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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젊은 엄마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 엄마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자식 자랑으로 흘러간다. 그날도 엄마들은 ‘내 자식만의 특별한 재능’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엄마의 이야기에 필자의 귀가 번쩍 뜨였다. 자신의 아이가 생후 8개월부터 기저귀를 떼고 대소변을 가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이가 스스로 양변기에 가서 용변을 시도하려고 하는 나이는 2~3살 무렵이다. 이때쯤 돼야 비로소 아이는 대소변에 관여하는 척수신경이 발달하면서 대소변의 욕구를 느끼기 시작한다. 또 ‘응아’, ‘쉬야’ 정도의 말이 가능해지고 스스로 옷을 벗고 입을 수 있다. 그런데 생후 8개월이라니, 그 아이는 보통 아이보다 1~2년은 빠른 편이었다.
 

전체와 부분의 아슬아슬한 균형잡기
남보다 빠르게 대소변을 가리는 아이가 엄마에겐 자랑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아이는 남모르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성장과 발전에는 때가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대소변 훈련이 잘 되지 않은 아이는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항문기적 성격’을 형성한다. 그런 아이는 커서 완벽주의, 완고함, 인색함, 지나친 질서정연함을 강조하는 어른이 된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를 그렇게 훈련시킨 부모에 대한 반발로 반항, 분노, 지저분함, 가학적 성격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그런 식의 양육 방식은 눈앞의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전형적인 사례라 말할 수 있다.
사실 숲을 먼저 볼지, 나무를 먼저 볼지 결정하는 문제는 우리 인생에서 영원한 숙제이자 딜레마다. 가장 좋은 것은 숲도 보고 나무도 보는 것이다. 전체 그림과 세부항목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비로소 내가 가진 잠재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균형 감각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균형 감각을 갖추지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어김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예를 들어 거대담론주의자들은 숲만 보고 나무는 못 보는 타입이다. 이들은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보려고 한다. 1960년대에 ‘잘 살아보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새마을운동이나 20세기 중반 국내에 불어닥친 민주주의 바람이 대표적인 거대담론에 해당한다. 얼핏 듣기에는 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사실 여기엔 큰 함정이 있다. 거대담론에는 큰 그림은 있을지라도 그림을 그리기 위한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목표대로 끝내려면 치밀한 준비와 집중력이 필요하다. 철저하게 완벽을 기한다 해도 언제 어디에서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숲만 보는 사람들은 그 과정을 생략해버린다. 감정적으로는 조증이 지나쳐 과대망상, 수면에 대한 욕구 감소, 강조된 언어, 사고의 비약, 주의산만, 정신운동성 초조, 부정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쾌락적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노래 제목처럼 ‘무지개 너머’를 좇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반대로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는 사람들도 있다. 완벽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장점은 어떤 일이든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고 그 일을 철저히 해낸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은 작은 그림을 모으면 어떤 그림이 나타나는지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물 속에 있는 돌멩이를 세고 또 세느라 우물 밖에 어떤 큰 세상이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진짜 흥미로운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숲을 보고 나무를 보는 과정이 우리의 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숲을 보는 능력은 뇌의 우반구가, 나무를 보는 능력은 뇌의 좌반구가 담당하고 있다. 또 유연한 생각과 관심 주제에 대한 호감의 크기는 우반구에서, 집중력은 좌반구에서 이뤄진다.
 

 

창조성은 양쪽 뇌의 소통에서 온다

신기하게도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다 필요하다. 만일 우반구와 좌반구를 잇는 구조인 뇌량을 자르면 더 이상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뇌 연구학자인 마이클 코발리스는 “좌반구가 과학이라면 우반구는 자연”이라며 “두 기능이 적절히 합쳐져서 능력을 발휘할 때 최고의 창조력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문제는 요즘 시대 상황이 우반구보다는 좌반구의 기능에 더 관심을 쏟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수능 점수 1, 2점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고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어른들은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반복된 삶을 살고 있다. 숲보다는 나무에 집착하는 세상이다.

우반구에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공감뇌세포인 거울신경세포가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공감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을까. 만일 거울신경세포가 발달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자폐적인 사람이 되거나 병적인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거울신경세포는 생각보다는 감정에 많은 자극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긍정적인 감정에 노출돼야 감정이 풍부하고 이타주의적인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젊은 엄마처럼 성급하게 아이를 키우면 부정적이고 가학적인 감정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다. 창조적일 뿐 아니라 공감의 능력을 갖춘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왼쪽 뇌와 오른쪽 뇌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노력할 때가 아닌가 싶다. 숲도 보고 나무도 보는 현명한 사람이 많아진다면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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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양창순 원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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