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학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 공구성은 산신령에게 잘못 걸려(?) 조선시대로 현장실습을 떠나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1주차 실습에서 세종 16년에 인쇄술 혁명을 일으키려다 대실패한 구성, 2주차엔 연산군에 빙의 했습니다. 이번에는 은광을 개발하고, 자본주의와 과학혁명의 기반을 만들 계몽 군주가 돼야 합니다.
현재환
한양대 철학과(사학과 겸직) 부교수. 전공은 과학사철학 및 과학기술학(STS)이다. 과학기술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기를 희망하며 과학사철학과 STS의 대중화를 시도하고 있다. sisyphus.gg@gmail.com


편집자 주
시간을 되돌려 조선시대에 떨어진다고 해도, 설계도만 있다면 증기기관차를 만들 수 있을까요? 현재환 한양대 철학과 교수의 소설 ‘내 손으로 조선에서 과학혁명?!’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해보려 합니다. 서양과학사 전공자인 대학원생 공구성이 조선시대로 떠난 강제 현장실습 이야기입니다.

Georgius Agricolas(W)
독일의 인문주의자,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가 1556년 출판한 책 ‘금속에 관하여(De re metallica)’
에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던 독일의 광산 기술이 집대성돼 있다. 광맥과 광부의 도구, 광석을 운반하는 법이나 은 제련로까지 다양한 지식이 그림과 함께 소개된다.
과제 | 은광을 개발해 초기 자본주의와 과학혁명의 교두보 마련하기

“이번에는 내가 왕인데 뭔들 못하겠어! 이 몸이 조선시대의 계몽군주가 돼 주지.”
큰 소리를 지르며 화려한 옥좌를 박차고 일어난 연산군을 바라보는 대신들의 표정이 볼 만 했다. 황급히 엎드린 이들 중 일부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오후의 나른한 햇살과 교수의 단조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지루한 과학사통론 강의를 듣던 공구성이었다. 과학사 강제현장실습을 떠나 보라며 또다시 구성을 조선시대에 던져 놓은 관악산 산신령이 원망스러웠지만, 조금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이번에 구성이 빙의한 인물은 연산군이다. 왕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세상 풍경이 제법 산뜻하다.
1503년 가을 조선이라면,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이 처벌을 받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처형을 당하거나 부관참시(관에서 끄집어 내어져 다시 처형당함)됐다는 갑자사화의 피바람이 일어나기 딱 한 해 전이었다. 이미 1498년(연산 4년) 사림파를 숙청했던 무오사화로 연산군에게 폭군이란 이미지는 단단히 각인됐다. 하지만 아직은 반정을 당할 만큼 업보를 쌓지는 않았으렷다.
벌떡 일어설 때 공구성의 품에 있던 무언가가 땅에 떨어졌다. 광물학의 아버지,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가 1556년 발간한 책 ‘금속에 관하여(De re metallica)’다. 대학 교육을 받은 인문주의자이자 의사였던 아그리콜라가 광산 현장의 지식을 집대성해 150년 넘게 유럽의 광업 교과서로 군림했던 그 책.
‘권력을 꽉 쥐고 있는 왕이면서 아그리콜라의 지식을 갖췄다니, 이번 과제 너무 쉬운 것 아닌지?’
20세기 초중반 활약한 과학사철학자 에드가 질젤은 근대 초기 서양에서는 ‘학자’와 ‘우수한 장인’이 접촉해 이론과 현장의 지식이 대융합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이 전통적인 학문의 권위를 벗고 장인과 마찬가지로 관찰을 중시했고, 장인의 경험적 규칙을 보편적 물리 법칙으로 진화시키면서 과학 혁명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구성은 이 이론이 퍽 마음에 들었다. 구성에게 질젤의 이론은 하드웨어(장인)와 소프트웨어(학자)를 한 메인보드에 꽂아야 시스템이 돌아간다는 공학적 매뉴얼처럼 보였다. “그래, 이건 좀 말이 되네. 과학의 사회적 구성론이 아니라 시스템 설계잖아.” 구성이 보기에 이 ‘공학적 매뉴얼’의 가장 완벽한 예시가 아그리콜라의 ‘금속에 관하여’였다. 비록 과학혁명기 이전에 나오기는 했지만.
