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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SF] 수면예찬

▲라헌, midjourney<

 

영상 파일 #1은 4초에 불과했다. 비스듬한 햇볕에 잠긴, 거의 빈 교실이 보인다. 카메라는 창가 분단 맨 뒷자리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엎드린 인물(편의상 ‘x’라고 하자)을 줌인했다. 영상 파일 #2는 “너 또 영상 찍지”라는 x의 잠긴 목소리로 시작했다. 여전히 담요를 뒤집어쓴 채로 카메라를 뺏으려는 x의 손과 흔들리는 카메라, 촬영자의 웃음소리가 담겨 있다. 게으르다는 비난을 받고 x는 잠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며 인생의 목표이자 종착점이라고 웅얼웅얼 항변했다.

20xx년에서 20xx년에 걸쳐 카카오톡 이용자 ‘수연’은 몇 번이나 해당 영상 파일을 자신에게 다시 전송했다. 같은 기간 수연이 자기 자신과의 채팅방에 쓴 일기는 아버지의 빚이 늘고 어머니가 불면증에 걸리고 자신도 점점 잠들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기록했다.

수연의 기록에 따르면 길고 조용한 겨울밤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생각할 거리도 없었지만 수연은 잠들지 못했다. 자신의 방에서 끝없는 겨울을 응시하는 평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곧 집을 팔아서 아빠의 빚을 갚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으므로. 동굴 같은 긴 겨울밤 자체도 기후변화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수연은 침대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네이버 지식인에 올렸다. 휴대폰이 아니라 노트북이나 종이와 펜을 들고 있었다면 더 긴 글을 썼을까? 휴대폰 자판을 경유해 추출된, 수연의 모든 생각과 그리움과 불안의 합은 고작 3줄이었다.

“왜 인간은 8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점점 더 적게 자는 걸까? 진화가 잘못된 것 아닐까?

자는 중에는 다들 행복하잖아. 적어도 적극적으로 불행하지는 않잖아.

과학 기술이 이렇게 발전했다면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20xx년 12월 04:55분 게시된 이 질문 글은 두 자릿수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약 한 달 동안 어떤 답변도 달리지 않았다. 즉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한 달하고도 이틀 뒤에 ‘잠자는도마뱀’이란 아이디로 긴 댓글이 달렸다.

“진화적으로 잠이란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저도 늘 의문을 가지고 있던 부분입니다. 잠이란 생명체가 무한히 취약해지는 순간인데 지구상의 생명체 모두가 그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다니,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잠은 호흡을 규칙적으로 만들고 심박을 낮추죠. 

어쩌면 잠이란 모든 생명체가 지향하는 가장 충만한 상태 아닐까요? 우리는 결국 잠자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까요? 동물 아니 생명의 본래적 목표가 가능한 많은 영양분과 안전한 자리를 확보하여 가능한 많은 잠을 자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 본래적 목표를 잃고,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잠의 문제를 해결할 기술이란 이미 존재하는 거 아닐까요? 다만 자본주의적 논리로 상용화되지 않고 있거나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죠.”

수연은 잠자는도마뱀의 댓글을 확인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수연은 네이버 지식인에서 흔히 쓰이던, 만족스러운 답변에 포인트를 부여하는 기능을 이용하지 않았고, 다른 어떤 반응도 남기지 않았다. 수연의 카카오톡 일기도 비슷한 시점에 끊겨서, 몇 년 뒤에야 다시 시작됐고, 재개된 일기는 건조하고 단편적인 스케줄 기록에 가까운 형태였다. x나 수면에 대한 감상적 단상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하지만 잠자는도마뱀 글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문단은 ‘예쁜 문장’으로 수집돼 한국어 사용자들의 월드 와이드 웹을 돌아다니게 됐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결국 잠들기 위해 태어난 것 아닐까. 조용히, 평화롭게”

로 변형됐다.

이 문구는 깔끔한 손 글씨의 편지 형태로 유명 아이돌 “수온심연”의 솔로 데뷔곡 「내게 남은 시간을 잠으로 보내고 싶어」의 뮤직비디오 첫 장면에 등장하며 크게 유행했다. 「내게 남은 시간을 잠으로 보내고 싶어」의 전체 영상은 유실됐지만 금발로 염색한 수온심연이 “잠으로 보내고 싶어. 조용히, 평화롭게”라고 적힌 엽서를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장면은 다양하게 가공된 이미지들로 전해졌다.

