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미가 ‘수다스럽다’고 생각 해본 적이 있는가? 영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이다. 대부분의 거미는 독립생활을 하는 포식자이지만 그들에게도 의사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50여 년 전부터 거미의 수다스러움이 밝혀지기 시작한 이후, 거미의 의사소통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돼 왔다. 물론 거미의 대화는 대부분 특별한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전혀 엿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편집자 주

‘말 못하는 짐승’이란 표현은 동물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모욕적인 언사다. 거미는 화학, 청각, 시각, 촉각 신호를 이용해 대화한다. 심지어 종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제각기 다른 종류의 신호를 사용한다. 거미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대화를, 어떤 방식으로 주고받을까? 수다스러우면서도 비밀스러운 그들의 의사소통을 파헤쳐 보자.

화학신호
원거리 지방방송
거미 의사소통 연구의 과반은 암수 사이의 대화에 집중돼 있다. 대부분 거미는 서로 잡아먹을 수 있는 공격적인 포식자이므로 멀리 떨어져 산다. 멀리 떨어진 암수가 짝짓기를 위해 서로를 찾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화학신호’다. 화학신호는 동물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사소통 수단이다. 거미는 주로 암컷이 분비하는 종특이적 성페로몬을 수컷이 감지해 짝을 찾는다. 물리적·시간적 장벽이 적고 먼 거리에서도 작용할 수 있는 성페로몬은 동종 암컷의 유무와 대략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암컷이 얼마나 매력적인지에 대한 정보도 전달한다.
암거미의 성페로몬은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공기 중에 퍼지는 휘발성 페로몬과 거미줄에 묻어있는 페로몬이다. 수컷은 다리와 몸에 페로몬을 감지하는 감각모를 지니고 있다. 암거미의 성페로몬은 짝짓기 경쟁에 나가는 수컷들을 조급하게 만든다. 많은 종에서 암거미는 여러 수컷과 짝짓기를 할수록 다음 수컷의 구애를 받아줄 확률이 점점 낮아지기 때문에, 수컷 입장에서는 가능한 빨리 동정인 암컷을 찾아가 교미를 성사해야 한다. 호주검은과부거미는 야생에서 성비가 극단적으로 수컷에게 치우쳐있어 80%의 수컷이 평생 암컷을 찾지 못하고 죽는다.
호주검은과부거미에 대한 한 연구에서는 유년기 수컷이 암컷의 페로몬에 노출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교했다. doi: 10.1016/j.cub.2006.03.017 수컷은 페로몬이 없는 환경에서는 성숙 시기를 길게 잡아 천천히 큰 성체로 자라지만, 암컷 페로몬을 감지할 때는 반대로 성숙 속도를 앞당기는 대신 작은 성체가 됐다. 암컷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전자의 경우에는 서두르기보다는 크고 수명이 긴 개체로 태어나서 오랫동안 암컷을 찾아다닐 수 있어야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다른 수컷 간의 선착순 경쟁이 예상되므로 빨리 성체가 돼 암컷을 선점하는 것이 나은 전략인 것이다.
암컷은 페로몬으로 자신의 조급함을 알리기도 한다. 긴호랑거미 암컷은 공기 중과 거미줄에 모두 성페로몬을 분비하는데, 성체가 된 이후 일정 나이까지 짝짓기를 하지 못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정란을 낳게 된다. 자손은 생산하지도 못한 채 엄청난 양의 자원만 소모하는 것이다. 때문에 교미를 하지 못하고 나이가 든 성체 암컷은 젊은 암컷보다 페로몬에 훨씬 많은 투자를 해 더 많은 수컷을 빠르게 끌어들인다. doi: 10.7717/peerj.1877
이처럼 대부분의 거미가 화학신호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수많은 행동 실험들로 증명돼 왔다. 그런데 그 화학물질이 어디서 기원하며, 어떤 물질이고 어떻게 감지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놀라울 정도로 정보가 없다. 현재까지 분자구조가 규명된 거미의 성페로몬은 십수종에 지나지 않는다.

