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과학자가 각자 그리는 동그라미가 아주 조금 겹쳐 있다. 벤 다이어그램 속 이 부분집합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이공계 박사학위를 취득한 ‘의사과학자’들의 자리다. 의사과학자들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세 명의 의사과학자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봤다.
화학 영재가 의대에 진학한 이유
1999년과 2000년, 연이어 국제화학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땄던 주영석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 겸 지놈인사이트 공동창업자는 앞으로 의과학 분야가 유망할 것이란 얘기를 듣고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주 교수는 “처음부터 의대에서 생화학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6년간의 의대 교육 과정은 주 교수에게 고민의 시간이었다. 의대는 1차 목적이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 의료인 양성이기에, 교육 과정의 초점이 임상 의료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임상 수련을 다 받은 뒤에 연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는 주 교수는 졸업 후 기초의학 연구를 시작했다. 기초의학이란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등 의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이다. 그는 생화학교실에서 유전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유전체 빅데이터를 정밀 해석하는 생명정보학 기술을 확립했다.
주 교수는 2020년, 이정석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와 함께 지놈인사이트를 공동 창업해 세계 최초로 전장유전체분석을 통해 암을 정밀하게 진단하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한 사람의 유전체는 백과사전 1000권 분량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유전체 검사 비용은 20년 전과 비교해 약 100만분의 1 수준이다. 환자의 유전체를 통째로 들여다보는 비용이 크게 낮아진 것이다. 주 교수는 “연구실에서 사용하던 암 환자 전장유전체를 보는 기술을 임상 현장, 즉 환자 진료에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놈인사이트가 2023년 5월 발표한 ‘캔서 비전’이 그 결과다.
의사과학자는 공격수와 수비수를 이어주는 미드필더
과학자와 의사과학자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주 교수는 “관점의 차이가 가장 크다”고 대답했다. “예를 들어 미생물학자는 미생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의사과학자는 미생물이 사람에게 들어갔을 때 어떤 영향이 있는지부터 신경을 씁니다.” 미생물학자가 연구의 초점을 미생물의 특성에 맞춘다면, 의사과학자는 좀 더 사람에게 맞춘다는 뜻이다. 의사과학자는 미생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감염’으로 바라본다. 이 때문에 의사과학자는 연구 결과와 임상 현장을 동시에 고민한다.
의사도 연구를 한다.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며 얻은 지식과 데이터로 의학 연구를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주 교수도 “연구와 임상이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훌륭한 유전체 연구를 위해서는 뛰어난 생명정보학 기술뿐만 아니라 잘 수집된 임상검체와 환자 정보도 함께 필요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임상 현장에서 활동하는 의사에 비해 기술 개발에 시간을 쏟는 의사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의사과학자는 미드필더입니다.” 주 교수는 의사과학자가 필요한 이유를 축구에 비유해 설명했다. 축구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공격력이 극대화된 공격수와 수비에 방점이 찍힌 수비수뿐만 아니라, 그 둘을 잇는 미드필더의 역할도 중요하다. 의사과학자는 과학기술 연구와 임상 현장을 잇는 미드필더 역할을 한다. 의사이자 과학자인 의사과학자는 그래서 임상 현장에도, 연구실에도,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연구자였기에 알게 된 의료기술의 가치
문여정 IMM 전무는 한국 제1호 의사과학자 출신 벤처캐피털리스트다. 그는 2011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산부인과 전공의 과정을 마친 뒤 연세대 약리학 교실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연세대 의대에서 시작한 의사과학자 양성 과정이 2년 차에 접어든 때였다. 펠로우 시절 당시 산부인과 전공의 중 유일하게 실험 기반 석사 논문을 썼던 문 전무가 박사학위 과정을 시작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논문이 발표됐을 때를 기억해요.” 문 전무가 박사과정 중이던 2012년 8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한 논문이 발표됐다. 제한효소 크리스퍼가 바이러스의 DNA를 절단하는 원리를 밝혀낸 뒤, 이를 원하는 DNA 절단에 활용할 수 있음을 실험으로 확인해 유전자 가위의 탄생을 알린 논문이었다.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논문을 읽고, 이 기술로 유전병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전율이 느껴졌다. “만약 제가 당시 연구자가 아녔다면, 바쁘게 진료를 보느라 그 논문을 읽을 시간도 없었겠죠. 읽을 기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감동이 덜 했을 거고요.”
놀라움과 함께 새로운 길도 열렸다. “임상 현장에 꼭 필요한 새로운 의료기술이 윤리적인 문제 없이 빠르고 신속하게 개발되고 또 적용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문 전무는 2016년 잠재력 있는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됐다. 좋은 의료 연구에 필요한 돈이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길로 나아간 것이다.