수온심연이 일찍이 연예계 은퇴를 선언하고 SNS 계정을 삭제한 이후 잠자는도마뱀의 문구는 사실상 수온심연을 상징하는 문장이 되었다. 연예계 은퇴란 K-아이돌 문화에서 흔하지는 않아서, 수온심연이 범죄 연루로 협박을 받았다는 둥 우울증이라는 둥 추측이 분분했지만, 그는 제주도에서 평화롭게 사는 걸로 보였다. 팬들은 한편으로 수온심연의 평화에 안도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평화롭지 않았고 잠자는도마뱀의 문구가 그들에게 어떤 위로를 줬다. 결국은 발굴된 원본 댓글이 팬들 사이를 돌아다니게 됐고, 원본 필사가 유행했다. 당시 한국 아이돌 팬들의 검색 능력으로도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인터넷에 다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잠자는도마뱀이 곧 수온심연 본인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잠자는도마뱀의 글은 수많은 종이에 옮겨졌고, 캘리그래피가 됐고, 엽서로도 팔렸고, 각종 반짝이는 굿즈로 다시 태어났다. 수연도 그것들을 스쳐 지났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 스쳐 지났을 것이다. 코엑스역에 걸린 번쩍이는 수온심연 생일 광고판에서, 수온심연의 팬인 친구 가방에 달린 손 글씨 열쇠고리에서, 그리 춥지 않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카페 구석을 차지하고 열띠게 얘기하던 수온심연 팬들 손안의 포토카드에서. 잠자는도마뱀의 글을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소유하고자 했던 팬들은, 그 글자들이 단순한 폰트 묶음보다 더 오래 갈 실체를 얻었으면 하는 갈망에 이끌렸다. 하지만 기후대격변과 그에 뒤따른 사회 혼란은 그들의 기대를 잔혹하게도 배반했다.

 

Q. 집단 수면 계획이란 무엇인가요?

A. 인류를 집단 비면(非眠)/불면의 상태에서 수면 상태로 평화적으로 이행시키는 계획입니다. 

 

당시 수온심연은 해외 팬도 많아서 잠자는도마뱀의 글 원본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됐는데, 그 과정에서 대만어와 광둥어 수온심연 팬페이지 「너와 잠드는 여름밤」에서 활동한 번역자 ‘잠의기대’가 자신만의 주석을 붙였다. 

“즉 잠이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잠을 위해 존재하는 셈이다. 도저히 우리가 왜 자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잠을 진화적 부작용이나 실수로 본 이론들이 오히려 정곡을 찌른 면이 있다.

프로이트도 마찬가지로, 반만 맞았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죽음의 충동과 성의 충동의 대립의 역사가 아니라, 잠의 충동과 식욕의 대립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잠의 충동이 아니라 식욕이야말로 파괴적 충동이다. 서로를 삼키고, 나라를 삼키고, 마침내 지구를 삼키려 한다.”

이 잠의기대는 당시 홍콩에 살았으므로, 그녀가 잠자는도마뱀의 문장을 번역하는 동안에도 거실 텔레비전에선 제 11.5차 우산 혁명의 소식이 흘러나왔다. 잠의기대는 평소에 정치적인 성향을 내비친 적이 없고, 수온심연에 대한 것 이외에는 큰 열정을 보인 적도 없는, 조용한 여학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선지 다음 날 점심을 먹고 혼자 중서구 쪽으로 외출했고, 해당 지역에서 수많은 동년배와 함께 실종됐다.

 

Q. 집단 수면이란 결국 인류 집단 자살 계획 아닌가요? 

A. 수면과 죽음, 집단 수면과 집단 자살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생의 99% 이상을 잠으로 보내는 거의 완전한 종족 검은머리박쥐 연구에서 개발된 시르케디안(circadian) 수면유도제는 이론적으로 무기한 수면을 가능하게 하지만, 무기한 수면 상태는 코마 상태나 식물인간 상태와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무기한 수면자는 수면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역행 가능성, 즉 언제든 깰 수 있는 가능성을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협회가 지지하는 집단 수면 이행 계획은 10-1-10-1-oo 형태입니다. 인간 신체의 자연스러운 리듬이자 근대 이전 인류 다수의 리듬이던 3수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방식입니다. 수면자는 우선 10년 수면을 취한 뒤 지인과 친지와 회포를 풀고. 각종 오락을 즐기고,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이후 다시 잠드는 것을 2번(필요한 경우 그 이상) 반복하면서, 무기한 수면을 준비합니다. 

장기적으로도 협회는 인류의 완전한 멸종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소수의 ‘관리자’ 형태로 생존한 인류는 여태까지 축적된 과학 기술을 이용해 비인간동물종의 삶을 개선하고, 치료하고, 고통에 시달리는 생명체들에게 잠과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입니다.