청각신호
시장통 속 대화
화학신호를 통해 서로 가까워진 거미들은 또다른 대화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청각신호다. 청각신호는 화학신호 다음으로 거미들이 흔하게 사용하는 소통 수단이다. 북미붓다리늑대거미속(Schizocosa) 수컷들은 페로몬이 묻은 암컷의 거미줄을 따라가다가, 근처에 암컷이 있다 싶으면 땅바닥에 진동 신호를 내어 구애하기 시작한다. 진동 신호를 내는 거미들은 다리나 배로 땅을 두들기거나, 머리가슴과 복부 사이의 발음기를 서로 비비거나, 몸을 파르르 떨어 만드는 여러 종류의 미세 진동을 조합해 각 종마다 다른 형태의 ‘노래’를 부른다. 이러한 매질 진동(Substrate-borne vibration) 신호 대부분은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어, 연구자들은 레이저 진동계 등의 첨단 장비로 녹음해 그 형태를 파악하고 우리 귀로 듣고 비교할 수 있게 변환한다.
진동 신호의 큰 단점은 간섭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주변 환경이 만드는 잡음이나 다른 수컷이 내는 신호가 있다면 진동이 섞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미들도 시장통에서 제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법을 안다. 미국 미시시피의 (거미들 입장에서) 아주 시끄러운 한 활엽수림에서는 서로 다른 형태의 구애 진동 신호를 내는 북미붓다리늑대거미 두 종 (S. stridulans, S. uetzi)이 함께 서식하고 있다. 최근 한 연구에서는 접촉식 마이크를 이용해 활엽수림 바닥의 진동을 분석해 수컷이 이웃 거미가 만드는 소음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살폈다. doi: 10.1038/s42003-023-05700-6 S. stridulans 수컷은 주변에 많은 S. uetzi 수컷들의 진동 신호가 들릴 때 소음 속에서 자신의 진동 신호를 같은 종 암컷이 더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패턴으로 바꿨다.
시각과 다중감각
복잡한 대화

수컷의 진동 신호는 현란한 춤과 함께 만들어진다. 거미를 비롯한 동물의 의사소통은 대부분 두 가지 이상의 감각 신호가 결합한 ‘다중감각 신호(multimodal signal)’다. 케이팝 아이돌의 무대를 떠올려보자. 안무와 노래가 조화를 이룬다. 북미붓다리늑대거미 수컷도 마찬가지다. 앞다리로 바닥을 내려치는 동작과 다리와 몸을 비비는 동작은 시각적으로 서로 다른 안무를 구성함과 동시에, 각기 다른 형태의 진동을 바닥에 전달한다. 춤과 진동이란 복합적인 구애는 암컷의 교미 수락 확률을 더 높인다.
하지만 모든 암컷 거미가 수컷의 춤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거미는 대체로 눈이 나쁘기 때문이다. 크고 좋은 눈을 갖고 있는 깡충거미는 극단적인 예외다. 이들의 눈은 일부 척추동물에 준하는 해상도와 색 구분능력을 갖고 있다. 때문에 깡충거미 수컷 또한 붓다리늑대거미 수컷처럼 춤과 진동 신호가 결합한 복잡한 구애 신호를 선보인다. 또한 눈이 예외적으로 발달한 탓에 몸에 지닌 발색과 춤이 매우 화려하다. 거미류 전반에서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성적 동족포식(Sexual cannibalism)은 매우 흔하다. 깡충거미 암컷은 수컷의 화려한 춤과 진동 신호를 총동원한 구애를 받아줄 듯 한참 지켜보다가도 순식간에 공격해 잡아먹곤 한다. 미국 애리조나의 한 숲에서는 극락깡충거미속의 세 종이 공존하는데, 세 종 모두 암컷이 구애하는 수컷을 잡아먹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런데 세 종 수컷은 모두 다른 종의 암컷을 만나는 족족 구애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doi:10.1371/journal.pone.0173156
이건 정말 황당한 일인데, 다른 종의 거미는 생식기 구조가 달라 교미가 물리적으로 성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동종 암컷을 향한 구애 행동은 성공시 자손을 남기게 된다는 보상이 있어 포식 위험을 감수할 수 있지만, 짝짓기가 불가능한 암컷에게 구애 신호를 보내는 것은 잡아먹힐 위험만 늘릴 뿐임에도 극락깡충거미속 세 종의 수컷은 구애 신호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실수’가 단순히 수컷의 인지능력 부족으로 나타나는 일인지, 혹은 암컷이 같은 종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데 시간을 들이기보단 일단 구애 신호를 보내는 것이 짝짓기 성공률을 보장해준 결과일지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
