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저자에 빙의한 메소드 번역가를 꿈꾼다.’
2021년 출간된 ‘뇌는 작아지고 싶어 한다’의 역자 소개 중 한 문장이다. 읽는 순간 위트 있고 열정 넘치는 조은영 번역가를 이렇게 잘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싶었다. 올해 상반기 벌써 11권의 역서가 출간된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아침 초록창에 본인 책 리뷰는 잊지 않고 찾아본다는 그를 7월 5일 경기도 시흥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림책부터 전문서까지, 새로운 도전 즐겨요”
“그렇게 소개된 책은 딱 한 권이에요. 빙의라는 표현이 좀 과장되긴 했지만, 처음 책을 시작하고 밑작업을 할 때 들리는 저자의 목소리가 있어요. 최대한 그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납량특집에나 나올 법한 단어가 어쩌다 역자 소개에 들어가게 됐는지를 묻는 기자에게 조 번역가는 웃으며 답했다.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지금까지 그가 작업한 50여 권의 책들을 보니 ‘메소드 번역’이 왜 필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톡톡 튀는 블로거가 쓴 ‘랜들 먼로의 친절한 과학 그림책(2017)’부터, 80세 생물학자가 담백하게 쓴 ‘뛰는 사람(2022년)’, 다큐멘터리 여성 감독의 화끈한 입담이 살아있는 ‘암컷들(2023)’까지, 저자들의 개성이 너무도 다양했다.
그중 친절한 과학 그림책은 그의 초창기 작품이다. 번역가의 길로 들어선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미국 조지아대에서 식물분자유전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들어와 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어쩌다 발췌 번역을 하게 됐는데, 그 일을 계기로 ‘10퍼센트 인간’의 번역 제안이 들어왔다. “새로운 걸 도전하기 좋아하는 제겐 굉장히 재밌는 작업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당시의 그는 지금보다도 열정이 더 넘쳤다. 친절한 과학 그림책을 쓴 작가 랜들 먼로는 주변 사물을 1000개 이하의 쉬운 영어 단어로 설명하겠다는 규칙을 세웠다. 국제우주정거장을 ‘함께 쓰는 우주의 집’, 주기율표를 ‘세상 모든 것을 이루고 있는 조각들’로 설명하는 식이다. “저자가 제한된 단어로만 책을 썼는데, 번역가인 내가 가만히 있어도 될까?” 문득 승부욕이 발동한 그는 그날부로 번역한 단어들을 ‘가나다’ 순서로 정렬한 뒤, 그 수를 1500개 이하로 최대한 줄였다. “마음 같아서는 정리한 단어들을 책에 부록으로 넣고 싶었어요.”
이후 그는 일반 교양 과학책과 함께 그림책, 청소년이나 어린이를 위한 과학책을 다양하게 옮겼다. 특히 어린이 책 번역은 “매 문장 공이 더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흔히 어린이 책은 내용이 쉬워 번역도 간단할 거라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일단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면 분량이 1.5배가량 늘어난다. 그림책은 지면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그런 문장을 최대한 압축해 분량을 맞춰야 한다.
또한 어린이 책은 사용하는 어휘나 문체가 성인책과는 딴판이다. 따라서 “어린이 책을 작업할 때는 머릿속 번역가 회로를 어린이 모드로 바꾼 다음 컴퓨터 앞에 앉아야” 한다. 게다가 한창 말을 배우는 연령대의 책이라 영어식 말장난이 많이 나온다. “그대로 직역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죠. 한글로 적절히 풀어내는 일이 만만치 않아요. 편집자들과 함께 많이 고민합니다.”
“덕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
번역 작업은 보통 3권을 병행한다. 성인 단행본 한 권과 어린이 책 한 권, 그리고 다음에 번역할 성인 단행본에 대한 밑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책 한 권을 번역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으면 한 달, 길면 세 달. 이렇게 내년 봄까지 작업할 계획이 이미 꽉 차 있다.
“저는 마흔 넘어 이 길에 들어선 8년차 늦깎이예요. 하지만 선배 번역가들이 닦아 놓은 토대 위에서 훨씬 수월하게 일을 시작했습니다. 또 마침 양질의 과학책이 쏟아지고, 온라인 검색이 발달하고, 여성 저자들이 약진하는 시기와 맞물려 아주 좋은 여건이었죠.”
그는 평소 정해진 일과 없이 “내키는 대로 먹고 자고 일하는 스타일”이다. “집중력과 체력이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번역에 몰입할 힘을 일상의 틀을 유지하는 데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다. 대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기에.
“뭐니뭐니해도 덕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죠. 덕후들이 쓴 책에는 남다른 에너지가 있어요.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그것도 수년간 직접 몸으로 부딪쳐서 쓴 책의 활기찬 기운은 감염성이 아주 높아서 덩달아 들뜨고 힘이 나요.”
그는 과학책이 가진 ‘의외의’ 매력도 덧붙였다. “번역을 하기 전에는 과학책이 전문용어 가득한 두꺼운 책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번역한 책들은 도감, Q&A, 그림책, 에세이, 신문, 인포그래픽 등 신기할 정도로 형식이 모두 달랐습니다. 같은 사실을 전달하는 방법이 이렇게 많을까 싶을 정도로요.”
좋은 번역책이란 이토록 다양한 매력을 가진 과학책을 “읽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책”이라는 그의 말에서 그의 작업 철학이 다시금 느껴졌다. 조 번역가의 역자 소개 첫 문장은 ‘어려운 책은 쉽게, 쉬운 책은 재밌게’다. 개인적으론 예전의 ‘빙의’가 더 마음에 들지만, 표현이 다를 뿐 마음은 같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