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세계에 만연한 암수 갈등. 거미도 예외가 아니다. 거미 세계에서의 암수 갈등은 매우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진화생물학계에서 거미는 성 갈등 연구의 주요 모델 중 하나다. 이기적인 암수가 각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떻게 싸우는지, 그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는지, 칼로 물 베기와는 거리가 먼 그들의 살벌한 성 갈등을 함께 살펴보자.

편집자 주

동물 세계에서 성 갈등은 자신의 번식 성공도를 극대화하기 위한 암수의 전략이 충돌할 때 발생한다. 전략의 차이의 암수 생식세포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암수 거미 또한 예외가 아니다. 단일 정자는 단일 난자에 비해 훨씬 작고, 만드는 비용이 저렴하다. 수컷 거미는 기회가 될 때마다 여러 번, 여러 암컷과 교미해야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많이 남길 수 있다. 반면 암컷은 한 번의 교미로도 갖고 있는 대부분의 난자를 수정시킬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거미는 수컷이 짝짓기 이후 육아에 전혀 기여하지 않기에 암컷 입장에선 알 낳기와 알 돌보기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고려하면 힘을 들여 단시간 내에 여러 번 교미할 이유가 없다. 때문에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다. 암컷 거미는 교미 상대인 수컷을 까다롭게 평가하고 고른 뒤, 적은 교미로도 상태가 좋은 자손을 많이 남기고자 한다.
물론 수컷에게도 짝짓기 비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힘들게 찾은 암컷에게 공들여 바친 구애가 거절당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짝짓기 중에 아예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거미는 암컷이 마주한 수컷을 잡아먹는 ‘성적 동족 포식(Sexual cannibalism)’이 흔하게 일어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즉 수컷은 과도한 교미를 원치 않는 암컷을 어떻게든 설득해, 잡아먹히지 않고 교미에 성사해야 한다.
수컷의 가장 로맨틱한 전략
선물 주기
수컷 거미들의 가장 로맨틱한 전략은 암컷에게 선물을 바쳐 설득하는 것이다. 유럽보육그물거미 수컷은 사냥한 먹이를 적당히 손질해 거미줄로 정성스럽게 포장한다. 바로 혼인선물(nuptial gift)이다. 수컷은 암컷에게 혼인선물을 주며 교미를 설득한다. 혼인선물의 영양분은 짝짓기와 임신, 산란과 알 돌보기를 앞둔 암컷에게 귀중한 자원이 돼 암컷의 산란량과 태어날 새끼의 질을 높일 수 있으므로 암수 모두에게 이득이다. 유럽보육그물거미 암컷은 혼인선물을 챙겨온 수컷을 그렇지 않은 수컷보다 월등하게 선호한다.
그런데 일부의 얍삽한 유럽보육그물거미 수컷은 항상 ‘진짜’ 선물을 갖다 바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들은 식물 줄기나 꽃을 거미줄로 포장한 가짜 혼인선물을 암컷에게 들이민다. 사실 암컷 찾기에 앞서 혼인선물로 줄 먹이를 사냥하는 일은 수컷에게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암컷은 혼인선물의 내용물을 확인하기 전에 교미 수락 여부를 결정하므로, 만약 가짜 선물을 가져가도 교미를 허락받는다면 수컷은 사냥할 수고도 덜고 번식도 하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그렇다고 이런 수작에 암컷이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는다. 교미 중 혼인선물의 내용물이 ‘공갈빵’인 것을 알게 되면, 해당 수컷과의 교미 지속시간을 줄여 정자를 덜 받는다. 나중에 진짜 선물을 들고 올 수컷을 위해 정자 저장공간을 남겨놓는 것이다.
한 발 먼저 선수쳐라
신부 포박하기
미국보육그물거미 수컷은 아예 거미줄로 암컷을 포박해 버린다. 몸이 더 크고 다리가 길어서 암컷을 포박하는 실력이 더 좋은 수컷일수록, 교미 중에 잡아먹히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 그런데 이 과정 중에 관찰되는 수수께끼가 있다. 수컷은 암컷을 포박하기 전, 다리로 암컷을 두드리는 행동을 하는데 이때 수용적인 암컷은 정지상태에 돌입한다. 어떤 행동을 해도 반응하지 않는다(수컷의 두드리기로 암컷이 정지상태에 들어가는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수컷은 정지한 암컷을 마음 놓고 거미줄로 묶는다. 암컷은 온몸이 고정된 이후에 정지상태에서 풀려나 거미줄에서 빠져나가려고 발악하기도 한다. 기껏 수컷이 자신을 포박하도록 허락한 듯 하다가도 뒤늦게 저항하는 것이다.