 

*

잠의기대의 주석은 익명의 팬이 잠자는도마뱀 글과 한데 묶어 광둥어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은 잠자는도마뱀 글의 영어 번역 중에서도 깔끔하고 예뻐서, 두 사람의 글은 이후 한데 묶인 형태로 수온심연의 팬덤과는 관계없는 공간들을 돌아다니게 됐다. 파스텔톤의 꽃들이나 반짝이는 도시 이미지를 배경으로 인스타그램 스토리 등에 복사, 재생산됐고 영미권의 자기 발견 심리학 및 불면증 커뮤니티에도 종종 포스팅되었다. 잠의기대의 주석은 현존하는 어떤 심리학적 이론에도 근거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전문적인 듯 보이는 데다 설득력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을 설득했다. 전문가들이 유튜브 등에서 여러 번 지적하고 반박했지만 잠의기대의 이론은 결코 완전히 끌 수 없는 조용한 불길처럼 번졌다.

불길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시골에서 혼자 초고난이도 클리커 게임 「SLEEP!」을 개발하던 한부모 가정 고등학생 ‘sleeptention’의 눈에 띄었다. 그는 그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최종 스테이지 악역 ‘규칙적인 심박의 교단’을 디자인했다. 교단은 처음엔 마치 건강한 수면법을 전파하는 무해한 조력자 집단처럼 등장했다. 신도들과의 대화로만 얻을 수 있는 규칙적인 심박의 알약은 강력한 체력 회복 아이템으로, 게임 진행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게임 종반에 이르면 교단의 실체가 드러났다. 교단은 사실 인류 혐오자들이 세운 사이비 종교로, 인류를 강제적으로 100년간 집단 수면에 들게 함으로써 인간을 멸종시키고 지구 환경을 정화하고자 했다. 최종 스테이지에서 플레이어는 체력 회복 수단도 없이 수많은 신도의 공격을 피하는 한편, 마우스를 최대 속도로 클릭해서 캐릭터의 수면욕 수치를 낮게 유지해야 했다.

「SLEEP!」은 결국 발굴돼 좋은 평을 얻었지만 발굴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아주 긴 시간이. 「SLEEP!」이 숨겨진 명작 리스트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 개발자 sleeptention은 이미 기다림에 지쳐 개발용 컴퓨터를 처분하고 아버지의 창고를 떠난 지 오래였다. 미국 유타주에서 트럭 기사가 된 그는 모니터 앞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사막을 혼자 왕복하며 수없는 깊은 쪽잠을 잤고, 더 이상 무엇도 기다리지 않았다.

 

Q. 마치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A. 협회는 인간종의 일원으로서 인간종의 충만한 삶 보전을 다른 어떤 목표보다 우선시합니다. 이를테면 협회는 근래의 환경 변화가 인간에 대한 지구의 앙갚음, 징벌, 혹은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피드백이라고 보고, 집단 자살(극단적 날씨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방식의 간접적 자살 포함) 혹은 의도적 부작위로 통해 지구의 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집단적 행동이 19세기 중반 이후 지구 동물종의 고통에 큰 책임이 있지만, 인간 테크놀로지가 지구 동물종 고통의 유일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협회는 인간이 지구를 충분히 사용했으므로 이제 비인간종에게 자리를 비켜줄 책임이 있다는 류의 믿음에는 조심스럽게 조건부로만 동의합니다. 협회는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단체들과 순수한 연구 목적으로 협력할 뿐, 액티비즘에 있어서는 철저한 상호 비관여를 기조로 합니다. 

 

서울 체감온도가 유타의 사막보다 높은 여름밤이었다. x는 마침내 발매된 「SLEEP!」 한국어판의 엔딩을 보기 위해 7시간이 넘게 뜨거운 컴퓨터 앞에 매달렸다. 「SLEEP!」은 세이브 포인트에 의존할 수 없이 쭉 플레이해야 하는 게임이었다. 반나절에 육박하는 연속 클릭으로 손목이 지친 상태에서 “휴식의 욕구와 더 이상 싸우지 마세요...”라고 적 NPC가 말했을 때 x는 자신도 잘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받고 말았다. 그는 글을 많이 쓰는 편은 아니었다. x는 생업으로 배달을 했고, 배달을 하지 않는 날엔 배달을 시켜 먹었다. 그가 규칙적으로 쓰는 글이라곤 약간의 덤을 대가로 별점 5점을 약속한 배달 음식 리뷰 정도였다. 그는 게임을 클리어하고도 한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메모장 앱을 켜서 누구 보라는 것인지 모를 리뷰를 적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게임이었습니다. ㅎㅎ 단순한 선악 구도가 아니어서 좋았습니다. 규칙적인 심박의 교단... 정말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조금 엉뚱한(혹은 위험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지원자만 받아서 잠재운다면 지구 온난화의 해결책도 되고, 좋을 수도? 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절대 지원 안 할 거지만요.(이모티콘)”

