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 최대의 도전은 여섯 번째 생일에 시작됐다. 모두가 나만 보면, ‘아기’, 아니면 ‘동생’ 이야기만 했다. 주제가 ‘언니’나 ‘초등학생’일 때도 많았다. 운이 나쁘면 그 모두인 경우도 있었고. 이제 아기가 태어날 텐데, 동생이 생길 텐데 어떻게 도와줄지 물었다. 곧 초등학생이 될 텐데, 큰 언니가 될 텐데 이제는 초록색 채소도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한숨 섞어 말하기도 했다. 해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동생 따위 필요 없고 도와줄 생각 같은 건 없다고 말하고픈 걸, 학교에 들어가려면 아직 멀었고 채소 안 먹어도 잘 컸다고 따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제일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어차피 태어나는 일보다 중요한 건 자라는 일 아닌가.
*
케이크 위의 초 여섯 개를 겨우 불어서 다 끄고 났을 때 엄마가 머뭇거리면서 사진을 내밀었다.
“엄마랑 아빠가 특별히 준비했어, 겨울이 선물.”
사진인 줄도 몰랐던 흑백 사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올챙이 같기도 했다. 생일 선물로 올챙이라니? 어리둥절한 나에게 이번엔 아빠가 말했다.
“겨울이 이제 동생 생긴다!”
엄마는 마치 만화영화 ‘신비하우스’ 속 대장이 중요한 임무를 대원들에게 알릴 때처럼 말했다. 대장이 그렇게 신나고 재밌는 일처럼 과장된 말투를 쓰면, 위험하거나 없애기 힘든 귀신이나 괴물, 때로 외계인이 나타나곤 했다. 올챙이가 외계인처럼 커갈수록 궁금해졌다. 엄마 아빠는 또 다른 아이가 필요했던 걸까. 나는 아닌데.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혹시 학교에 갈 만큼 내가 자라니까 더 작은 아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왜 내 올챙이적 사진은 없을까. 그러다 보면 점점 더 불안한 질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여동생이 좋을지 남동생이 좋을지의 질문을 백 번쯤 듣고 난 뒤 아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언니가 될 거라고. 엄마가 배를 만지작거리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때, 아기가 많이 큰 것 같지?”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으며 떠올랐다. 올챙이 사진을 보여준 후로, 엄마는 나를 ‘아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게 바로 올챙이 때문이었다. 올챙이에게 이름이 필요했다, 아기나 아가를 되찾으려면. 올챙이나 외계인 정도가 좋았지만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할 것 같았다.
쿵쿵. 쿵쿵.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래, 쿵쿵이! 예쁘거나 귀엽지도 않고, 무서운 마음이 잘 담겼는데, 그 정도면 어른들도 괜찮다고 생각해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이름을 다들 너무 좋아했다. 엄마는 눈을 크게 뜨면서, 어떻게 그런 이름을 생각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가 할아버지와 삼촌에게, 아빠가 고모와 할머니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나는 내가 뭔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들 그게 엄청 세련되고 건강한 이름이라고, 진심으로 좋은 이름이라고 했다.
*
저녁을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먹은 듯한 정도였던 엄마의 배가 작은 수박만 해졌을 때 우리는 사진관에 갔다.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의 사진을 새로 찍는 줄만 알았다. 새로 산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서 웃으라는 말에 살짝 들떴다. 내가 내년이면 학교에 가는 걸 기념하는 사진이구나! 현관 앞 장식장 위 가족사진 구역에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 내 돌 때 찍은 세 식구 사진 옆에, 또 한 장이 놓일 터였다.
그런데 사진사가 말했다. 아빠와 내가 엄마 양쪽 옆에서 손을 얹고 엄마 배를 바라보라고. 그렇구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쿵쿵이였다. 심장이 다시 쿵쿵거렸다. 나에겐 없는 사진이, 태어나지도 않은 쿵쿵이에게 벌써 두 개나 생긴다. 그런 일들이 앞으로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다.