의사과학자였기에 알 수 있는 투자의 가치
임상 현장 경험은 투자의 성과로 이어졌다. 문 전무가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됐던 2016년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의료기기 개발이 붐이었다. 여러 벤처기업에서 X선 촬영, 자기공명영상(MRI), 컴퓨터단층촬영(CT) 영상을 판독하는 AI 플랫폼을 개발했다. 문 전무는 “사람들은 차이를 몰랐지만,X선 촬영 영상 판독 플랫폼에만 눈이 갔다”고 말했다. 비용이 의사의 판독비보다 저렴한가, 다량의 영상을 판독할 수 있는가. AI 영상 판독 플랫폼이 임상 현장에서 쓰이기 위해선 이 둘 중 한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문 전무는 임상 현장에서 MRI, CT보다 X선 촬영이 훨씬 잦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 한국에서 의사 출신으로 벤처캐피털에서 일하는 사람은 총 15명. 그중 의사과학자 출신은 문 전무를 포함해 단 2명밖에 없다. 의사 출신 투자자와 의사과학자 출신 투자자에게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문 전무는 “실험 데이터를 볼 줄 아는 능력이 가장 큰 차이”라고 말했다. 문 전무는 신약 개발을 예로 들었다. 초기 단계의 신약 개발 기술은 박사 논문과 비슷하다. 효과를 직접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으니, 여러 단계의 실험 결과가 유기적으로 이어진다면 주장에 근거가 있다고 판단한다. 박사학위 과정에서 다양한 연구를 해보고, 실험을 바탕으로 논문을 써본 적이 있었기에, 문 전무는 과거 한 스타트업에서 투자 제안서에 고의로 누락한 실험이 있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연구자로 보낸 시간 동안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만들어진 것이다.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출신 1호 스타트업
2009년, 당시 서울아산병원 내과 레지던트 4년 차였던 김이랑 온코크로스 대표는 동기들과 다른 경험을 했다. 대부분의 레지던트는 임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석사 논문을 쓴다. 그런데 당시 김 대표의 지도교수가 “직접 실험을 해보라”고 권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의대에 진학했던 김 대표가 실험과 연구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계기였다. 관심이 결심으로 돌아선 것은 같은 해,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한 달간 연수를 하면서였다. 형광 이미지 처리 기술에 관심이 있던 차에, 스탠퍼드대 한 연구실에서 생물 발광 실험을 하는 것을 봤다. 김 대표는 그다음 해인 2010년, 내과 전문의를 취득한 뒤 KAIST 의과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창업이 김 대표에게 또 하나의 선택지가 된 것은 그가 박사과정 중에 지도교수를 따라 미국 하버드대 부속 병원인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약 4개월간 공부하면서였다. 그곳은 정말 많은 의사가 연구하는 현장이었고, 그중에는 연구 결과로 창업하려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을 직접 만나보니 스스로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졌어요. 언젠가는 창업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다시 임상 현장으로 돌아갔던 김 대표는 연구한 것을 암 치료에 활용하고자 혈액종양내과로 펠로우를 시작해, 분과전문의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2015년, 신약 개발 기업 온코크로스를 설립했다. 온코크로스는 KAIST 의과학대학원 졸업생의 1호 스타트업이다.
오전에는 의사, 오후에는 과학자가 만드는 신약
온코크로스에서 개발하고 있는 신약은 김 대표가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 및 치료하며 필요하다 판단한 것들이다. 2023년 초 호주에서 임상 1상 실험이 완료된 근감소증 치료제가 대표적인 예다. 그동안은 사람이 아프면 근육이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문제라 인지하지 않았다. 온코크로스에서는 이를 개선하는 약물을 만들고 있다. 전이 억제제도 있다. 암이 처음 형성된 부위에서 벗어나 혈액이나 림프계를 통해 다른 부위로 이동해 새로운 종양을 형성하는 것을 전이라고 한다. 암세포를 죽이는 항암제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 등에서 종양의 성장을 막아 암의 전이를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환자의 상태 악화를 막을 수 있다. 최근 ‘캔서 테이밍(암 길들이기)’으로 주목받고 있는 연구 분야다. 온코크로스는 현재 서울과 부산 등 3개 대학병원에서 임상 환자들과 전이 억제제의 효능을 추적 관찰 중이다.
김 대표는 2015년 이후 임상 의사와 온코크로스 대표직을 5년 넘게 병행해 왔지만, 2021년 2월 병원을 그만뒀다. 몸이 힘든 건 문제가 아니었다. 오전에는 의사로 환자들을 만나고, 오후에는 회사를 운영하고 신약을 개발하는 기업가로 살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지만, 회사가 커지면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졌다. 하지만 김 대표는 언젠가 회사와 연계해 임상시험에 특화된 병원을 운영하는 미래를 구상한다. 의료 현장과 산업계가 깊이 연결돼 있을 때 어떤 시너지가 있는지를 아는 자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