연산군이 된 구성은 지난 번의 실패에 이를 갈며 생각했다. 만약 아그리콜라의 지식을 갖고 있는 이가 조선에도 있었다면, 그가 장인들의 손과 선비들의 머리를 강제로라도 이어 붙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바로 구성이 그런 인물이 될 셈이었다. 연산군이 된 구성은 함경도 단천에서 은광을 개발해 자본 축적의 기초를 다질 것이었다. 은 자원을 확보한 조선은 글로벌 은 순환 경제에 편입되는 동시에, 과학혁명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실습계획 | 단천 은광 개발해 계몽군주 되기
공구성은 자신의 상황을 점검하며 현실적인 구상을 떠올렸다. 시간을 살펴보니 이미 양인 김감불과 장례원의 노비 김검동이 ‘회취법’으로 알려진 기술을 연산군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구성이 빙의하기 약 3개월 전, 연산은 이 기술을 시험하라고 전교를 내렸다.
21세기에 그렇듯 은은 고대에도 오랫동안 화폐이자 사치재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귀금속이었다. 이런 부분을 고려해, 드라마 ‘폭군의 셰프’에서는 현대 한국의 요리사가 시간여행을 해 연산군의 눈 앞에서 일본인과 요리 대결을 벌이고 그 끝에 이와미 은광 채굴권을 얻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전국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이와미 은광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은광이었다. 그러나 아직 함경도 단천에 있는 또 다른 대규모 은광은 개발도 되지 않은 상태다. 굳이 일본과 외교전을 펼칠 필요가 있겠는가.
“단천 은광을 개발해 본격적으로 자본 축적의 기초를 만들고 과학혁명도 일구어 내는 계몽 군주가 되어보자구!”
지금까지 조선인들은 은이 포함된 광석을 녹여 은을 캐냈다. 이 방식은 은의 회수율이 매우 낮아 대규모 생산이 불가능했다. 그러던 중 1503년에 납광석에서 은을 분리하거나, 납을 첨가해 은을 광석에서 분리하는 연은분리법, 즉 회취법이 고안된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구성이 손에 쥔 아그리콜라의 책에는 획기적인 공학 기술들이 들어있었다. 책 속에는 납을 이용해 구리 안에 포함된 은을 녹여 분리하는 자이거 공법이나, 갱도가 깊어질 경우 생기는 지하수 배수 문제를 해결할 피스톤 펌프와 체인 펌프, 그리고 깊은 갱도의 공기 순환을 위한 통기 장치 기술이나 제련 전에 광석을 물로 씻어 불순물을 제거하는 선광법 등이 들어 있다. 회취법과 아그리콜라의 방법을 더하면 16세기 치고 엄청난 효율의 은광이 탄생하리라.
회취법을 받아들인 이와미 은광이 은을 연간 수십 톤(t)씩 생산했으니, 겸손하게 연 5t의 은을 생산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구성은 개혁을 해야했다. 질젤의 테제(정립된 주장)에 따라 장인과 학자를 한 시스템 안에서 융합시키는 근본적 개혁이 필요했다.
“집합! 홍문관 당하관 종3품 아래로 진시까지 집합!”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인 홍문관 관원들 앞에서 구성이 소리쳤다. “아, 자네들은 지금부터 관노들과 함께 함경도 단천으로 간다. 그곳에서 회취법을 익힌 김검동과 함께 은 채취법을 익히고, 은을 생산할 것이다. 목표는 연 5톤… 아니 1300관이다.”
탄성, 아니 괴성이 터져나왔다 구성은 경악으로 물든 홍문관 전한(학술 실무를 총괄하는 종3품 관직)에게 아그리콜라의 책을 쥐여줬다. “경연 같은 고루한 일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말고, 책의 그림들을 보고 궁구하여 관노들이 광산의 기반을 만들게 지도하시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
“과인의 말이 다 끝나지 않았소. 귀천을 가리지 말고 관노들이 가진 기술적 지식들과 광업 활동을 잘 기록하시오. 이를 종합한 책을 집필하기 전까지는 한양으로 돌아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구성은 관원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 이제 계몽 군주가 될 준비를 해볼까?”

국립중앙박물관
함경 단천의 모습을 보여주는 조선시대 지도.
보고서 | 사람이든 환경이든 관계 맺기는 알고리즘이 아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으허헝! 끄엉!”
