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권위의 컴퓨터 바이러스 전문가인 안철수 박사가 자신의 오랜 소원이던 컴퓨터 바이러스 연구소를 설립했다. 올 9월이면 자신의 '전공'인 의학과 컴퓨터가 만나는 '의학정보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그는 요즘 생애 처음으로 컴퓨터 공부에만 전념할 시간을 갖고 있다고 즐거워한다. 연구소 운영과 관련해 앞으로의 포부를 들어본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컴퓨터 전문가'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전산학이나 컴퓨터 공학과 같은 공부를 한 '전공자'보다 컴퓨터와 전혀 무관한 분야를 공부한 '비전공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컴퓨터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힘든 요즘의 세태를 고려한다면 이같은 현상은 별 이야기거리도 못될 것이다. 범용성을 특징으로 하는 컴퓨터가 한 두 '천재'에 의해 오늘날처럼 정보사회의 중심으로 우뚝 선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사용자가 다양하다보니 이 매력적인 기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하고 있든 얼마든지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인물 가운데서 백신 프로그래머 안철수씨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독특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의 '본업'은 의학이다. 하지만 그는 컴퓨터 치료에 더 능통하고, 또 이 일로 더 유명하다. 생물 자체를 연구하는 기초의학 전공의로, 환자 치료에는 본인 말처럼 '돌팔이'일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컴퓨터 사용자중 "컴퓨터 학원에서 1시간도 배워본 적 없는"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뚱보 강사 이기성 교수(계원예술대 전자출판과)는 서슴없이 그를'애국자'라 호칭하고 있는데, 이 생각은 비단 뚱보강사 혼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정열을 바쳐 제작한 프로그램을 돈 한푼 받지 않고 8년여 동안 꾸준히 제공해온 그의 공덕을 글 모르는 백성 어여삐 여겨 한글 만드신 세종대왕과 비교한다면 지나칠까?
"백신 프로그램판매, 오해 마세요"
안철수씨는 지난 2월 중순 백신 개발에 뛰어든 이후 마음 속에 품어왔던 숙제 한가지를 풀었다. 그동안 몇차례 시도했다 사정상 이루지 못한 컴퓨터 바이러스 전담 연구소를 드디어 설립한 것.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라 이름 붙여진 이 연구소는 주식회사로 출범했다. 한글과 컴퓨터사가 5억원에 이르는 연구소 설립 자금과 연간 운영비를 지원하고 백신 프로그램의 독점 판권을 갖는 한편, 전체적인 운영은 안철수씨가 관할하는 형태다. 그리고 이번 연구소 설립과 함께 지금까지 일반에 무료로 제공돼온 백신을 일반 사용자들에게는 셰어웨어 형태로 공급하고, 기업 등에는 상용 패키지나 번들 형태로 공급될 예정이다.
이 연구소의 활동 계획중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운 부분은 바로 일반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셰어웨어 판매 계획. 그러나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고 그를 "돈독 올랐다"고 섣불리 험담해서는 안된다. 비록 연구소가 주식회사이긴 하지만, 그가 연구소에 자신의 이름을 걸어 놓은 한, 물불 안가리고 돈벌이에만 골몰하지는 않을 것임을 알아야한다.
현재 연구소가 구상하고 있는 셰어웨어 형태는 중요 기능이 일부 제한된 형식으로 배포되는 기존의 셰어웨어와는 다른 모습이다. 즉 개인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통신을 통해 온전한 프로그램을 받아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등록을 하는 사용자들에게는 바이러스 소식지와 백신 디스켓 등을 공급하고 세미나에 초청하는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셰어웨어는 능력 있는 프로그래머를 발굴하고 사용자들에게도 소프트웨어의 가치를 인식시키기에 좋은 방법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마케팅 형태. 더욱이 이를 통해 연구소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한다는 것은 거의 기대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 그래서 운영비를 출자한 한글과 컴퓨터사를 통해 컴퓨터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계약을 맺어 원활한 연구소 운영이 가능토록 한다는 것이다.
컴퓨터 제조업체로 보자면 바이러스 백신의 번들 계약은 판매 후 발생하는 사후 서비스 요청이 줄어드는 효과를 얻을 수 있고, 또 국내 제작 바이러스에는 무용지물인 외국산 백신 프로그램을 구입함으로 일어나는 외화 낭비도 줄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연구소의 마케팅을 전담할 한글과 컴퓨터사는 앞으로 연구소에서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인터네트를 통해 국제적인 셰어웨어로 배포하는 한편,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 수출도 고려하고 있는데, 전망은 매우 밝은 편이라고.
불가리아의 경우를 보고 배운다
악성 컴퓨터 바이러스가 날로 증가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연구소의 설립은 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백신 개발이 이제 한 두 사람의 노력과 헌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안철수씨는 오는 9월 경 '의학정보학(medical infomatics)'이란 국내에서는 전인미답의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의학정보학은 그동안 공들여 키워온 의학과 컴퓨터 양자중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어 고민하던 그가 찾은 해답이다.
