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남북의사들, 원폭피해자 구제에 함께 나섰다

내년 4월 히로시마서 일본과 3자 공동회의

한반도를 핵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구하려는 남과 북의 의사들은 인류최초로 원자폭탄의 희생양이 돼야했던 한국인 피폭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부터 함께 시작하기로 했다.

남북한의 의사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 폭탄의 피해를 본 한국인 피폭자들의 보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팔을 걷고 나섰다. 남북간의 이같은 합의는 지난 6월25일부터 7월1일까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10차 IPPNW(핵전쟁방지를 위한 국제의사회)총회에서 남측대표인 한국핵전쟁방지의사회(KPPNW, 회장 이주걸)와 업저버 자격으로 참가한 북한측 대표 강원욱씨(평양적십자병원 원장, 면역의학)일행 3명이 만나 이끌어낸 것이다.

남한측 대표인 KPPNW는 핵전쟁방지에 뜻을 같이하는 의사들이 만든 순수민간성격의 모임으로 북한 의사들과의 공동협력의 장을 만들기위해 90년이래 꾸준히 접촉을 시도 해왔다. 분단상황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민족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면서도 그간 논의 자체가 금기시돼온 '핵(核)'이라는 주제를 놓고 남과 북의 의사들이 만나기까지의 과정과 합의된 내용을 KPPNW의 회장 이주걸박사(대한신경외과 학회 명예회장)에게 들어본다.
 

'상호신뢰'를 강조하는 KPPNW회장 이주걸박사
 

원폭 피해에는 의학적 대책없어

-IPPNW가 85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세간에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은 국민대중에게 낯설다. IPPNW의 한국 지부는 언제 어떤 경로로 만들어졌나.

"IPPNW는 1970년대말 미국인 심장의사 버나드 로운과 당시 하버드대에 교환교수로와있던 소련의 심장병 전문의 게니 차조프가 공동제안해 만든 의사중심의 반핵평화운동 단체다. 80년의 창립총회때는 회원국 수가 미·소등 5개국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79개국에 의사 과학자등 회원 20만명을 확보하고 있다.

그동안 의사의 전문지식을 동원해 핵전쟁 반대 핵무기실험금지등의 여론을 확산시켜 소련의 핵무기실험중지등 핵관련정책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도 IPPNW의 존재가 80년초반 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경직성 때문에 쉽게 모임을 만들지 못하다가 올림픽을 치르던 해인 88년2월16일에야 정식으로 한국지부를 결성했다."

—회원은 어떤 이들이며, 그간의 주된 활동은 무엇이었나.

"KPPNW의 발기인들은 인수회(仁壽會)라는 70세이상 은퇴의사들간의 친목모임회원들이었다. 창립당시 내가 인수회의 간사였는데 취지가 좋고 또 '비(非)정치적이어야한다'는 정관이 호응을 얻어 현업에 있는 사람들보다 시간여유가 있는 은퇴의사들이 이 일을 한번 맡아보자해서 인수회 정기총회 때 만장일치로 한국지부를 탄생시킨 것이다. 현재는 인수회 외에 젊은 의사들을 포함해서 회원이 3백명쯤 된다."

-그간 국내보다는 대외사업에 더 주력한 것으로 아는데.

"한국지부를 결성하긴 했지만 핵문제라는 민감한 이슈를 갖고 국내에서 막바로 일을 시작하기는 어려웠다. 우선은 대외사업을 통해 공신력을 얻은 뒤에 국내지지자들을 얻자는 계획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IPPNW 총회를 통회 정회원국으로 가입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우리의 가입에 거부권을 발동할 수 있는 소련 유고 헝가리 등 공산권 국가방문과 설득작업이 주된 일이었다. IPPNW에는 89년 히로시마회의때 정식으로 가입했다."

-북한과의 접촉은 언제부터 시도했나.

"공식적으로 거론한 것은 90년 8월 마닐라에서 열린 IPPNW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제2차 회의에서였다. 당시 우리는 '한반도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아 전쟁위험이 높은 만큼 이 지역 이해당사자인 북한과 중공이 IPPNW에 가입할 수 있도록 세계본부에서 촉구해달라'고 제안했다.