새벽부터 경복궁이 떠나가라 우는 소리에 구성이 눈을 떴다. 공구성의 단 꿈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첫 사달은 사람에서 났다. 홍문관 관료들은 함경 단천으로 가라는 연산의 명을 기관의 해체와 사회적 유배, 그리고 사대부에 대한 교묘한 모욕 방법으로 받아들이고는 대궐이 떠나가라 통곡했다.
한편 김검동과 같은 관노들에게 연산의 명은 밥줄이자 목숨줄인 ‘비기’를 갈취해간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갑자기 연고도 뭣도 없는 함경도로 가서 비기를 빼앗기라니요. 이럴 수는 없는 법이여유.” 관노들은 한숨을 푹푹 쉬어 댔다. 아그리콜라의 책을 익히고 배우는 협업도 어려웠다. 사대부 학자들은 ‘금속에 관하여’ 속 삽화를 보며 “괴력난신과 잡술이 가득한 그림”이라며 눈을 돌렸다. 관노들은 “기술은 손때를 쌓아가며 익히는 법”이라며 그나마 어명을 수행해보려는 몇 안되는 관료들의 질문을 요리조리 피해갔다.
“아니, 그래도 한번 요 그림을 보고 기기를 만들어보게나. 전하께서 내린 어명 아닌가!”
“종이 쪼가리에 있는 그림 몇 장 봐서는 될 일이 아니라니까요!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던 누구들은 알랑가 몰라?”
공구성은 이들을 한 공간에 몰아넣기만 하면 서로 다른 집단 사이에서 지식이 흐르고 새로운 학문적 종합이 일어나 과학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신뢰가 없는 공간에서는 얼토당토 않은 일이었다. 사대부들은 장인들을 멸시했고, 장인들은 사대부들을 기만했다. 구성이 무시하던 사회적 맥락, 즉 장인과 학자들이 소통을 하기 위해 쌓아야 할 신뢰의 지난함과 맥락성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대가였다. 그러나 사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1 은은 화폐이자 사치재로 중요한 역할을 한 귀금속이었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중인 조선시대 철제 은상감필통. 철로 만든 필통에 은으로 무늬를 입사했다.

Naokijp(W)
2 일본 이와미 은광의 시미즈다니 제련소 터. 전성기의 이와미 은광은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결론 | 조선의 계몽군주에서 산천을 파괴한 폭군으로
“저… 전하!!”
1056년 여름, 장마 빗줄기를 뚫고 승정원 우승지가 헐레벌떡 편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관대와 의복은 진흙탕에 구른 듯 엉망이었고, 사색이 된 얼굴로 젖은 채 고함을 질렀다. “함경도 단천에서… 은장이… 은장이 통째로 사라졌사옵니다!!!”
연산군, 아니 공구성이 입을 떡벌렸다. 전국에서 급보를 알리는 봉화가 오른 후 들려온 소식은 그야말로 지옥도였다. 기록적인 폭우를 견디지 못한 단천의 산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은광과 제련소, 주변 마을까지 통째로 삼켰다는 것이다. 사실 3년 동안의 노력을 통해 단천 은광은 이제 조금씩 은을 생산하고 있었다. 예상치에는 못미치지만, 관노와 관료의 기싸움이 패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은은 나왔고 흑자 전환도 기대해 볼만했다. 어찌됐든 지금 구성은 일개 관원이 아니라 근대 국가의 왕 아니었던가. 그러나 왕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으니, 은광을 둘러싼 자연이었다.
공구성이 설정한 연간 5t이라는 목표치가 조선의 생태계를 비명 지르게 만들었다. 은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땅만 파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그리콜라식 고온 제련법을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양의 숯이 필요했다. 즉 그 숯을 굽기 위해 수만 톤의 생나무가 함경도의 산천에서 사라져야 함을 의미했다.
이는 곧 단천 일대 산림의 완전한 소멸을 불렀다. 함경도뿐만 아니라 인근 도의 백성들까지 벌목에 동원되어 매년 셀 수 없는 생나무를 베어냈고, 울창했던 숲은 흉측한 흙바닥을 드러냈다. 공구성은 수치상의 효율만 계산했지, 나무를 베어 나를 장정들의 피땀 섞인 노동력과 사라진 숲이 가져올 거대한 재앙은 변수에 넣지 않았다.
