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비에 대응하기 위한 큰 배수시설. 당연한 전략이다. 한국과 일본 외에도 멕시코나 말레이시아 등 세계 각국이 채택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배수시설 없이 극한호우에 대응하겠다는 나라가 있다. 매년 도시 면적의 1%씩을 배수시설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겠다는 독일 베를린을 찾았다. 그들이 그레이 인프라 대신 찾은 해법은 그린 인프라(도심 내 녹지요소)다. 베를린의 ‘꽃밭’은 극한호우란 거대한 재앙과 싸우는 든든한 무기가 될 수 있을까.
기후변화는 세계 곳곳에 전에 없던 큰 비를 불러왔다. 2023년 크리스마스 시즌, 독일에는 함박눈 대신 폭우가 쏟아졌다. 독일 북서부의 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등 6개 주에 홍수 경보가 내렸으며,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활주로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낯선 큰비’의 원인으로 기후변화를 지목한다. 기후변화에 의해 겨울 기온이 온화해지면서 이상기후가 관측됐다는 것이다.
기후재난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가 감당할 짐이 된다. 실제로 독일 국립과학아카데미는 기후변화에 따라 홍수나 폭염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독일에선 2050년까지 9000억 유로(약 1328조 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2023년 3월 발표했다. 이는 독일의 2년 치 정부 예산과 맞먹는 규모다.
물론 대응책은 세워뒀다. 그런데 그 방식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낯선 방식이다. 한국은 큰비에 대응하기 위해 수도 지하에 큰 배수시설을 짓고 있다. 이에 따라 서울엔 빗물저류배수시설(대심도 빗물터널)이 6개 건설될 계획이다. 그런데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정반대 전략을 선택했다. 이들의 목표는 큰비에 대응하기 위해 지하 배수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베를린은 2018년부터 합류식 하수도*로 빗물을 직접 배출하는 건물과 토지의 면적을 매년 1%씩 줄이겠다고 나섰다. 이에 따라 현재 베를린에 새롭게 건설되는 건축물은 빗물을 지하 배수관으로 배출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처리해야 한다. 이를 ‘분산형 하수 관리 체계’라고 부른다. 앞으로 비가 많이 올 거라는데, 그 많은 비를 다 어디로 보내겠다는 말일까. 의심과 의문을 안고 4월, 독일 베를린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녹색 지붕으로 빗물 담는 ‘스펀지 시티’
4월 25일 베를린 동부의 한산한 마을 루멜스부르크(62쪽 사진)를 찾았다. 루멜스부르크에 1998년경 마련된 주택단지는 분산형 하수 관리 체계를 적용한 선구자적 건축물로 꼽힌다. 이곳에서 해럴드 좀머 박사를 만나 빗물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함께 살펴봤다. 좀머 박사는 독일의 건축설계 업체 ‘Sieker(지커)’에서 루멜스부르크 주택단지의 빗물 관리 체계 설계를 담당한 전문가다.
“여기 정원이 제가 루멜스부르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입니다. 양쪽에 보이는 6층짜리 건물 위에 옥상 녹화 시설이 있죠. 비가 지붕에 내리면 우선 옥상 녹화 시설에 1차적으로 빗물이 흡수됩니다. 미처 흡수되지 못한 비는 건물 내부의 배수관을 따라 이곳 정원으로 내려와 땅속으로 흡수되죠. 정원 아래엔 지하 주차장이 있습니다. 땅속으로 흡수된 빗물이 주차장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벽면을 잘 막아 뒀어요.”
좀머 박사는 루멜스부르크 주택단지가 시간당 70mm의 강수량(독일 기준 100년 빈도 강우)까지도 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일반적으로 시간당 30mm의 비를 폭우라고 부르며, 시간당 50mm의 비가 내리면 시야 확보가 어렵다. 만약 한국에 시간당 70mm의 비가 3시간 연속으로 내린다면 극한호우 긴급재난문자가 발송된다.
시간당 70mm라니. 예상보다 더 대단한 성능이었다. 깜짝 놀란 기자에게 좀머 박사는 “루멜스부르크에 주택단지가 마련된 후로 이곳에서 침수 피해가 발생한 경우를 본 적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유 있는 자신감이었다.