사실 정지상태에서 벗어난 암컷은 수컷의 포박을 비교적 쉽게 해체할 수 있다. 즉 포박은 단순히 수컷이 암컷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하는 행위라기 보다는, 수컷이 더 긴 시간 동안 많은 정자를 전달할 수 있게 해주고, 암컷이 다른 수컷과 교미할 기회를 최소화함으로써 자기 정자가 큰 비중으로 수정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여러 기능을가진 것으로 보인다.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필사의 짝짓기
북미에 서식하는 검정닷거미 수컷은 극단적인 ‘한 방 투자’를 한다. 검정닷거미는 짝짓기가 성사되면 수컷이 반드시 암컷에게 잡아먹힌다. 그런데 수컷이 죽어도 정자는 일정 시간 계속 전달된다. 연구자들은 수컷이 암컷에게 잡아먹히기 전, 교미 단계에서 벌써 죽은 듯 축 처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암컷이 수컷을 다 먹어 치우는 시간 동안 수컷 사체는 암컷의 생식공에 꽂힌 채로 매달려 있었다. 그 사이 죽은 수컷의 교접기는 상당 시간 지속적으로 암컷에게 정자를 짜냈다. 어쩌다가 이토록 해괴하기 짝이 없는 전략이 진화했을까? 연구자들은 우선 야생에서 검정닷거미의 성비가 극단적으로 치우쳐져 있음 에 주목했다. 암컷이 너무 귀하므로, 수컷 입장에선 한 마리의 암컷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죽음을 불사하고 자기 몸을 먹이로써 바치기까지 해야 할까? 연구자들은 실험을 해봤다. 교접을 마친 수컷 시체를 인위적으로 치운 뒤 암컷에게 같은 크기의 귀뚜라미를 먹도록 했다. 그리고 이를 일반적인 짝짓기 과정을 거친 암컷과 비교해 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귀뚜라미를 먹은 암컷보다 수컷을 먹은 암컷이 크고 많은 새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doi: 10.1016/j.cub.2016.08.010 자기 몸을 먹이로 바치는 행위가 번식 성공도를 상승시킨다는 의미다. 수컷 몸에 어떤 성분이 있어 크고 많은 새끼를 낳게 만드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수컷의 극단적인 전략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연구자들은 수컷이 몸으로 암컷의 생식공을 틀어막는 게, 그 시간동안 다른 경쟁자 수컷이 교미할 수 없게 만드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검정닷거미 수컷은 자신의 죽은 몸을 암컷의 정조대로 활용하는 셈이다.

암컷의 성적 동족 포식
남편 공격도 전략?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성적 동족 포식은 성 갈등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지만 거미 세계에서 굉장히 흔하게 나타난다. 거미 대다수가 성체 암컷이 성체 수컷보다 훨씬 크고 힘도 강하므로, 구애하던 수컷이 암컷에게 공격을 받으면 꼼짝없이 당하는 것이다.
동족 포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제시됐다. 앞서 말한 검정닷거미의 예시처럼 수컷을 잡아먹는 것이 다른 먹이를 먹는 것보다 높은 번식 성공도를 가져다준다는 가설, 단순히 사냥꾼으로서 암거미의 공격성이 수컷에게 발현되는 경우라는 가설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가설은 암컷이 성적 동족 포식을 짝선택과 저항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북미붓다리거미 수컷은 솔 장식이 크고 대칭성이 좋을수록 암컷에게 인기도 더 많았지만, 잡아먹힐 확률도 더 낮았다. 암컷의 동종 포식을 ‘이겨낼 수 있는’ 수컷만 교미를 성공하게 되므로, 동족 포식이 암컷이 수컷을 고르는 기준, 즉 허들로 작용한다는 ‘암컷 짝 선택 가설’에 부합하는 사례다. doi: 10.1016/j.anbehav.2003.12.030
‘암컷 저항 전략 가설’은 최근에 제시됐다. 수컷의 강제적인 교미 시도를 받아주기 싫은 암컷의 저항 전략으로 수컷을 잡아먹어 버리는 행동이 진화했다는 가설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적당한 교미 횟수를 채운 암컷은 자신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는 수컷을 상대하기에 불필요한 에너지가 소모되니, 그냥 먹이 삼아 사냥해 먹어 치우는 것이 수컷의 저항도 잠재우고 배도 채우는 암컷의 일석이조 전략일 수 있다.
