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하면 쉽게 접할수 있는 퍼스널컴퓨터 (PC)를 머리에 떠올리지만 PC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10년전만 하더라도 컴퓨터는 큰 전산실에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몇명의 전문가와 보조기계까지 딸린 거대한 기계장치였다. 그 성응은 비록 현재의 PC수준이거나 그 이하에 머물렀지만.
지금도 회사마다 이런 전산실이 있다. 그러나 그속에 있는 컴퓨터는 10년전보다 수백배쯤 속도가 빠르고 기능도 향상된 것이다. 이 컴퓨터를 PC와 구별해서 중·대형컴퓨터라 부르는데 PC가 출현하기 전에는 그냥 '컴퓨터'라 불렀었다.
유감스럽게도 중형 이상의 컴퓨터는 국산제품이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핵심부품이나 기술을 수입해 껍데기나 주변장치를 씌워서 국산상표를 붙인 것은 있지만 순수국산기술은 아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 분야에는 IBM 후지쯔 DEC HP 등 외국상품들이 범람하고 일년에 수백억씩 외화를 허비하고 있다.
국산 중형컴퓨터개발은 87년 '행정전산망용 주전산기'를 국내기술로 개발하기로 하면서 시작됐다. 이 프로젝트의 총괄책임을 맡고있는 전자통신연구소 오길록 박사(44)를 만나 추진현황을 들어 보았다.
슈퍼미니급
먼저 PC분야의 국내기술은 일정 궤도에 올랐다고 전제하고 중형컴퓨터 기술수준을 묻는 기자에게 대뜸 반박한다.
"국내에 PC 설계기술이 어디있읍니까? 전부 IBM PC의 복제기술만 배워왔지 자체 설계기술은 전무한 형편입니다. 다시말하면 국내 컴퓨터기술은 복제기술 시스팀운영기술뿐이지요"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는 중형컴퓨터는 어떤 기종입니까.
"87년 당시 행정망사업은 급하고 중형컴퓨터는 반드시 국산화 해야하고 해서 개발작업을 3단계로 나누었습니다.
당장 필요한 컴퓨터는 외국에서 도입하되 가능한한 국내실정에 맞게 개량하고 반드시 도입선으로부터 모든 원천기술을 제공받기로 했습니다. 이에따라 미국 '톨러런트'사의 '이터니티' 기종이 선정돼 현재 일부 행정망사업에 운영되고 있습니다.
현재 개발중인 목표기종(일명 타이거컴퓨터)은 순수국산기술로 91년까지 개발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있는데 슈퍼미니급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95년까지 개발할 '첨단기종'은 아직 계획만있지 착수도 못한 단계입니다."
슈퍼미니급은 50~1백명이 동시에 사용하며 가격은 20~50만 달러정도의 중형컴퓨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중형컴퓨터는 마이크로 미니 슈퍼미니 미니슈퍼급 등으로 세분되는데 가격은 1만~1백만달러까지 다양하다.
―목표기종의 성능과 특징은 무엇입니까.
"도입기종(톨러런트)은 마이크로급에 해당하는데 분산처리가 특징으로 여러 대를 모아서 실제 미니급까지 성능을 낼 수 있어요. 이에비해 목표기종은 1대에 CPU (중앙처리장치)가 20대나 내장되어 VAX11/780의 1백배나 빠른 처리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단말기는 최대 2백56대까지 가능합니다."
주전산기개발 프로젝트는 전자통신연구소를 비롯, 금성사 대우통신 삼성전자 현대전자 등 4개업체가 공동으로 참여해 오는 91년까지 4년간 3백35억원이 투입되는 국내 최대의 컴퓨터관련 연구작업이다.
―현재 개발작업은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1차년도에는 시스팀 단위의 설계와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기법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습니다. 2차년도가 끝나는 오는 6월까지 유닛(unit)설계를 마칠 예정입니다. 다시말해서 목표기종에 대한 모든 설계작업이 완료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설계에 이처럼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이유에 대해 오박사는 설계단계에서 모든 변수를 고려해서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는 개발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설계시에 제품의 규격과 사용설명서까지 만들어 놓고 제작에 들어간다는 것.
환골탈태의 과정
―현재 개발중인 중형컴퓨터는 어느 정도까지 국산화가 가능합니까.
"설계기술은 순수국내기술만으로 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즉 하드웨어는 반도체분야에 속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제외하고는 1백%국산화가 가능합니다. 소프트웨어 중에서 운영체제(OS)는 유닉스를 그대로 씁니다. 단지 20대의 CPU를 한꺼번에 붙이기 때문에 다중처리(Multi-Processing) 작업에 필요한 기능을 첨가할 겁니다. 데이타베이스관리시스팀(DBMS)은 개발중이고 프로그램언어나 통신소프트웨어는 기존 것을 이용할 계획입니다."
행정망용으로 도입한 톨러런트 기종은 기종선정과정에서부터 잡음이 많았다. 톨러런트사가 벤처기업이어서 충분한 기술력을 신뢰할 수 없다느니, 실제로 국민연금관리에 이용해 본 결과 고장이 잇따라 문제가 발생했다느니 등이다.
―톨러런트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현재 개발중인 중형컴퓨터는 톨러런트와는 완전히 별개의 것입니다. 톨러런트의 경우 분산처리업무에 적합하지, 엄청난 데이타가 이용되는 연금관리에는 적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 기종 자체가 개발된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자체가 불안정하다는 점도 인정해야합니다."
이와관련 기자가 만난 기종선정작업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톨러런트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원천기술을 제공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중형컴퓨터개발작업에는 현재 전자통신연구소에서 1백50명, 4개 기업에서 1백명이 동원되어 2백50명의 연구인력이 매달리고 있다. 이중 박사급의 고급인력만도 20여명에 이른다.
―연구인력의 수준에 대해서는.
"연구소 기존 인력 50명에 대졸신입사원을 1백명 뽑고, 기업체에서 1백명을 차출해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신입사원은 학교에서 컴퓨터언어를 배운 것이 고작이고 기업체 출신들은 복제기술이나 컴퓨터 운용경험밖에 없어서 컴퓨터개발작업은 바로 교육과 훈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진정한 엔지니어로 환골탈태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일 것입니다."
오박사는 83년 8비트 교육용 PC개발을 맡은 것을 필두로 삼성전자가 현재 상품화하고 있는 마이크로급 SSM16, SSM32기종의 국산화도 주도했다.
―컴퓨터개발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독식하고 있다는 평도 있는데…
"실제 개발해서 제대로 상품화가 된 것은 우리 연구실 밖에 없잖아요. 컴퓨터라면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큰일 났습니다."
정작 오박사의 전공은 천문기상학. 대학시절 '포트란'언어를 우연히 배웠다가 졸업후 과학기술연구소(현 과학기술원)에 취직하면서 컴퓨터와 인연을 맺어 20년동안 한길을 걸어왔다.
성능에 있어서 절대 외국제품에 뒤지지 않는다는 목표기종이 개발되면 외제 컴퓨터의 전시장이 되고 있는 국내시장에 한줄기 신선한 충격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