분산형 하수 관리 체계는 빗물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빗물을 관리하는 체계로, 한국이나 일본 등의 ‘중앙집중형 하수 관리 체계’와 반대 개념이다. 좀머 박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건축 당시 빗물이 흘러갈 하수도를 설치하긴 했으나, 한 번도 그 하수도가 사용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현재 베를린은 이와 같은 분산형 하수 관리 체계를 시 전체에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7년, 베를린 시의원들은 분산형 하수 관리 체계로 빗물 관리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 합의했다. 2018년에는 베를린시에 분산형 하수 관리 체계를 효과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베를린 빗물청이라는 공공기관도 설립됐다. 달라 니켈 베를린 빗물청장은 4월 4일 화상인터뷰에서 “중앙집중식 하수 관리 체계는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니켈 청장이 설명한 베를린의 ‘한계’는 베를린이 오래된, 그러나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발생했다. 기존 베를린이 사용하던 합류식 하수도는 1873년 처음 건설됐다. 그 후 150여 년의 세월 동안 베를린은 세계사의 흐름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으며 확장했다. 니켈 청장은 “베를린이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배수 시스템에 한계가 생겼다”고 말했다. 도시는 계속해서 성장하는데, 배수관의 용량도 함께 무한정 늘리기엔 돈과 공간 등 현실적 한계가 많았다. 결국 하수도의 부족한 용량 탓에 베를린에서는 비가 올 때마다 하수도가 역류하는 피해가 잦았다.
게다가 베를린은 기후변화로 심각한 가뭄과 홍수 피해 문제를 함께 맞닥뜨리고 있다. 빗물을 그대로 강으로 흘려보내기엔 수자원이 너무 귀중하다. 빗물을 흘려보내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침수 피해를 줄여야 하는 까다로운 과제를 받은 셈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현재 베를린은 도시를 일종의 거대한 녹색 스펀지로 만들고 있다. 이른바 ‘스펀지 시티’ 계획이다.
스펀지 시티 계획의 핵심 인프라는 그린 인프라다. 원래 내리는 비의 일부는 땅으로 스며드는 것이 자연스럽다. 도시에선 그러나 건물이나 도로 등 불투수면적(물이 통과하지 못하는 땅)이 많아 이런 자연스러운 물의 순환이 이뤄지지 못한다. 그린 인프라는 옥상 녹화나 식생 수로처럼 물이 침투하고, 고이고, 증발할 수 있는 시설을 말한다. 그린 인프라를 활용해 비가 그 지역에 그대로 스며들거나 저장, 증발할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게 베를린의 분산형 하수 관리 체계의 골자다.
“2018년부터 베를린 전역에 빗물을 흡수할 수 있는 옥상 녹화 시설을 1000개 만들자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입니다. 이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건물 소유주가 자신의 땅에 그린 인프라를 보다 쉽게 설치할 수 있게 정보와 보조금을 제공하는 등 도시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방재부터 정화까지, 다재다능한 그린 인프라
그린 인프라가 재미있는 점은 빗물 배수라는 한 가지 목표를 확실히 달성하는 그레이 인프라와 다르게, 다양한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도록 설계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루멜스부르크 주택단지에서 그린 인프라는 홍수 피해를 막는 동시에, 땅속에 흡수된 빗물이 인근의 슈프레강으로 흘러가기 전에 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좀머 박사는 루멜스부르크 주택단지를 “일종의 거대한 필터”라고 설명했다.
루멜스부르크는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독에 속했던 마을이다. 동독이었던 시절, 루멜스부르크 일대는 공장이 많던 산업단지였다. 통일 이후 1990년대 들어서 이곳에 주택단지를 새로 지으려고 보니, 토양과 그 위를 흐르는 소하천들의 오염이 심각했다.
좀머 박사는 “루멜스부르크에 주택단지를 지을 때 베를린 수자원공사는 슈프레강으로 더 이상 오염된 물을 내보내지 말고, 이곳에서 빗물을 처리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면서 “홍수 시 오염된 빗물이 땅속에 스며들며 정화된 다음 지하수로 합류해 강물로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한편, 2020년 초 베를린 동남부 아들러스호프 지역에 건설된 주택단지 퓨처리빙(Future Living)에는 빗물을 배수관으로 내보내지 않으면서, 주민들이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린 인프라가 마련돼 있다. 퓨처리빙에 설치된 크고 작은 식생체류지는 평상시에는 그저 잔디 덮인 옴폭하고 넓은 정원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가 올 때면 7600m2 넓이의 전체 주택단지에 내린 비가 모두 이 식생체류지에 고인다.