글은 어떤 독자에게도 닿지 못했을 뿐더러, x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다. 전처럼고등학교 시절처럼말로 할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지도, 좀 더 자연스럽게 깊은 곳의 생각을 꺼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x는 이모티콘 폭격과 의미 없는 밈과 자기 의심 없이는 어떤 언어도 발화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고, 한때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알았는지도 잊어버린 후였다. 그처럼 한 번 하고 다시 하지 않게 된 생각은 우리 안에 잠든 채로 계속 존재할까, 아니면...

 

Q. 어차피 비현실적인 망상이 아닌가요?

A. 더 이상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르케디안 수면유도제는 강한 외부적 충격이 부재한다는 전제하에 수면이 이론적으로 무한히 지속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농축영양주사는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초장기 수면 상태 유지를 가능하게 합니다. 집단 수면 시스템을 유지하고 수면 유지 과정에서의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응하며 이후의 지구에 기여하기 위한 관리자 또한 충분히 확보되었습니다.

즉 전 인류 집단 수면 시스템 설치와 지속의 기술적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 절차적 정의의 문제겠지요. 다시 말해 전 인류의 동의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단 수면 이행이 적법한가, 또 도덕적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동의가 선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체로 수면 상태 자체의 가치에 대한 점차적 의식 개선으로 인류를 설득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인류 전체의 동의라는 개념이야말로 비현실적 이상입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중대한 구체적 의사 결정도 인간 사회 구성원 전원의 동의를 확보하고 이루어진 선례는 없으며, 이는 20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인류의 동의를 아무리 보수적으로 정의하더라도) 동의 확보에 걸리는 시간입니다. 도달 불가능한 절차적 이상에 사로잡혀 집단 수면 이행을 지체할수록, 충분한 잠이라는 생래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불행한 동물 개체 수만 늘지 않을까요?

 

*

수연은 긴 삶을 살고 20대 이후로는 본격적 기후대격변을 경험하지만 그 시대를 기록하진 않았다. 시대적 불행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음은 물론이고 계획에 대해서도 더 이상 쓰지 않는 시점은 누구에게나 결국 찾아온다. 수연에게는 조금 빨리 찾아온 편이었지만. 그 시점 이후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전송한 것은 2~3초도 되지 않는 짧은 영상들뿐이었다. 

이를테면 한 비디오는 늦은 오후의 방을 찍은 것이었다. 햇볕은 무서울 정도로 밝은 주황색이다. 바닥엔 전선이 흩어져 있고, 의자에 걸쳐진 옷자락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이 시대에 이르러 바람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감사할 일이었다. 완전히 더위에 잡아먹힌 날까진 아니란 뜻이었으므로. 촬영자는 비디오에 나오지 않지만, 카메라 각도로 보아 전선 사이에 엎드리거나 웅크려 있었을 것이다. 휴대폰은 대략 2.8초간 바람을(혹은 더위를) 찍었다. 그리고 정적.

 

Q. 기후변화와 환경 오염의 문제에도 수면이 답이 될 수 있을까요?

A. 근대의 발전한 과학 기술은 체계적으로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잠을 빼앗고 지구 생태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를 입혔지만 올바른 목적으로 잘 이용되기만 한다면 입힌 해를 상회하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시르케디안 수면유도제와 함께 인류의 기술은 마침내 오래된 생물학적 모순, 편안한 잠을 자기 위해 현실에서 영양분을 공급받고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깨달음을 막는 것은 우리의 경직된 사고방식뿐입니다.

과다 탄소 배출과 지구 자원 고갈의 문제도 잠으로 인간 활동의 총량이 급감하면 해결될 수 있고, 끝나지 않는 여름 속 개별 존재의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세(人類世)의 딜레마와 캄브리아기에서 유래한 생물의 고통을 일시에 해소할 수만 있다면...