이번의 접촉도 미국 보스톤에 있는 IPPNW본부가 다리를 놓은 셈인데, UN주재 북한 부대사 허종과 본부가 접촉해 북한대표의 참석을 성사시켰다. 북한의사들이 스톡홀룸에 온다는 소식은 4월경에 통보받았다."

-대외사업 중에서도 굳이 북한과 접촉하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 자신 6·25동란 당시 외과의사로서 남과 북의 부상자를 모두 치료해야했던 쓰라린 기억을 갖고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핵이 사용된 뒤에는 어떤 의학적 대책도 소용이 없다. 오직 사전에 그것을 막는 방법만이 최선이기 때문에 남북의 의사들이 그를 위해 만나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북한대표와 합의한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일부에 보도된대로 내년 4월 히로시마에서 남북한과 일본 3자가 참여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의 한국인 피폭자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보상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이번 8월부터 회담준비작업에 들어가며 그 준비나 상호연락 등은 일본 IPPNW 회장인 요코로 교수(나가사키대)가 맡기로 했다."
 

폭발당시 입은 화상의 흉터를 내보인 피폭자
 

내년 7월 서울서 IPPNW 아·태회의

-회담일정을 내년 4월로 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내년 7월에 서울서 IPPNW 아시아 태평양 지역 3차 대회를 갖기로 했다. 일본에서의 회담이 성공을 거둔다면 북한이 서울대회에도 참석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북한의사들 자신도 '휴전선을 넘어 직접 서울로 오고 싶다'고 말은 하는데 현재로 보아 히로시마 회의는 성사가 낙관적이지만 서울대회 참가 여부는 히로시마 이후를 두고봐야 할 것 같다."

-북한측이 밝히는 피폭자현황은 어떤가.

"이번에 참가한 대표들은 북한의 총 피폭자수가 7천명이라고 밝혔지만 그간 피폭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나 지속적인 치료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7천명이란 숫자는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주소를 갖고 있었던 사람을 모두 합친 숫자 일 것이다.

남한의 경우도 피폭자 추계는 구체적으로 방사능 피폭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숫자를 모두 헤아린 것이 아니라 폭발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았던 사람을 모두 합한 것이다. 그간 우리가 피폭자들에 대한 실태파악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일반적으로 피폭자 규정은 방사능 누출지점 반경 몇㎞ 이내에 있었던 사람으로(히로시마 경우 50㎞ 이내) 한다."

-어떻게 피폭자 보상문제가 공동의 관심사로 제기됐나.

"북한은 지금 일본과 수교협상을 하고 있는데 전전(戰前)·전후(戰後) 배상문제가 핵심 사안이다. 원폭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바로 이 배상금에 포함된 것이라서 북한측이 특히 관심을 보이지않나 생각된다.

(민간단체인 원폭피해자협회는 89년 일본 정부에 보상금 23억달러를 요청한 바있다. 당시 금액은 일본정부가 자국의 원폭피해자 치료와 보상에 쓴 금액을 기준으로 산정한 것이었다. 북한 대표들은 이 피해보상금 산정방식 등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고 남한측 대표단의 다른 관계자는 전한다.)

남한의 경우도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전쟁배상금과 원폭피해자 보상금을 일괄처리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피폭자들이 충분한 치료와 보상을 받았다고 볼 수 없기에 일본 쪽에 우리도 수긍 할만한 보상을 요구하려는 것이다. (김-오히라 메모는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기 전인 지난 62년 당시 국무총리이던 김종필 씨와 일본의 외상 오히라(大平)가 합의한 내용으로 일제 36년간에 대한 배상문제를 골자로 한다."

-남한의 KPPNW는 뜻있는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이지만 북한의 경우 이번에 참석한 사람들이 앞으로도 대표성과 열의를 가지고 사업을 주도해 나갈 수 있겠는가.

"물론 북한에 우리와 같은 민간성격의 의사조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일단 IPPNW에 가입을 결정하면 우리처럼 임의가입이 아니라 전체 의사가 가입하게 돼 오히려 회원확보나 활동이 쉬울 수 있다."