온통 쿵쿵이뿐인, 똑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달라지는 건 엄마의 배 크기뿐이었다. 예전 같으면 매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새로운 곳에 가보거나 뭔가를 처음으로 입어보거나 먹어보는 일들이 있었는데. 엄마는 음식을 잘 먹지 못했고,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피곤해졌고, 잠을 많이 잤다. 내 생애 최고로 지루한 날들이었다.
그즈음 내가 새로 한 유일한 일은 코딩 학원을 다니는 거였다. 코딩이 뭘 하는 건지는 나도 몰랐다. 어른들은 그저 앞으론 인공지능이란 게 중요하니까 배워야 한다는 말뿐이었다. 컴퓨터나 휴대폰이나 태블릿처럼, 평소 만질 수 없었던 것들을 쓸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코딩이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공지능인지 코딩인지는 제법 재미도 있었다.
첫 시간에 코딩 선생님이 말했다. 인터넷에 있는 지식과 이야기와 노래와 그림과 사진을 나 대신 공부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첫날은 노래를 만드는 인공지능 ‘시호’와 함께했다. 만들고 싶은 노래가 어떤 것인지 시호에게 자세히 설명해주면 된다는 말에 나는 긴가민가하며 주문했다.
‘신비하우스’의 주제가 같은 느낌의, 퇴마사가 주인공인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입력 버튼까지 누르고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시호가 노래 두 곡을 내놓았다. 멜로디와 박자는 물론이고, 연주에 맞춰서 가사를 부르는 진짜 노래였다. 둘 중 하나를 고른 뒤에, 목소리는 물론 가사의 일부분 혹은 전체적인 노래의 빠르기나 분위기를 다르게 만들 수도 있었다.
태블릿 안에 꼬마 요정이 사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내 마음을 아주 잘 아는 근사한 요정이. 이 요정에겐 원하는 걸 말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내가 만들진 않았지만 나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었던, 내가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는데 듣는 순간 마음에 쏙 드는, 무엇보다도 조금 전까진 세상에 없었던 노래가 태어났다. 내가 만든 것과 다름없었다. 아니, 내가 노래를 만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코딩학원에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
엄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저러다 배가 그대로 터져버리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했다. 엄마의 얼굴이 점점 낯설게 느껴진 게 어쩌면 표정 때문이 아니라, 얼굴 색깔이 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무렵, 아빠가 엄마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온 고모가 차려준 저녁을 먹는데 아빠가 전화를 했다. 엄마는 앞으로 쿵쿵이가 태어날 때까지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나긴 여름이 겨우 끝났나 싶은 정도의 날씨였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잠을 잘 수 있는. 내 기억으로 쿵쿵이는 분명 크리스마스 무렵에 태어난다고 했었다. 그럼 엄마는 대체 얼마나 오래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언제까지?”
집에 돌아와 엄마의 짐을 싸는 아빠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잘못 기억했을지도 모르니까. 아빠의 얼굴이 어두워져서,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했다. 말없이 엄마의 로션을 챙겨 넣는 아빠에게 다시 물었다.
“일곱 밤?”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번 주에는 시호와 함께 동생에게 불러줄 자장가를 만들면 되겠다. 의젓한 언니가 될 준비가 됐다는 걸 보여주면 쿵쿵이가 오더라도 어른들이 계속 내게 관심을 가질지도 몰라. 그런데 아빠가 고개를 저었다.
“일곱 밤씩 두… 번?”
…은 곤란하지만.
“우리도 몰라.”
모르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얼마전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쿵쿵이가 태어나면 일주일 정도는 고모가 우리집에 와서 함께 지내며 나를 돌봐줄 거라고. 그때까지 몇 밤이나 자야 하냐고 물었을 때, 아빠가 백 밤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백 밤을 자도록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게다가 엄마가 병원에 있는 동안은 하루에 30분 씩만 만날 수 있다면서?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은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깜빡이는 나를, 아빠가 안았다. 안 그래도 울음을 참으려니 숨쉬기가 힘들었는데, 아빠 때문에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빠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쿵쿵이 이름으로 새봄 어떨까? 겨울 다음에 오는 새봄.”