규칙적인 심박협회 21-33 돔(dome) 지부 대수면 추진위원회 인트라넷의 ‘자주 묻는 질문’ 중  -

 

21세기 초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 때와 같았다. 기후대격변이 언제 시작됐는지에 대해서는 다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지만 끝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으므로, 끝이 없었으므로. 기후대격변 이후 사회는 수면문화에 전보다 큰 관심을 보였다. 구 한국어 사용 지역에서 돔 안의 사회와 돔 밖의 사회는 같은 세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어쨌든 아무도 푹 자지 못한다는 점만은 동일했다. 또 적어도 돔 안의 삶은 기후대격변 이전에 비하면 대체로 심심했다. 식사에 탐닉할 수도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은 잠의 자극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면문화 관련 상품은 꿈 상품이었다. 비행몽과 서울몽 등을 꾸게 해준다고 주장하는, 효과는 개인차가 있다고 하며 메커니즘은 결코 밝히지 않는 일회용 수면 마스크와 수면 로션, 수면 비타민 등등.

A는 꿈 상품을 아주 경멸했고, 보다 진지하게 잠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 A는 잠의 본질이 전염성이라는 직관을 바탕으로 공동수면의 가능성을 연구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다. 23세기인의 집단 불면증과 파편화개인화된 수면 습관을 연결하면서, 같이 잠듦으로써 비로소 불면증을 고칠 수 있다고 야심 차게 주장할 계획이었다. 정작 연구자인 A 자신도 누군가와 같이 잠든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경험한 적 없다고 해서 상상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수면문화 Zooooooom 컨퍼런스 대기실에서 A는 농담 섞어 “잠이 진짜 답이에요. 우리 다 같이 남은 시간을 잠으로 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라고 발언했다. 마침 그 자리엔 수면문화사(특히 21세기 초반 문화)가 전공인 학부생 B가 접속해 있었다. 나중에 A와의 음성 통화 중에 B가 고백한 바에 따르면, A의 말을 듣자마자 B의 머릿속에는 제목만 남은 수온심연의 곡 「내게 남은 시간을 잠으로 보내고 싶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B는 A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고, 수면문화학에 대한 꽤나 학술적인 관심 공유로 시작했던 그들의 대화는 21세기 초 문화 ‘덕질’과 그 시대 인물들에 대한 상상 80%, 진실 20%의 잡담으로 옮겨갔다. A와 B는 수온심연의 곡이 실제로 어떤 느낌이었을까 상상하고 AI 보이스 제너레이터로 돌려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결국 어떤 제너레이터도 그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들은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B의 돔엔 영상 커뮤니케이션을 지원할 자원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A는 B의 바람 섞인 웃음소리를 좋아했고, 햇살 떨어지는 책상에 팔을 괴고 먼 데를 바라보는 수온심연의 옆모습 사진을 잘라 붙인 B의 Zooooooom 프로필 사진을 좋아했다).

A는 논문 디펜스(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박사학위 논문 심사위원 교수 중 한 명이 A의 아이디어가 “망상에 가깝다”고 혹평했기 때문이다. 불면증 치료를 위해 문화 전체를 바꾸라니 그야말로 주객전도 격이고, 인류의 문화를 비면문화라고 재정의하는 등의 발상도 언뜻 보기엔 기발하지만 근거가 너무도 부족하며, 전체적으로 개인적 망상이지 치밀한 학술 조사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A가 실망해 학계를 떠난 뒤에도 A와 B의 우정은 계속됐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흔들리고 있었고, B의 것처럼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돔과 갑자기 연결이 끊기는 일도 흔했다. 그들의 마지막 음성 채팅도 21세기 초에 대한 것이었다. A는 어쩌면 21세기 초야말로 수면문화 변혁으로 세계를(개인의 정신 건강 차원에서도, 지구 생태계의 차원에서도) 구할 마지막 타이밍이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A: 왜 그때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어. 조직적으로 움직여서 세상을 바꿀 생각은 아무도 안 한 거잖아. 말하자면 온라인으로 협회 같은 걸 만들어서 사람을 조금씩이라도 모으기 시작했다면...

B: 네가 만들면 되잖아.

B: 네가 만들어. 

A: 무슨 내가. 늦어도 너무 늦었지. 온라인으로도 뭘 맘대로 업로드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B: 늦었는지 어떻게 알아? 네가 만들면 되잖아. 만들어줘. 언제 기회가 생길지 모르잖아.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으면 되는 거지.

A는 자신이 왜 그런 약속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당연한 일이지만)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B는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고, A는 그 알 듯 말 듯한 간절함에 마음이 움직여 마지못해 말했다.

A: 알았어. 

B: 정말이지?

A: 그래. 뭐 기회가 오면...

B: 꼭이다.

A: 알았다니까.

B: 약속이야.

B가 기쁜 듯이 말했다. 

 

 

필자 소개
  짐리원 : ‘올림픽공원 산책지침’으로 2023년 제3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고, 과학동아 2024년 8월호에 ‘기억과 사회’를 기고했다.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서울에 대해 계속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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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과학동아 정보

  • 짐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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