—이번 북한대표와의 합의내용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처음 만나던 날 북한대표들은 대뜸 '남한엔 왜 미군이 아직도 주둔하고 있나'라고 비난했다. 이런 불신을 넘어 서로가 함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도 확보해낸 것, 즉 교류의 물꼬를 텄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상호신뢰가 있어야한다. 이번에도 내년 4월 히로시마 회의나 교류창구같은 것들에 대해 서로 합의한 내용을 문서상으로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서로가 신뢰하지 않으면 그까짓 문서는 휴지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간 활동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90년에 국제핵전쟁예방총회를 위해 소련 알마아타 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다. 알마아타는 잘 알려진 대로 스탈린시대에 연해주에 살던 한인들이 강제이주 당한 곳인데 이 지역 근처의 세미팔라틴스크(Semipalatinsk)라는 곳은 소련정부가 원자폭탄을 개발한 이래 1년에 7, 8회씩 원폭투하실험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당초 총회 참석자들이 이 세미팔라틴스크라는 곳을 방문한 이유는 원폭실험장을 보고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방사능피해 정도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한인 2, 3세 동포들, 그것도 원자병에 걸렸거나 방사능피해의 위협에 놓여있는 동포들을 만났다. 반갑기도 했지만 '우리민족이 왜 이렇게 사지(死地)에 쫓겨다니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대회장에서 함께 포즈를 취한 남북한 의사들. 왼쪽부터 북한의 배창규 강원욱 남한의 이주걸 북한의 리태환씨
 

남북 모두 피폭자 연구 부진

한편 이번 IPPNW 총회에서는 한국의 이명근박사(강화병원 원장·예방의학)가 '한국인 피폭자들의 만성질환'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한국인 피폭자들의 만성질환에 관한 것으로는 최초의 보고인 이 논문에 따르면 진료에 응했던 1천8백44명 가운데 절반가량이 관절염과 위장장애를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대해 이명근 박사는 "이번의 조사가 피폭자들의 일부에 그친 것이며, 피폭 이후 지속적인 진료관찰이 없었다"는 한계를 전제 한 뒤 "일반적으로 동물실험에서 방사능에 의한 관절염피해가 나타날 정도면 그보다 약한 조직인 골수 간등이 거의 파괴돼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피폭자들이 이런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방사능의 영향을 전혀 부정할 수는 없지만 피폭자에 대한 무관심과 대책부재가 낳은 '사회적 피해'라고도 해석 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일본의 경우 1년에 2회씩 정기검진을 받지 않으면 피폭자로서 받을 수 있는 치료기회나 보상금 지급을 중지하기 때문에 피폭자들이 강제로라도 '조기진단 조기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방사능 피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가능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당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살았던 2만여명 중 드러난 피폭자는 2천명 선이고 나머지 1만8천여명은 후유증을 앓지 않는지, 2, 3세에 어떤 영향은 없었는지가 전혀 연구되지않은 형편이다.

내년 4월의 히로시마 회의에서 남과 북은 일본에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기초조사자료를 먼저 교환하기로 했다. 이를통해 그간 은폐됐던 원폭피해의 실상은 보다 명백히 드러나겠지만 일본측의 보상금 지급 등이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낙관 하기는 어렵다. 남북한의 피폭자에 대한 보상문제는 일제시대의 강제징용자, 사할린교포에 대한 보상과도 얽혀있기 때문이다. 같은 원폭피해자인 중국도 남북한을 선례로 보상문제를 제기해올지 모른다는 계산 때문에 일본정부의 행동반경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예측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이 어렵다해도 남북 의사들의 공동결의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피폭자문제에 대한 남북의 공동 대응은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바람직한 일인 동시에 외세에 핍박받았던 한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원폭 피해자들의 실상 소개는 그 어떤 정치적 주장보다도 강하게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웅변하게될 것이다.

인술(仁術)로도 구할 수 없는 핵전쟁의 피해를 미리 예방하려는 남과 북의 의사들, 모처럼의 합의가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계기로 열매맺기를 기대한다.

1991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정은령 기자

🎓️ 진로 추천

  • 의학
  • 역사·고고학
  • 국제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