그날 밤 고모가 큰 짐을 싸서 우리집으로 왔고, 매일, 아니 매 순간이 도전이었다. 아빠는 하루는 병원에서, 하루는 집에서 잤고,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자곤 했던 나는 내 방에서 혼자 잤다. 아빠 혹은 고모 옆에서 자면 엄마가 없다는 게 더 잘 느껴질 것 같았다.
잠들기 위해 매일 밤 아주 많은 수의 양을 셌고, 그렇게 잠든 뒤에는 꼭 한 번씩 깼다. 고모가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 반찬을 잔뜩 가져다줬지만 고모와 둘이 먹는 아침, 엄마가 없는 저녁은 예전처럼 맛있지 않았다. 유치원에선 친구들과 자주 싸웠고, 혼자 노는 것이 점점 편해졌다. 코딩 학원을 무슨 요일에 가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주말에도 엄마를 30분 밖에 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기다릴 것이 없었다.
크리스마스도 눈도 없이, 추운 날들만 끝없이 이어지는 겨울 같은 날들이었다. 병원이나 유치원에서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른들의 얼굴은, 내가 혼자 깨서 다시 잠들지 못하는 밤보다도 어두웠다. 모두 쿵쿵이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지내게 된 것도, 내 이름이 이렇게 어둡게 느껴지는 것도. 시호와 함께 만든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심장이 쿵쿵 알은 체를 했다.
*
엄마가 집을 떠나고 몇 밤이 지났는지 세는 것을 포기하고서도 시간이 한참 흘렀다. 아무튼 금요일, 코딩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뭇잎들의 색깔이 변하고 있었다. 소풍 가서 넘어졌을 때 무릎에서 방울방울 솟아오르던 피처럼 붉은 빛.
우리 몸속엔 저런 빨간 피들이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는데. 엄마는 쿵쿵이를 낳기 위해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럼 배를 칼로 갈라야 하겠지. 피가 너무 많이 나거나, 멈추지 않으면 어떡하지. 갑자기 몰려드는 무서운 생각을 피하려고 나도 모르게 고모의 손을 꽉 잡았다. 고모가 물었다.
“오늘은 뭘 했어?”
오늘은 그림 그리기를 도와주는 인공지능 ‘아티’와 그림을 그렸다. 어떤 느낌의 무엇을 그려달라고 설명하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칠 부분을 알려주면 된다.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고모에게 건넸다. 고모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쁜지, 슬픈지, 당황스러운지, 화가 났는지, 뿌듯한지, 부러운지, 그도 아니라면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빠랑 엄마랑…”
아, 그래서 말이 없었나.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어 말했다.
“겨울이야.”
그리고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듯 덧붙였다.
“쿵쿵이는 엄마 뱃속에 있지. 아직 콩알만큼 작을 때거든.”
사실 아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그냥 거짓말을 했다.
“이걸… 겨울이가 그렸어?”
“응, 내가 아티한테 시켰어.”
“뭐라고 했는데?”
“우리 가족을 그려달라고 했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서 고모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겨울이가 알려주면 AI가 그리는 거구나.”
“아니야, 겨울이가 그린 거야. 그렇게 하라고 내가 시켰으니까.”
“겨울이 예전엔 혼자서도 잘 그렸잖아.”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긴 했지. 하지만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항상 조금 다르게 그려졌다. 선은 삐딱하고 색은 언제나 선을 삐져나가곤 했다. 완성하려면 늘 처음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고, 완성해놓고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어딘가 달랐다. 하지만 아티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겨울이가 직접 그린 걸 더 좋아하실 거 같은데?”
그럴 리가.
“게다가 여기 이 사람들은 뭔가 겨울이나 엄마, 아빠 같지가 않잖아.”
