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노벨 위원회는 한국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노벨 생리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을 과학기술 수준이 높은 국가에게 수여되는 일종의 인증서로 여긴다. 그래서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10월 초가 되면 “노벨상을 받으려면 과학기술 연구에 더 많은 지원을 했어야 했는데, 한국은 아직 멀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걸 수십 년간 반복했으니 지원이 중요하다는 점은 이제 잘 안다. 다음은 어떤 연구에 어떻게 지원할지를 논할 차례다. 2023년 우리는 수십 년 뒤 노벨상을 받을 과학자를 알아볼 수 있을까.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순간, 수상자들은 두 통의 전화를 받는다. 먼저 노벨 위원회의 전화가 울린다. 수상자들에게 수상 소식을 알리는 전화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두 번째 전화는 그 직후에 걸려 온다. 수상 소감을 묻기 위해 노벨 재단에서 거는 전화다. 이 ‘두 번째 전화’를 거는 역할은 2006년부터 줄곧 한 사람이 맡았다. 아담 스미스 노벨 프라이즈 아웃리치 최고과학수석(CSO)이 그 주인공이다. 노벨상 발표를 일주일여 앞둔 9월 25일, 스미스 CSO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노벨 프라이즈 아웃리치는 노벨상의 가치와 노벨상 수상자들의 성과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노벨 재단 산하기관이다. 스미스 CSO는 이곳에서 노벨상을 통해 전 세계 차세대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를 기획, 진행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거는 두 번째 전화에 대해 “(노벨상 수상자들이)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인터뷰를 진행하니 대부분 무척 놀란 상태”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거창한 목표는 오히려 위험하다
스미스 CSO보다 더 많이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그에게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기질을 물었다.
“수상자들은 성격적인 측면에서 일반인과 굉장히 다릅니다. 그들은 각자 품고 있는 질문에 수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아주 강하게 집중해 왔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수상자들은 수십 년간 자신의 질문에 몰두하는 삶을 산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질문’은 평생 풀어가야 할 거대한 목표 하나를 뜻하는 게 아니다. 스미스 CSO는 201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윌리엄 케일린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사례를 예로 들었다.
케일린 교수의 원래 연구 분야는 유전질환의 일종인 폰히펠-린다우 증후군(VHL)이었다. 그는 VHL을 유발하는 유전자인 VHL 유전자에 대해 연구하다 이 유전자가 암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후속 연구를 통해 케일린 교수는 VHL 유전자로 인해 만들어지는 VHL 단백질이 세포가 산소의 농도를 인식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발견도 해냈다. 유전질환 연구부터 세포의 산소 농도 인식 연구까지 케일린 교수의 연구는 질문에서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는 30여 년간 암 표적 치료와 관련된 연구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30년이라는 세월을 보고 수상자가 그 동안 한 가지 질문을 푸는 데 집중했으리라 생각하죠. 하지만 수상자들은 커리어를 시작했을 때부터 노벨상을 받기까지 여러 개의 연결된 질문들을 풀어갔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시점에 그들의 연구를 조명하니 이 질문들에 거대한 하나의 목표가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죠.”
첫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기다리는 한국에게 스미스 CSO의 말은 중요한 실마리다. 노벨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인류에게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된다. 노벨상을 받은 업적이 실은 여러 개의 연결된 질문들로 이뤄져 있다는 말은 인류에게 공헌할 연구의 시작이 생각보다 그리 거창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수상자들은 오히려 거창한 목표가 있는 연구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스미스 CSO는 전했다. 목표가 있는 연구는 그 끝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어떤 질문이 미래에 비옥한 새로운 연구 분야를 만들어 줄지 고르는 능력”이라며 “과학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질문에 도전할 수 있도록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너무 붐비지 않는 연구 분야를 골라야 한다는 조언을 듣습니다. 그걸 고르는 건 어려운 일이죠. 우선 내가 뭔가 해볼 수 있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길 권합니다. 충분히 도전적인 분야로요. 너무 멀리 나가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작은 도전의 연속이 연구자들에게 큰 성과를 가져다줄 겁니다.”