4월 26일 오전, 퓨처리빙에서 만난 관계자는 “평상시엔 어린이들이 식생체류지에서 뛰어논다”면서 “그러나 비가 오면 이곳에 빗물이 50cm까지도 고였다가 수일 내에 땅으로 흡수된다”고 설명했다. 퓨처리빙도 루멜스부르크 주택단지처럼 독일 기준 100년 빈도 강우인 시간당 70mm의 비를 처리하도록 설계됐다.
빗물도 모으면 태산이 될까
베를린의 그린 인프라를 취재하는 내내 ‘한국에서도 이게 될까?’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세계 각국에서 기후 위기, 그리고 극한호우에 대한 해법을 찾는 이들이 베를린을 찾아 이들의 그린 인프라를 살펴본다. 4월 26일 오후, 베를린 남부의 복합문화공간 ‘우파 파브릭’에서 만난 이들도 그랬다. 이날 우파 파브릭에 모인 이들의 국적은 호주, 멕시코 등 다양했다.
우파 파브릭은 마르코 슈미트 베를린 공대 건축연구소 교수의 ‘학교 밖 실험실’이다. 우파 파브릭에서 연극 공연을 보는 관람객이나,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손님 모두에게 이곳의 화장실은 열려 있다. 그러나 이 화장실이 사실 우파 파브릭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파 파브릭의 화장실은 슈미트 교수가 빗물을 재사용하기 위해 설계해 둔 그린 인프라의 연장선이다. 우파 파브릭의 지붕에 비가 내리면 이 비는 우수관을 따라 흘러 빗물 저장고로 향한다. 빗물 저장고에 모인 물은 비오톱(도심에 인공적으로 마련한 생물 서식 공간)에서 정화돼, 화장실용수로 활용된다. 슈미트 교수는 우파 파브릭에서 얻은 데이터를 토대로 베를린 중심의 포츠담 광장에도 빗물을 재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했다.
포츠담 광장은 쉽게 말해 베를린의 여의도다. 소니, 다임러 크라이슬러 본사를 포함해 480여 개 기업의 사무실이 여기 둥지를 틀었다. 전체 면적 2만 6444m2인 포츠담 광장에 속한 19개 건물, 10개 거리, 2개의 지상 주차장에 내리는 비는 모두 포츠담 광장을 떠나지 않는다. 우파 파브릭처럼 포츠담 광장 또한 빗물을 모아 화장실용수나 녹지에 물을 주는 데 쓴다.
슈미트 교수와 함께 포츠담 광장을 설계한 전문가, 허버트 드라이자이틀 드라이자이틀 컨설팅 대표는 “포츠담 광장의 사례를 보고 싱가포르에서도 같은 시설을 지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는 몬순 시기에 내리는 강한 비와, 건기의 가뭄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후 회복탄력성이 강한 도시가 필요했죠. 현재 싱가포르는 몬순 시기 내리는 비를 바다로 빠르게 배출할 때 쓰던 하수관을 18개의 저장고로 연결해 뒀습니다. 이 저장고에 모인 빗물은 도시 수변시설에 물을 대는 데 사용됩니다.”
멕시코에서 그린 인프라를 연구하는 아르투로 글리아슨 박사는 “현재 멕시코의 주요 대선 후보 세 명 중 두 명이 그린 인프라를 적용한 빗물 관리 체계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면서 “물 부족이 큰 문제로 떠오르는 라틴 아메리카에 그린 인프라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빗물을 모으고 사용하는 그린 인프라 방식이 서서히 세계에 퍼지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의 기후는 분명 서울과 다르다. ‘100년 빈도의 비’라는 표현만 봐도 그렇다.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비가 베를린 기준으로는 시간당 70mm지만 한국에선 시간당 100mm다. 그리고 한국은 연간 강수량의 55% 정도가 여름에 집중된다. 독일은 그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완만한 연간 강수량 그래프를 그린다.
그러나 베를린이 시도하고 있는 그린 인프라란 접근법은 홍수와 가뭄을 동시에 겪는 한국에 좋은 참고가 된다. 슈미트 교수는 “결국 그린 인프라는 자연이 본래 갖고 있던 물순환 패턴을 복원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드라이자이틀 대표는 “특히나 인구가 도시에 집중된 아시아의 경우, 홍수나 가뭄, 폭염 등 기후변화로 더 극심해지는 재난을 완충할 그린 인프라의 필요성이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츠담 광장의 그린 인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