이제 알겠다. 고모는 지금 아티가 그려준 나와 엄마 아빠가 실제보다 예쁘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그게 아니라면, 쿵쿵이를 빼놓은 것 때문에 괜한 트집을 잡거나.
“내가 그린 거라니까.”
고모가 바라보는 지금 내 얼굴이 평소보다 미워 보일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인터넷 안에서 여태까지 사람들이 그린 그림을 아주아주아주 많이 접한 인공지능이 겨울이의 설명을 듣고 자기가 봤던 그림들을 이리저리 흉내 내서 그려준 거지.”
흉내라니, 그럼 내가 그린 우리 가족이 진짜가 아닌 가짜란 말인가?
“아니라고! 내가 아니면 이 그림은 태어나지도 않았을텐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큰 목소리고 말한 뒤 쿵쿵 소리를 내며 거실을 가로질러서 방으로 들어갔다. 뒷통수가 근질근질했다.
평소라면 손을 씻어야 한다고 말했을 고모가 잠잠했다. 불안한 마음에 급하게 방문을 닫았더니 소리가 크게 났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고모가 아빠나 엄마에게 오늘 일을 전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내가 만든 노래를 들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태블릿을 꺼내 나쁜 귀신을 물리치는 퇴마사 노래를 크게 틀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노래에서 나오는 것인지 내 가슴 속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고모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내 그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코딩학원에 다녀온 날이면 엄마나 아빠가 먼저 묻기도 했는데 몸에 연결된 기계나 줄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엄마는 점점 움직이기 힘들어졌고 엄마는 물론 아빠까지 말수가 적어졌다.
*
두꺼운 잠옷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날이 추워졌다. 고모와 학원에서 돌아오자,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아빠가 앉아 있었다.
“오빠? 불도 안 켜 놓고 뭐해?”
아빠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아니 우리 쪽을 봤다.
“아… 방금 병원에서 오는 길이야.”
어쩐지 아빠가 낯설어서 다가가지 못하는 나를 이제야 발견했는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겨울아, 오늘은 엄마 보러 못 갈 것 같아.”
“왜? 또 무슨 문제가 있대?”
“내일 아침에 수술 해야 할 것 같대.”
“수술? 아직 28주 아닌가?”
고모가 아빠 옆으로 다가앉는 것을 보며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어른들끼리 하는 말을 내가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도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두면 아무에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니까.
소리 죽여 방문을 닫고 태블릿을 꺼내 예전에 고모에게 보여줬던 그림을 열었다. 아이돌처럼 멋진 엄마와 아빠 사이에 드라마에 나오는 똑똑한 언니처럼 차려입은 내가 있었다. 우리가 찍지 않은 가족사진처럼 보였다. 엄마 배는 예전처럼 날씬했고, 나는 엄마 배를 가리키며 바보처럼 웃고 있지도 않았으며, 엄마와 아빠는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림 속의 나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꼭 반반씩 닮았다. 자꾸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얼굴이 원래 내 모습과 다르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많이 버텼지. 언니도 쿵쿵이도.”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고모의 목소리가 들으며 스케치북을 꺼냈다. 겉면에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예전에 말씀하셨었는데. 엄마 뱃속에서 최대한 많이 커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해야 쿵쿵이에게 좋은 일이라고. 크리스마스는 12월인데 지금은 겨우 10월이다.
곧 쿵쿵이를 만날 텐데 나는 쿵쿵이가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다면 엄마와 아빠를 모두 닮았을까. 아티에게 엄마와 아빠의 사진을 주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그려달라고 하면, 제법 근사한 그림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닮은 동생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쿵쿵이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밖에서 이번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웅얼웅얼 속으로 꾹꾹 눌러담듯 이어지는 말들은 대부분 뭉개져 있어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엄마 이름과 쿵쿵이는 분명히 들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두 사람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쿵쿵이의 얼굴을 완성하고 엄마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아빠일 수밖에 없는 낯선 목소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문장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해리와 쿵쿵이는 함께 돌아올 거야. 그렇지?”