정자를 선택해 수정한다
은밀한 암컷의 짝 선택
암컷 거미가 쥔 짝짓기 주도권은 수정에서 빛을 발한다. 교미 중에 전달된 정자가 단시간 내에 수정되는 많은 포유동물과 달리, 암거미는 받은 수컷의 정자를 저정낭이라는 기관에서 오랫동안 수정에 쓰지 않고 보관할 수 있다. 이것이 정자를 통제하는 ‘은밀한 암컷 짝 선택(cryptic female choice)’의 근간이다. 여러마리 수컷의 정자를 저장해 놓았다가, 어떤 수컷의 정자를 수정에 좀 더 사용할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몸유령거미의 암컷은 어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수컷과 교미를 하면, 몇 시간 이내에 정자를 몸밖으로 배출하는 행동을 보인다. ‘정자 버리기(sperm dumping)’다. 짧은몸유령거미 암컷은 교미하는 동안 복부를 진동하는 구애 행동을 더 활발하게 하는 수컷을 선호했는데, 연구 결과 실제로 해당 특징을 가진 수컷의 정자를 버릴 확률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doi: 10.1111/j.1420-9101.2009.01900.x
유럽보육그물거미는 수컷의 혼인선물과 암컷의 정자 사용에 깊은 연관성이 있다. 제대로 된 선물을 가져온 수컷과 교미를 했을 때는 단순히 교미 시간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더 높은 비율로 알이 성공적으로 부화했다. doi: 10.1093/beheco/12.6.691
은밀한 암컷 짝 선택이 해로운 근친교배를 줄이는 역할을 하기도한다. 유럽호랑거미 암컷은 교미 기회를 한 번만 줬을 때는 교미 상대가 형제이건 형제가 아니건 비슷한 양의 정자를 저장했지만, 다른 두 수컷과 두 번의 교미 기회를 주었을 때는 두 번째 교미 상대가 자신의 형제일 때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적은 양의 정자를 수정에 사용했다. 형제와 교미하는 선택지밖에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근친의 정자를 사용했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을 때는 되도록 자신과 유전자가 다른 수컷의 정자를 사용한 것이다. doi: 10.1093/beheco/arp097 암거미의 은밀한 짝 선택은 교미가 일어난 후 수컷의 여러 전략을 우회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암컷의 매우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연구는 매우어렵다. 연구자 입장에서도 직접 관찰이 매우 힘든 ‘은밀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몸 내부에서의 정자 통제가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지부터 시작해 많은 질문이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확실한 것은 번식 성공도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암수의 갈등과 각자의 전략이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뜨겁고 정교하다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종종 성 갈등을 군비경쟁에 비유한다. 칼에 화살로, 화살에 총으로, 총에 포탄으로, 포탄에 원자폭탄으로, 상대방이 개발한 전략을 꺾을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개발해 온 인류 전쟁사 처럼, 암수의 성 갈등에서도 서로 맞서는 전략들이 끊임없이 진화한다. 물론 어느 한 성이 완벽히 승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도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거미 연구자로서 우리는 거미들이 더 다양하고 신기한 전략들을 끊임없이 뽐내며 우리들을 수수께끼에 더더욱 깊이 빠지게 만들길 바랄 뿐이다.
Dialogue
거미 연구자들의 꿈
정화: 나는 큰 대학에서 연구하는 교수가 되고 싶어! 과학이 나에게 영감을 주는 방식, 그리고 이 우주를 더욱 존중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 정말 좋거든.
이항: 오, 굉장히 거창하고 멋진 포부네.
정화: 네 꿈도 같으면서 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미인 접시거미를 생각해 보면, 1~3mm 남짓밖에 안 되는 그 작은 생물이 그 형태와 기능에서 얼마나 기적적으로 아름답고 복잡한지 감탄하게 돼. 그 복잡성에 관해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도구가 있는 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난 그 멋진 일을 계속하고 싶어.
이항: 맞아. 지금 우리는 우리처럼, 아니 우리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지.
정화: 그러니까. 내가 교수가 되고 싶은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야. 지금까지 내가 학생으로서 받았던 도움과 친절을 다른 사람들에게 갚을 수 있길 바라. 지금 지도교수님을 포함해서 정말 많은 멘토가 나를 돕는데, 이들로 하여금 나는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고, 좌절의 순간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거든. 내가 다음 세대 거미 연구자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감동적일 것 같아.
이항: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로 받은 도움이 정말 너무 많지. 내가 한국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연구실을 알아볼때, 생각보다 거미 행동생태학 연구실이 없어서 좌절했어. 이후 어렵게 찾은 석사과정 지도교수님을 비롯한 은인분들이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도와주신 덕분에 지금 내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거야. 나도 그런 연구자가 되는 게 꿈이야. 벌레, 거미를 연구하고 싶다는, 다소 무모한(?) 결정을 내린 누군가에게 삶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사람 말이야.
정화: 넌 분명 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우리 둘 다 갈 길이 멀지만…. 우리 몇 년 뒤에 졸업할 수 있을까?
이항: 워워. 흑역사 만들지말자, 정화야. 이거 잡지에 실리는 기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