도전의 연속이었던 2023 노벨상
2023년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연구는 도전적인 질문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현재의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이 연구를 시작했을 때 그 연구로 노벨상을 받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으리라.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했으니 그 시작이 미미한 것은 당연하다.
mRNA 백신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커리코 커털린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의 별명은 과학의 이단아(매버릭maverick)다. 학부생 시절인 1976년 mRNA에 매료된 후로, 주목받지 못한 분야였던 mRNA 연구에 수십 년간 몰두해 왔다. 그러던 1997년, 같은 대학의 드루 와이스먼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mRNA로 뭐든 만들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두 사람이 개발한 mRNA 백신의 시작이었다. 이어 와이스먼 교수가 “나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고 커리코 교수가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답하면서 둘의 공동연구가 시작됐다.
그 뒤로 연구는 순탄치 못했다. mRNA로 HIV의 핵심 단백질을 만들 수는 있었다. 하지만 mRNA를 생명체에 집어넣었을 때 원하는 대로 단백질이 생성되지 않았다. 커리코 교수의 다음 질문은 “왜 내가 만든 mRNA가 원하는 대로 생명체 내에서 작동하지 않을까?”였다.
커리코 교수는 연구 끝에 그 이유가 mRNA의 구성 물질 중 하나인 유리딘이라는 염기에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유리딘 대신 메틸 슈도유리딘으로 mRNA 백신을 만드는 방식을 개발해 2005년 발표했다. 이 연구는 두 사람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성과가 됐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mRNA 백신과 관련된 논문 수십 편을 발표하며 새로운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하길 멈추지 않았다.
과학자의 ‘한 발짝’은 때론 대를 이어 연결된다. 2023년 노벨 물리학상은 아토초(100경분의 1초) 과학을 개척한 과학자 3인에게 돌아갔다. 빛의 파동을 발생시키는 시간을 극한으로 단축하면 아주 빠르게 벌어지는 현상인 원자나 분자 내부에서 전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앤 륄리에 스웨덴 룬드대 교수가 1987년 적외선 레이저를 불활성 기체에 투과시킬 때 발견한 현상부터 시작됐다. 불활성 기체 실험 결과 다양한 빛의 광파가 발생했는데, 이 광파는 일정한 주기를 갖고 있으면서 기존 레이저보다 더 짧고 강했다. 륄리에 교수는 여기에 궁금증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다.
륄리에 교수의 연구 덕에 빛의 파동을 펨토초(1000조분의 1초) 단위로 생성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다음 질문을 넘겨받은 건 피에르 아고스티니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교수였다. 그는 2001년 이렇게 생성된 빛의 파동을 250아토초 동안 지속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페렌스 크라우스 독일 뮌헨공대 양자물리학과 교수가 이 시간을 650아토초로 연장하고, 실제 전자의 움직임을 관측했다.
한편 2023년 노벨 화학상은 뜻밖의 실험 결과로부터 시작됐다. 루이스 브루스 미국 컬럼비아대 명예교수가 분광학 연구를 하던 1980년대 초, 실험을 하다 용액 속에 들어있던 수 나노미터 크기의 작은 입자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을 내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이 작은 입자들의 정체는 양자점. 오늘날 QLED TV부터 질병의 진단까지 폭넓게 활용되는 나노물질이다.
브루스 교수는 처음 이 모습을 보고 ‘시료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그는 시료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이 현상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연구를 지속했다. 그 결과 양자점의 특성을 밝힐 수 있었다.
브루스 교수의 제자였던 모운지 바웬디 미국 MIT 교수의 질문은 스승의 질문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균일한 크기의 양자점을 대량생산할 것인가’였다. 바웬디 교수는 1993년 양자점 합성 과정에서 생성된 양자점을 시간에 따라 분리하면 균일한 크기의 양자점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고 밝혔다.
SCI급 저널에 실려야만 노벨상은 아니다
2023 노벨 과학상 수상자 중에서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모은 건 커리코 교수다. 특히 mRNA 백신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2005년 연구가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를 거부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네이처가 논문 게재를 거부한 이유는 “기존 연구 흐름에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논문은 2005년 국제학술지 ‘이뮤니티(Immunity)’에 게재됐다. 이와 관련해 이안 허친스 미국 위스콘신대 정보대학 교수가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인 ‘바이오아카이브(bioRxiv)’에 최근 발표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doi: 10.1101/2023.09.07.556750
허친스 교수팀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지원금으로 연구를 진행한 논문 데이터를 ‘NIH ExPORTER’라는 데이터베이스에서 통째로 내려받아 분석했다. 그 결과, 인용 횟수가 많은 주요 논문이 임팩트 팩터(IF)가 높은 학술지보다, IF가 15 이하인 학술지에 더 많이 게재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IF는 학술지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척도다. 최근 2년간 해당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 다른 논문에 인용된 횟수를 같은 기간 동안 그 학술지에 출판된 논문의 수로 나누어 계산한다. IF가 높을수록 학술지의 영향력이 크다고 판단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 계산법으로는 학술지 자체의 영향력을 알 수 있을 뿐, 그 학술지에 게재되는 개별 논문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다. 참고로 커리코 교수와 와이스먼 교수가 논문 출판을 거절당한 네이처의 IF는 64.8, 이들이 논문을 출판한 이뮤니티의 IF는 43.5다(2023년 기준).