더욱 끔찍한 것은 제련소 현장이었다. 그야말로 ‘지옥의 입구’였다. 납을 녹이고 산화시키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매캐한 납 증기가 작업장은 물론 인근 마을까지 덮쳤다. 제련소의 광부와 인근 주민들이 매일 피를 토하고 마비 증세를 보이며 쓰러져갔다. 공구성은 이를 우연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현장의 참혹함은 숫자로 가려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장마 폭우로 뿌리 없는 흙더미가 거대한 산사태가 돼 제련소와 마을을 통째로 삼켰고, 공구성이 애지중지하던 피스톤 펌프와 수차들은 비릿한 납 증기 대신 진흙탕 속으로 가라앉았다. 현장을 둘러보고 온 경차관이 전언했다. “함경도인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들고 일어나 ‘결국 ‘하늘’이 먼저 재이(재앙)로 응답했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불만은 함경도를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공구성은 자신이 계몽 군주라 믿으며 재이론을 비과학적인 미신이라 항변했지만 백성들에게 그는 산천을 파괴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려 하늘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오직 학정만 펼치는 폭군일 뿐이었다.
1506년 9월의 밤은 차가웠다. 박원종과 성희안이 이끄는 반정군이 궁궐 담장을 넘을 때, 공구성은 집무실에 홀로 앉아 아그리콜라의 책을 넘기고 있었다. 밖에서는 “천명을 따라 이융을 폐하라!”는 함성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왕이 사치와 강무에만 몰두하는 것을 넘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땅의 배를 갈라 잡술을 부리니, 하늘이 노하여 재이를 내렸다.” 반정 세력의 외침이 아직도 귀에 울리는듯 했다.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가 가는 초라한 달구지 안에서 구성은 가슴팍에 넣어두었던 닳고 닳은 책을 꺼냈다. 구성은 기술만 현실적인 수준에 맞추어 이식하면 시스템이 돌아갈 것이라 믿었지만, 정작 그 기술을 지탱할 사람 사이의 관계와 환경과의 조화의 필요성은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과학은 설계도가 아니라 문화였던 건가…?”
멀어지는 한양의 성곽을 보며 구성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꿈꿨던 계몽 군주의 청사진은 단천의 무너진 갱도 속에 파묻혔다. 실패의 원인은 지난 번과 동일했다. 기술의 부재가 아니라, 그 기술이 발을 딛고 서야 할 조선이라는 사회의 맥락을 무시한 오만의 결과였다. 과학은 사람과 땅, 그리고 그들이 기술이 맺는 구질구질한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다시 산신령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허허,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린 것 같구나. 어찌되었건 2주차 성적 역시 F다. 다음 주차에는 네가 좋아하던 군사혁명을 읽을 차례지? 그렇다면 염초로 한 번 더 만나보자꾸나.” 빛이 번쩍였다. 구성의 정신이 흐릿해졌다. 다음에는 누구에게 빙의할 것인가.
현재환 교수와 소설 뜯어보기
어명으로도 강제할 수 없는 지식의 ʻ교역 지대’
미국의 과학사학자 파멜라 롱은 에드가 질젤의 주장에서 나아가 르네상스 시기 학자와 장인이 만나 지식을 교환하는 일은 광산, 도시 건설 현장 등 ‘교역 지대(trading zones)’에서 일어났으며, 이곳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해 학자들이 경험적 가치를 공유하며 서양 근대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롱은 이런 교역지대는 자동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들이 공동의 언어를 찾아가는 지독하게 느리고 구질구질한 협상의 과정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결국 지식의 융합은 설계도만으로 완성되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기술이 발을 딛고 서야 할 사회적 맥락과 신뢰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ʻ은의 세기’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던 생태적 대가
제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납 증기는 1566년, 아그리콜라의 시대 기술로는 제어할 수도 없고, 위험성이 제대로 인식되지도 않는 재앙이었습니다. 혁신적인 기술이라도 그 사회의 생태적 한계를 넘어서면 재앙이 됩니다.
공구성이 몸으로 깨달은 지식들
Pamela O. Long, Artisan/Practitioners and the Rise of the New Sciences, 1400-1600, Oregon State University Press, 2011.
Saul Guerrero, Silver by Fire, Silver by Mercury: A Chemical History of Silver Refining in New Spain and Mexico, 16th to 19th Centuries. Brill, 2017.

Georgius Agricolas(W)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의 ʻ금속에 관하여’는 150년 넘게 유럽의 광업 지침서였다. 여기엔 자이거 공법 같은 혁신적 제련법이 담겨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