조될 폭발물 특성을 양자화학 계산만으로 사전 도출해 검증하고, 이 방식을 활용한 테러 대응, 폭발물 탐지를 제안했다.
신종 폭발물을 직접 합성하는 대신, 그 정보만 도출, 식별하는 것이 이 논문의 핵심이다. 이 연구에는 제1저자인 윤웅희 서강대 화학과 연구원의 경험도 담겨있다. 윤 연구원은 과거에 타 기관에서 폭발성 화합물의 실험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윤 연구원은 직접 합성에서 계산화학을 활용한 식별로 폭발물 연구 방향을 바꿨다. 위험한 화학물질일수록 그 연구, 예방도 안전해야 한다고 절감한 것이다.
폭발물의 역사는 화학의 극단적 양면성을 보여준다. 다이너마이트는 광산과 전장에서 함께 쓰인다. 질산암모늄은 비료와 폭발물질의 원료다. 화학의 양면성을 제어하는 핵심은 현대 과학의 올바른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이다. AI와 양자화학으로 신종 폭발물의 성능을 사전에 예측하는 화학적 기술이, 앞으로 닥칠 안보 위협을 예방하는 데만 쓰이도록 노력하는 것도 이러한 방향 설정의 연장선에 있다.
정근홍
용어 설명
제작, 작동 방식 등이 규격화되지 않은 사제 폭발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