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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 극장]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는 누구일까?”

장영실, 이휘소, 석주명 등 많은 사람이 떠오르지만, ‘씨 없는 수박’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한 농학자 우장춘을 지나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발명이 아니라면?

한국과학사 연구자 김태호 교수에게 우장춘의 진실에 관해 들어보자.

오해1.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이 발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해다. 1955년 7월 30일 영남일보에는 “우장춘 박사 환영회 겸 ‘씨 없는 수박’ 시식회”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 내용은 “육종계의 세계적 권위자인 우장춘 박사를 환영하고 과학농업의 발전상을 널리 소개하고자 씨 없는 수박 시식회를 개최”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즉 시식회에 나오는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 박사가 발명한 것이라고 콕 집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읽는 이에 따라서는 그렇게 읽을 수도 있는, 다소 모호한 기사였다.

 

하지만 우장춘 박사의 명성 때문이었는지 많은 사람들은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 박사의 발명품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장춘 박사 사후에 여기저기서 출판된 위인전에서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이 이야기를 실어서 이 부정확한 이야기는 ‘상식’이 되고 말았다. 이 오해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우장춘의 일생을 추적해 책으로 쓴 일본인 작가 쓰노다 후사코의 노력으로 바로잡혔다.

 

그렇다면 씨 없는 수박은 누가 만들었을까? 일본의 유전학자 기하라 히토시(1893~1986)다. 기하라가 평생 연구한 주제는 식물의 염색체로 그 유전과 진화의 과정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염색체의 개수가 다른 개체의 특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염색체의 개수를 인위적으로 바꾸어 생식 능력(씨앗)을 제거한 수박을 만들었다. 기하라는 수박꽃의 수술에 콜히친(colchicine)이라는 약품을 발라 성염색체의 감수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그러면 꽃가루의 염색체 수는 n이 아니라 2n이 되고, 이것이 n개의 염색체를 가진 정상적인 난세포와 결합하면 2n이 아니라 3n개의 염색체를 가진 수박이 태어난다. 이 수박은 보통의 수박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지만, 염색체 수가 달라서 생식 능력을 잃어버렸으므로 씨앗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기하라가 교토제국대학 교수로서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던 1943년에, 우장춘은 교토의 다키이 종묘 회사에서 농학을 연구했다. 더욱이 염색체 수에 대한 연구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인 ‘종의 합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으므로, 그는 기하라의 연구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우장춘은 기하라의 연구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1953년부터 씨 없는 수박 만들기를 여러 차례 시연했다. 가장 큰 목적은 농민들에게 과학적 농학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농민들 사이에는 한국 농학자들의 실력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는데, 우장춘은 씨 없는 수박 같은 신기한 실험을 보여줌으로써 농민들이 과학의 힘을 실감하고 농학자들과 잘 협업하길 기대했다. 비록 다소 부정확한 면이 있지만 씨 없는 수박 이야기를 전 국민이 기억하게 된 점을 감안하면 그의 바람은 멋지게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해2. 우장춘은 사실상 일본인으로 살았다?

 

우장춘은 1950년 일본을 떠나 한국행을 결심하고, 한국농업과학연구소(현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소장으로 취임했다. 광복 후 과학기술을 기초부터 새로 세워야 하는 현실에서 우장춘과 같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여긴 이들이 ‘우장춘 박사 환국 추진위원회’를 꾸려 그의 한국행을 권유했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우장춘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축하 전보를 보내는 등 지지해 주었다. 하지만 우장춘이 일본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고 존경받는 농학자로 노년을 보낼 수 있었음에도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한국행을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한국에서 이루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1857~1903)은 조선의 무신이었으나,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궁궐의 경비 책임자였음에도 자진해서 일본 자객들에게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범선은 일본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하여 아들 장춘을 낳았지만, 1903년 조선인 고영근에게 암살당했다. 결국 5살에 아버지를 잃은 우장춘은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다.

 

우장춘이 귀국했을 때 많은 사람이 환영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잘 모른다는 점을 트집 잡아 일본인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장춘이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어를 쓰면서 일본인 사이에서 살았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우장춘이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아버지 우범선에 대해 늘 가르쳐주었고, 우장춘도 그를 잊지 않았다. 이는 우장춘이 자신의 성 우(禹)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장춘은 학술 논문에서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우 나가하루(‘장춘’의 일본식 발음)”로 썼다.

 

우장춘이 우범선의 행적에 대해 자신의 가치 판단을 밝힌 적은 없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가족사에 대한 마음의 빚을 안고 살았으며, 그를 갚기 위해선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에 자신이 기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1959년 우장춘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한국 정부는 그에게 문화포장의 수여를 결정했다. 우장춘은 병석에서 이 포장을 받고는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었던 일인 과학 연구로 결국 마음의 빚을 덜었던 것 아닐까?

 

오해3. 우장춘 박사는 학문적 업적이 부족하다?

 

우장춘은 일본과 한국에서 여러 실용적 연구 성과를 남겼다. 일본에선 교토의 세계적인 종묘 회사인 타키이에서 배추, 양배추 등 십자화과 작물의 종자 생산을 연구했다. 한국에 와서는 한국인에게 중요한 김치의 재료인 배추와 무의 종자 개량에 주력해, 광복 이후 공급이 어려웠던 우량종자를 국내에서 생산하며 ‘김치의 은인’이란 별명을 얻었다. 감귤을 제주도의 특산 작물로 추천해 제주도 경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우장춘의 업적은 이런 실용적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1935년 발표한 그의 논문 ‘배추속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은 이른바 ‘종의 합성’이라는 대담한 이론을 실험적으로 보여 세계 생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우장춘은 이 논문에서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하면 제3의 종인 유채가 나온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하고, 이 현상의 원인을 배추와 양배추의 게놈이 합쳐져 유채의 게놈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배추와 흑겨자를 교잡하면 갓을, 양배추와 흑겨자를 교잡하면 고먼(에티오피아 겨자)을 얻을 수 있고, 이 6가지 배춧과 작물 간 게놈의 관계는 위와 같이 삼각형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우장춘의 삼각형(U’s Triangle)’은 식물에서는 종간 교잡을 통해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연구 결과였고,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즉 우장춘은 젊은 시절 일본에서는 식물의 염색체와 유전에 대한 중요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광복 후 한국에서는 육종학의 기틀을 다지고 우량종자를 보급한 실용적 업적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그를 농업과학을 넘어서 20세기 전반 한국 과학계 전체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 에디터

    이창욱 기자
  • 일러스트

    김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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