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사람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먹서먹할 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어느 학교 나왔어요? 고향이 어디입니까? … 예, 그럼 누구 아시나요? … 저도 그 사람을 잘 알지요. 세상 참 좁네요.”
내 친구의 친구가 나의 친구가 되는 경우를 확인하게 되면서 세상이 매우 좁다는 것을 느낀다. 처음 만난 사람도 서로 자기 친구의 친구라는 관계를 확인하고 나면 두사람 간의 보이지 않았던 장벽이 허물어지고 가까워짐을 느끼곤 한다. 이렇듯 우리는 세상이 좁다는 사실을 때때로 느끼고 경험한다. 실제로 세상은 좁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좁을까.
헝가리 작가 카린시의 직관에서 비롯
‘6단계 분리’라는 말이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을 5명만 거치면 다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 인구가 60억명을 넘어섰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5명만 거치면 다 알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6단계 분리라는 말은 1920년대 헝가리의 작가 카린시가 쓴 ‘연쇄’(chain)라는 책에서 유래한다. 카린시는 당시 지구 사람들 15억명 중 누구나 5명만 거치면 다 알 수 있다고 제안했고, 몇가지의 예를 들어 이를 입증하려고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전해오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7년 하버드대 사회학과 교수인 스탠리 밀그램이 6단계 분리란 구절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데뷔시켰다. 1960년대 후반 미국 동부의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하버드대, 예일대 등의 사회학과에서는 인간관계로 이뤄지는 사회 현상을 그래프 이론을 이용해 사회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풍조가 있었다.
당시 하버드대 사회학과 교수였던 스탠리 밀그램은 사람들 간의 관계 형성을 연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수행했다. 3백편의 편지를 미국 중부에 위치한 캔사스주의 위치타 또는 네브라스카주의 오마하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뿌렸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은 이에게 보스턴 근교에 위치한 샤론에 살고 있는 아무개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편지는 자기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샤론에 있는 아무개를 제일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전하기를 반복해 최종적으로 샤론의 아무개에게 도착하도록 했다. 편지 봉투에는 전달자의 이름을 배서하게 해 편지가 전달된 경로를 알 수 있게 했다.
이 실험을 통해 배달된 편지 중에서 배서된 사람의 수를 세어보니 평균 대략 5.5명으로 나왔다. 밀그램은 카린시의 소설에서 나오는 내용을 입증함으로써 ‘6단계 분리’를 확인한 셈이다. 좀더 자세한 정보는 스탠리 밀그램의 업적과 관련된 사회네트워크에 대한 웹사이트(http://www.stanleymilgram.com)에서 볼 수 있다.
인터넷으로 연구 참여 가능
스탠리 밀그램이 ‘6단계 분리’를 실험한 후 약 35년이 지난 오늘날의 세상은 그때와는 무척 다르다. 인터넷의 발달로 세상은 더욱 좁아졌고, 정보도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6단계가 아닌 몇단계의 분리일까.
이같은 의구심에 착안해 미 컬럼비아대 던칸 와트 교수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와트 교수는 1998년 코넬대 응용수학과에서 카오스 이론으로 유명한 스크로가츠 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좁은 세상 네트워크’라는 논문을 발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다. 원래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와트 교수는 졸업 후 산타페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사회네트워크에 대한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지금은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와트 교수는 2001년 12월 또한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현대판 ‘6단계의 분리’를 실험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밀그램이 35년 전에 실시했던 우표가 붙은 편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아니라 이번에는 이메일로 좁은 세상임을 실험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뉴욕타임즈를 비롯해 많은 언론에 알려졌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최종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실험은 진행중이다. 독자 여러분도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http://smallworld.sociology.columbia.edu를 방문하면 된다.
그럼 좁은 세상이라는 개념이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최근 들어 이러한 질문에 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면서 놀랍게도 좁은 세상 현상이 사회가 아닌 여러 다른 분야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배우들 간의 인맥,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망, 그리고 생명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생화학 반응과 관계된 신진대사 반응망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좁은 세상 현상을 찾을 수 있었다. 좁은 세상 현상의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자.
두세다리 건너면 연결되는 할리우드
케빈 베이컨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 ‘트랩트’(trapped)가 우리나라에서 지난해 11월 말에 개봉돼 상영되고 있다. 케빈 베이컨은 할리우드에서 꽤나 유명한 배우다. 뿐만 아니라 그는 ‘케빈 베이컨 게임’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케빈 베이컨 게임이란 할리우드의 영화배우들을 함께 출연한 영화를 통해서 케빈 베이컨과 연결하는 게임이다. 예를 들면 영화 ‘오스틴파워’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마크 마이어라는 배우가 로버트 와그너라는 배우와 함께 ‘오스틴파워’에 출연했는데, 이 로버트 와그너는 ‘와일드 씽’이라는 영화에서 케빈 베이컨과 함께 출연했다. 이런 관계를 통해 마크 마이어는 로버트 와그너를 통해 케빈 베이컨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때 마크 마이어는 케빈 베이컨 넘버가 2, 로버트 와그너는 1이 된다.