훔쳐듣기
기회이자 위기
거미도 대화가 흘러 나가거나 도청당해 악용당하는 경우가 많다. 북미붓다리거미 수컷은 자신이 암컷의 화학신호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주변의 다른 수컷이 진동 신호를 내는 것을 들으면 자신도 곧바로 진동 신호를 내며 구애 경쟁에 끼어든다. 실험실에서 단독사육돼 다른 개체와 상호작용 경험이 없는 수컷은 끼어드는 능력이 없다. 그런데 다른 수컷의 구애 진동 신호와 암컷의 거미줄 페로몬을 함께 제시하는 연관학습 훈련을 받자마자 주변 수컷의 진동 신호에 반응해 자신도 진동 신호를 내기 시작했다. doi: 10.1016/j.anbehav.2015.05.001
대화의 도청자가 꼭 거미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가장 치명적인 경우는 같은 종끼리의 의사소통을 포식자가 훔쳐 듣는 경우다. 거미는 사용하는 신호의 종류와 무관하게 온갖 포식자들에게 도청당한다. 그물을 치는 거미들의 페로몬은 거미를 숙주로 삼아 알을 낳고 새끼들이 먹어 치우게 하는 기생벌에게 도청당한다. 북미붓다리거미 수컷은 춤에 진동 신호가 더해졌을 때, 그리고 동작을 더 눈에 띄게 하는 앞다리의 장식이 커질수록 구애 중 깡충거미에게 발각돼 공격당할 확률이 높아졌다. doi: 10.1093/beheco/arl079 다른 늑대거미의 일종은 바닥을 드럼 치듯이 두드리는 진동 신호를 더 활발하게 낼수록 교미 성공율은 올라갔지만 동시에 도마뱀에게 잡아먹힐 확률도 올라갔다. doi:10.1046/j.1365-2656.1998.00192.x
어쩌면 인간이 거미들의 수다스러움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은, 거미가 인간이 자신들의 의사소통을 훔쳐 듣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아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Dialogue
정화: 하… 어디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하나를 꼽기가 정말 어렵지만 아마 석사과정 시절 거미 종을 구분해야 했을 때 같아.
이항: 하루 종일 현미경 밑에 앉아 있었겠구만?
정화: 그렇지. 특히 나는 접시거미라는 녀석들의 종 구분을 해야 했는데, 이 녀석들이 커봤자 2~4mm밖에 안 되는 애들이라서 너무 힘들었어.
이항: 심지어 그냥 외형도 아니고 배 밑에 있는 생식기를 봐야 하잖아?
정화: 정확해. 심지어 보통 다른 거미들은 외형이 서로 비슷하게 생긴 종이더라도 생식기 모양은 판이해서 현미경 밑에서 쉽게 구분이 가능한데, 접시거미과는 다른 종끼리 생식기 모양까지 비슷한 경우가 많아!
이항: 암컷 생식기 전체라고 해도 지름이 몇백 마이크로미터 단위잖아? 현미경 보느라 눈 많이 나빠졌겠다.
정화: 너는 언제가 가장 힘들었어? 네 연구대상인 깡충거미는 눈도 좋고 행동도 활발해서 연구하기 쉬워 보여. 이항: 그렇게 말 함부로 하지 마. 바로 그 점이 축복이면서도 저주니까.
정화: 앗 왜?
이항: 눈이 너무 좋은 게 문제야. 다른 거미들을 잡을 때는 발걸음만 잘 죽이고 다가가도 잡기 쉬운 경우가 많은데, 깡충거미는 멀리서 내가 다가오는 걸 직접 보고 숨어버린다니까?
정화: 에이, 그래도 일단 실험실에 데려오면 시각 자극에 반응하는건 장점이잖아!
이항: 문제는, 실험할 때도 내가 움직이면 봐야 할 걸 안보고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본다는 거야! 어떻게든 나는 거미를 관찰할 수 있으면서, 거미는 나를 볼 수 없게 해야 해.
저자
서정화(Jillian Kurovski): 미국 네브라스카대 거미행동생태연구실 연구원. 미국에서 거미류의 계통분류와 군집생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닷거미류의 암컷 주도 짝선택을 주제로 박사학위 연구 중에 있다. 한국 태생으로, 생후 8개월에 미국으로 입양됐다. jkurovski2@huskers.unl.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