허친스 교수의 연구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연구들이 영향력 있는 학술지에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과학동아는 지난 10월호 ‘과학은 가끔 혼돈의 카오스 위를 굴러야 한다, 트라젝토이드’ 기사를 통해기초과학연구원(IBS) 첨단연성물질연구단 야로슬라브 소보레브 연구원과의 인터뷰를 소개한 바 있다. 당시 소보레브 연구원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노벨상을 받은 연구는 사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학술지에 출판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과학동아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최근 5년간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연구자들의 주요 연구 성과가 발표된 논문을 분석했다. 분석에 활용된 논문은 노벨 위원회가 이들의 핵심 논문으로 소개한 논문 중에서 가장 출판 시기가 빠른 것을 선정했다. 논문이 출판된 학술지의 2023년 IF를 분석한 결과, 전체 논문 38편 중에서 IF가 20을 초과한 것은 17편, 20 이하인 것은 21편으로 드러났다. 가설과 다르게 노벨상 수상 논문들은 IF가 양극화된 양상을 보였다. 눈여겨볼 부분은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논문이 흔히 영향력 높은 학술지로 꼽는 IF 50 이상의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에 출판된 경우보다 IF가 20 이하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 ‘미국화학회보’ 등에 출판된 횟수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비슷한 결론을 얻은 연구가 3년 전에도 있었다. 라스무스 비요르크 덴마크공대 교수는 1995년 이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연구 논문을 분석한 결과, 전체의 28.5%가 ‘피지컬 리뷰 레터스’(2023년 기준 IF 8.6)에 발표됐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어 국제학술지 ‘천문학 저널’(2023년 기준 IF 5.521)이 11.2%, 사이언스가 5.6%, 네이처가 4.7%에 해당했다. 비요르크 교수는 “물리학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가 반드시 가장 높은 IF를 가진 학술지에 출간되는 건 아니다”라고 풀이했다. doi: 10.1007/s11192-019-03312-8
인류에 공헌할 과학자가 탄생하려면
오늘날 IF는 과학자의 연구 성과를 평가하고 연구비를 책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척도로 활용된다. 9월 24일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개최된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 서울 2023’에 참석한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은 “현재의 연구 성과 평가 기준을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1988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하르트무트 미헬 독일 막스플랑크 생물물리학 연구소장은 “과학자의 연구 성과를 네이처, 사이언스 등 영향력이 큰 학술지에 논문을 낸 횟수로 평가하는 것부터 굉장히 잘못됐다”면서 “이런 학술지에 연구 성과를 싣기 위해서는 주류 연구를 해야 하는데, 과학에서 비주류 연구가 더 큰 성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2013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마이클 래빗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노벨 위원회는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개인 면담만 26차례, 평가 위원회 미팅은 100회 이상 시행한다”면서 “이들이 얼마나 평가를 어렵게 진행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성적인 분석 없이 IF와 같은 단순한 평가 기준을 두는 것이 평가 결과를 편향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2017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요아힘 프랑크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정부에서 하는 R&D(연구개발) 투자가 과학자들에게 특정한 방향으로 연구하도록 이끄는 압력이 돼선 안된다”면서 “정부의 모든 투자는 과학자들이 자신이 세운 가설, 즉 질문을 따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노벨상은 인류에게 공헌한 위대한 연구자에게 수여되는 공로상이다. 2023년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는 노벨상을 받을 만한, 인류에게 공헌할 과학자를 어떻게 탄생시키느냐다. 커리코 교수가 수상 직후 CNBC와 한 인터뷰에서 그 힌트를 얻어보자.
“나는 다른 이들이 나를 실패했다고 여길 때 외려 성공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2023년 한국은 커리코 교수처럼 확신에 차 ‘언더독’의 길을 걷는 과학자들을 얼마나 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