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동아’라는 잡지를 아시나요? 혹시 과학동아를 잘못 이야기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때 실제로 발간된 잡지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서양 피아노 작품을 좋아했는데, 그 시절에는 요즘과 달리 전문 연주자들의 녹음, 영상, 라이브 공연 소식을 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음악동아라는 잡지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음악동아를 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동아 창간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중학교 2학년을 마쳐 가던 즈음으로 기억해요. 과학동아 기사들은 과학자 소개부터 진로 및 과학 특성화 교육, 과학 오개념 바로잡기, 해외 동향과 칼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의 ‘노른자’나 다름없었습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악기의 구조와 원리, 소리를 과학적으로도 깊이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어렴풋하게 생각하던 터라 과학동아가 더욱 반가웠습니다.
피아노를 좋아해서 연주자를 꿈꿨지만, 집에선 예고나 음대 진학을 워낙 완강히 반대하셨습니다. 아마도 이때 과학동아의 영향을 제법 받은 것 같아요. 과학 소식을 효과적이고 흥미롭게 전하는 일도 보람되리라고 여겨 ‘과학기자가 되면 어떨까, 과학기자도 엄연히 기자니까 신문방송학과에 가면 조금 더 유리할까’와 같은 고민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신문방송학보다는 물리학을 전공하는 게 과학기자가 되는 것은 물론 여러모로 더 유리하겠다는 다소 순진한 생각에 물리학과로 진학 방향을 잡았을 즈음, 물리 수업 시간에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왜 물체를 가장 멀리 날리려면 이를각도로 던져야 하는지, 이상적인 무마찰 포물선 운동의 조건을 유도한 과정이 어찌나 아름답게 느껴지던지. 좋아하던 음악 이상으로 충격적으로 감동한 순간이었습니다! 반면, 당시 대부분의 반 친구들은 당연히 45인데 뭐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반응이었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감격의 원천이 수학인지 물리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경계에서, 이론물리학을 공부하면 좋겠다는 결심이 싹텄습니다.
CERN에서 갈고 닦은 빅데이터 렌즈
물리학과에 진학하고는, 뜻밖에도 실험을 못해도 너무 못한다는 걸 자각했습다. 파울리 배타 원리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이론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가 실험실에서는 자꾸 어이없는 사고를 친다는 일화가 ‘파울리 효과’라는 풍자적 표현까지 만들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정말이지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결국 대학원으로는 아주 큰 물리학과를 두고 있는 동시에 아예 독립적으로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과를 둔 곳을 택했습니다.석사 과정을 마치고는 유사한 전공과 호기심을 버팀목 삼아 실험 징크스를 이겨보고자 했습니다.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 전자-양전자 충돌기(LEP Collider) 실험 ‘DELPHI(DEtector with Lepton, Photon and Hadron Identification)’ 공동연구단에 합류했습니다. LEP는 현재 CERN에서 쓰이는 거대강입자충돌기(LHC)의 이전 세대 가속기입니다.
둘레가 27km나 되는 가속기에 어지간한 집채보다도 큰 초대형 검출기들까지 필요한 실험이라니, 더러 거북하면서도 도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실험에 참여하면서 복잡한 대규모 데이터를 다루는 데 필요한 통계적, 시각적 방법과 알고리즘을 구현하고 적용하는 문화 속에서 거대과학 연구를 경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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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필자는 주로 교양과학이나 IT 관련 책을 번역한다. 필자가 번역한 책의 표지들.
과학계를 넘어 산업계에서도 인정받다
현대 과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대규모 데이터를 다뤄왔지만, 산업계에서는 이러한 분야가 비교적 뒤늦게 새로운 경쟁우위를 가진 분야로 인정됐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CERN에서 대규모 데이터를 다뤄본 경험을 바탕으로 집단 유전체학이나 금융공학 분야에서 연구개발 및 관리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특히 금융투자사에서 오랫동안 퀀트(수학, 통계학, 물리학 등의 과학적 방법을 사용해 투자 모형을 개발하거나, 금융 상품을 평가하며, 리스크를 전략적으로 측정관리하는 역할에 따라 팀별로 배치되는 전문가)로 일했죠. 10대, 20대의 제게 누군가 ‘30대에는 금융투자사에서 일할 것’이라고 말했더라면,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웃어넘겼을 겁니다.
기초 과학 전공자가 어떻게 하면 그런 분야로 진출할 수 있냐고 의아한 투로 주변에서 물으실 때마다 저야말로 의아해집니다. 기초 과학자들은 연역적이거나 귀납적인 비판적 사고 체계를 바탕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하기 좋게 재구성하는 훈련을 상대적으로 더 철저히 받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귀하고 드문 자질입니다.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는 현대 사회 어느 분야에서나 유리하게 작용하죠.
앞으로의 과학, 산업, 서비스 분야에는 기존 이론이나 공식을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질 것입니다. 따라서, 모의 실험이나 가상 실험, 실제 데이터를 통해 가설을 세우고 근거를 찾아서 자연과 사회 현상 너머의 본질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낯선 개념을 체계화하거나 새로운 원리와 규칙성을 발견하는 능력이 점점 더 중요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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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도 팬덤이 생기는 그날까지
저는 현재 포스코 그룹에 속한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에서 고전 및 양자 기계학습 응용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주요 연구 주제로, 산업 현장의 리스크안전 관리 강화, 소재 설계성능 최적화 등의 목적으로 다양한 데이터와 인공지능(AI) 모형을 연구합니다. 아울러 장기 과제로 POSTECH과 공동으로 양자 컴퓨팅 연구도 조금씩 수행 중입니다. 이 역시도 지난 경험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처음부터 계획한 건 아니었습니다.
과학에서도 최적화 문제를 풀 때 특수한 조건이 없는 한 부분의 최적화 결과를 단순히 합친다고 해서 전체 최적화가 이뤄지지 않는데요. 제 인생도 지그재그 모양으로 방황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그 모든 과정이 총체적인 최선을 찾아가는 여정의 일부였다고 느낍니다. 마치 직소 퍼즐을 맞출 때처럼 전체 그림은 완성되지만 순서대로 딱딱 맞춰지지는 않는 거죠.
제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미래는,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데이터 연구자로 일하게 됐느냐는 질문을 더 이상 받지 않는 날입니다. 전공과 직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다양한 데이터를 쉽게 다룰 수 있는 디지털 환경이 마련되고, 그로 인해 사회가 더욱 행복한 가능성으로 가득 찰 수 있게 기여하고 싶습니다.
데이터는 수집 단계부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처리하는 과정 또한 복잡하고 지루할 수 있습니다. 무척 깐깐히 챙기지 않으면 이후 이도저도 안 되기 일쑤일 만큼 중요한 초기 과정입니다. 그래서 SF 영화에서 데이터 형태가 맞지 않을 법한데도 연결하거나 꽂기만 하면 자동으로 인식하고 작동하는 기계나 AI가 나오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혹시 머지않아 데이터를 정말 영화처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곧바로 즐길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과학 분야에서도 K팝처럼 이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팬덤이 생기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