사실 연구소 설립에 매달려 왔던 일도 그의 유학과 무관하지 않다. 그 이후로도 백신 프로그램은 계속 만들어져야 함에도 그의 뒤를 이을 적임자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전 왕성하게 백신 제작에 힘을 쏟고 있는 후배가 나타나 기대를 걸어 보았으나 그는 자신이 계속 백신을 만들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고, 이 일로 '밥벌이'가 되지 않음을 아는 안철수씨로서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지난 88년 브레인 바이러스 퇴치용 백신을 개발한 이래 거의 매달 새로운 버전을 발표해온 그가 '극찬'해 마지않는 바이러스가 있다. 'dir Ⅱ'란 이름의 이 바이러스는 전문가인 그로서도 분석을 마치고 퇴치용 백신을 만드는데 대략 사나흘이 걸릴 만큼 복잡한 것으로, 디스크의 구조와 주변장치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바이러스가 만들어진 불가리아는 컴퓨터 바이러스 제작 기술을 한차원 높인 '공로'로 '불가리아 바이러스 제작소'란 오명을 얻고 있는데, 'dir Ⅱ'바이러스 외에도 어둠의 복수자(Dark Avenger)와 같은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바이러스가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애초 이스라엘과 파키스탄에서 탄생한 컴퓨터 바이러스가 미국에서 양적인 증가를 이루었다면 기술적인 발전은 불가리아를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안철수씨의 분석이다.
"동구권 국가들에서 바이러스가 대량으로 제작되고 있는 메커니즘에 대해 우리도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수록 경제난이 심각해지고 있어 생필품조차 구하기 어려운 이들 국가 실정에 소프트웨어 저작권이 제대로 보호될 리가 없겠죠. 불법복사가 횡행하다보니 능력있는 프로그래머들은 일할 의욕을 잃어버리고, 대신 바이러스만 양산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발견된 바이러스는 대략 2천종.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88년 브레인 바이러스가 발견된 이래 93년까지 총 1백6종의 바이러스가 보고돼 있으며, 국내에서 제작된 것만 해도 42종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숫자는 특정 바이러스에서 파생된 변종을 제외한 것이다.
"지난 2월에는 연구소 연 기념이란 뜻인지, 이틀에 하나 꼴로 바이러스가 등장했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올해는 바이러스가 바이러스 등장이후 가장 극성을 부릴 해로 기록될 것 같군요."
그가 올해를 '바이러스 극성의 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최근의 컴퓨터 통신 열풍을 염두에 둔 것이다. 통신의 국경이 허물어진 가운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터네트 이용자들에 의해 외국산 바이러스가 대거 유입될 공산이 크다는 그의 설명이다. 이같은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작년까지 국산 바이러스가 창궐하더니 올해는 외국산이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는데, 특히 인터네트를 빈번히 접속하는 연구소들이 모인 대전에서 자주 신고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
그가 알려주는 '바이러스에 당하지 않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국산과 외국산바이러스 퇴치프로그램을 최신 버전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신 프로그램에 대한 맹신은 또다른 화를 불러올 소지가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최신의 백신 프로그램조차 잡지 못하는 새로운 바이러스나 변형 바이러스가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법복사나 건전한 컴퓨터 통신으로 바이러스가 침투할 길을 미리 차단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우리 사회에 끼친 공적도 공적이지만, 안철수씨는 퍽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그가 가진 재주중에는 글재주도 빠질 수 없다. 백신 프로그래머, 의학박사와 함께 그의 이름을 따라다니는 '컴퓨터 칼럼니스트'란 직함은 공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요즘도 한달에 원고지 수백장 분량의 글을 써내고 있을 만큼 왕성한 저작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양이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 터이지만 올곧은 관점과 차분함을 잃지 않은 그의 글은 누가 읽어도 이해하기 쉽고, 또 핵심을 짚어내기에 많은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백신 프로그래밍에 대한 기술적인 언급을 제외한다면 그의 글은'컴퓨터의 주인은 사람'이라는 것을 일관되게 말하고자 한다. "이른바'전문적 지식'이란 인류를 위해 사용될 때만 그 의미를 갖는다"는 그의 생각은 의학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컴퓨터에도 사용자들이 가져야 할 윤리 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컴퓨터 바이러스에 매달려 지내면서, 기술이 지나치게 앞서 사람을 허덕이게 한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손님과 주인이 바뀐 꼴이지요. 한 예로 컴퓨터 관련 서적들이 늘어나면서 바이러스 제작을 가르치는 책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먼저 가르쳐야 할까요."
최근 그는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해온 생각을 진솔하게 밝힌 '별난 컴퓨터 의사 안철수'란 책을 냈다.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책을 통해 아무 대가 바라지 않고 오랜 세월 백신 만드는 일에 매달려온 안철수란 인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가 책에서 오늘날의 자신이 있도록 해주었다고 밝힌 일본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이란 책 한 구절은 특히나 인상적이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미리 남보다 시간을 두 세 곱절 더 투자할 각오를 한다.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두뇌를 지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