아빠가 울고 있었다. 덜컥 무서워졌다. 무서운 이야기를 듣거나, 무서운 귀신이나 괴물 생각 같은 게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때 산타할아버지가 나에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과는 달랐다. 엄마 아빠의 결혼반지를 몰래 껴봤다가 떨어뜨리는 바람에 화장대 밑으로 쑥 들어가버렸을 때와도 달랐다. 지난 여름방학 때 해수욕을 즐기다가,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는 저 바다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생각했을 때와 비슷했다. 갑자기 무서워진 나는 와락 아빠에게 달려들었고 아빠는 그런 나를 안고 둥실둥실 파도를 타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같이 있잖아.”
그 말은 점점 바뀌어갔다.
“괜찮아, 같이 올게.”
*
그리고 마침내 목소리마저 아빠가 아닌 고모로, 그리고 겨울아 겨울아, 내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변했다. 아침이었다.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같이 있는다면서…”
고모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기억 안 나? 아까 아빠가 병원 가기 전에 겨울이에게 인사도 했는데. 겨울이가 대답도 하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도 했는데.”
고모는 웃으려고 애를 쓰지만 잘되지 않는 것 같았다.
“밥 먹자. 유치원 가야지.”
“나 오늘 유치원, 가?”
“안 가?”
“하지만 오늘 쿵쿵이가 올 거잖아.”
내 앞에 밥그릇을 달칵 내려놓고 고모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눈치였다.
“언제 올지 몰라.”
안 올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언제 올지 모른다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나는 쿵쿵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잠들었던 그림을 다시 펴 보았다. 예쁘게 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티에게 부탁하지 않고 직접 그린 쿵쿵이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내가 있었다. 우리 모두 삐뚤빼뚤 함께 웃고 있었다. 어젯밤 전까지는 어디에도 없었던, 내 마음 속에 있는 우리의 진짜 모습이었다.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고모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는 길. 단풍잎들이 저마다 다른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유치원을 마치면 쿵쿵이와 엄마를 보러 바로 병원에 가자고 고모가 말했다. 나는 가방 속에 넣은 그림을 생각했다. 마음에 들게 색을 칠하는 데 성공하면 오늘부터 우리는 모두 함께할 수 있을 거야.
놀이 시간마다 책도 읽지 않고, 블럭쌓기도 하지 않고, 미끄럼틀도 타지 않고 내내 그리기 구역에 머물렀다. 오랜만에 색연필을 사용하기 때문인지 뭔가 낯선 기분이었고, 시간도 훨씬 오래 걸렸다. 내가 손을 움직이는 방향과 방법에 따라서 같은 색연필이라도, 오는 길에 보았던 단풍잎들처럼 조금씩 색깔이 달라지는 게 신기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엄마 아빠나 할머니, 이모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모는 원래 좀 늦곤 했고, 나는 언제부턴가 우리 반에서 가장 늦게까지 남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우리 반에 남은 아이가 세 명에서 두 명, 마침내 나 혼자가 되자 선생님은 나를 강당으로 데려갔다. 나처럼 혼자 남은 동생 반 아이들 대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오늘은 고모가 좀 늦으시는구나.”
선생님이 중얼거렸고, 나는 그림을 완성할 시간이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쿵쿵이의 머리에 꽂아준 예쁜 리본을 색칠하며 생각했다.
‘안녕, 쿵쿵아. 만나서 반가워. 언니랑 멋진 그림 많이 그리자.’
웃는 얼굴이 되도록 엄마의 입을 빨간 색연필로 칠하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안녕, 겨울아.”
엄마.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드는 순간, 문득 알 수 있었다. 도전이 드디어 끝났다. 아니, 진짜 도전은 이제부터였다. 하지만 괜찮다. 쿵쿵이, 그러니까 새봄과 함께다. 아니지, 겨울과 새봄이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