재미난 사실은 20만명이 넘는 할리우드의 거의 모든 배우들이 단지 2-3단계만 거치면 손쉽게 케빈 베이컨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물론 독자 여러분들은 이같은 게임이 가능한 이유가 할리우드 영화계가 좁은 세상이라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케빈 베이컨 게임은 1980년대 중반 미국의 대학생들이 한 토크쇼에 출연하면서 생겨났다. 방청석에서 어느 영화배우의 이름을 외치면 출연한 대학생들이 그 영화배우의 케빈 베이컨 넘버가 얼마라고 즉각적으로 답하면서 누가 어느 영화에서 케빈 베이컨하고 출연하고, 그 누구는 다른 누구와 어느 영화에서 같이 나오는 등의 내용을 줄줄이 대답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케빈 베이컨 게임이 한때 온 대학가를 뒤흔들었다.
김정은과 이대근은 3단계 분리
요사이 들어 우리나라 영화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버금가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케빈 베이컨 게임을 할리우드가 아닌 우리나라 영화배우들에게 적용해보면 어떨까.
2002년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을 꼽아보면 조폭코메디 ‘가문의 영광’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조폭의 딸 역할을 한 배우 김정은은 이미 CF 스타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배우로 급부상했다. 김정은은 가문의 영광에서 박근형과 연기했고, 박근형은 1991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에서 안성기와 함께 출연했다. 안성기는 1984년 ‘고래사냥’이라는 영화에서 이대근과 함께 출연했다. 이렇듯 김정은-박근형-안성기-이대근, 이런 식으로 한국 배우들을 연결하면 할리우드가 아닌 충무로 한국 영화배우들의 좁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필자의 한사람인 정하웅 교수가 이 연구를 진행중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생각해볼만한 질문이 몇가지 떠오를 것이다. 그럼 도대체 한국의 케빈 베이컨에 해당하는 배우는 누구일까. 또 한국 영화배우들은 할리우드의 배우들, 즉 케빈 베이컨과 연결이 될까. 연재를 진행해가면서 이러한 충무로 영화배우들이 갖는 좁은 세상의 특징을 하나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월드와이드웹은 19단계
네트워크란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데는 인터넷의 공로가 상당하다. 때문에 가상세계는 네트워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상이 된다.
과연 지구상에는 홈페이지가 몇개나 있을까. 최근 미국의 뉴욕 근처에 위치한 NEC 연구소의 길스라는 과학자는 전세계 홈페이지의 수를 약 10억개로 추산했다. 전세계 인구가 60억인 점을 생각하면 6명당 한개의 홈페이지가 존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10억개 홈페이지는 개인 홈페이지만이 아니라 상품광고, 회사소개, 학교도서관 도서목록 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6명당 한명이 개인 홈페이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10억개의 홈페이지는 몇단계를 거치면 도달할 수 있을까. 최근 NEC 연구소와 정하웅 교수를 포함한 노트르담대 바라바시 교수 연구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10억개의 홈페이지는 19번의 클릭을 통하면 모두 도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어느 웹사이트는 2번의 클릭을 통해 다가갈 수 있고, 어떤 웹사이트는 60번의 클릭을 통해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19번이면 웬만한 웹사이트는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연구결과다.
60억의 인구를 5명만 거치면 다 알게 된다는 것과 비교하면 다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한사람이 일생 동안 3천명 정도를 알고 지내는 반면 한 홈페이지에 연결된 링크 수는 평균적으로 7개 정도로 적다. 따라서 19번의 링크로 웬만한 웹사이트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점이다.
아무튼 6명을 통해서나 19번의 클릭을 통해서나 모든 사람이나 웹사이트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세상은 참으로 좁다. 이러한 좁은 세상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주변 사람들이나 웹을 통해 손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세계가 인터넷으로 인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좁은 세상 네트워크와 생명체
좁은 세상은 비단 인간사회와 인터넷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박테리아와 같은 세포 안에서도 좁은 세상은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필자들을 포함한 물리학자와 생물학자들은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화학반응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졌다. 생물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원을 공급받기 위해 연쇄적 화학반응을 세포 안에서도 일으키는데, 신진대사 네트워크(metabolic network)라고 불리는 이 네트워크도 좁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와 B가 반응해 C와 D를 만드는 반응이 있다고 가정하자. 반응식으로 A+B → C+D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또 A+E → F+G와 같은 반응도 있다고 하자. A라는 물질은 위의 두개의 반응에 모두 참여하므로 연결된 선이 2인 노드(점)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 연결선은 각각 B와 E에 연결돼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세포 안의 모든 물질들에 대해 연결 그래프를 그려보면 신진대사 네트워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박테리아와 같은 단핵생물이나 그보다 고등한 진핵생물 할 것 없이 생물체의 신진대사 네트워크의 거리는 그 생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화합물의 수에 관계없이 짧은 거리로 일정하다는 점이 밝혀졌다. 결국 세포 내 신진대사 네트워크도 좁은 세상인 셈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화합물을 만드는 경로를 짧게 유지해서 빠른 시간 내에 필요한 화합물들을 만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짧은 경로의 좁은 세상 네트워크를 갖지 못한 생명체는 적응력이 떨어져 자연도태 됐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매우 좁으며 알게 모르게 서로 링크돼 있다.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이 세상은 좀더 좁아지고 있다. 이러한 좁은 세상은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러한 좁은 세상에서는 무슨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래프 이론
그래프란 쉽게 생각해서 여러 점들을 연결선으로 적당히 연결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프 이론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최초의 학자는 레오나드 오일러(1907-1783)다.
1736년에 오일러는 지금은 러시아에 속해 있지만 당시에 독일 영토였던 괴니히스베르크라는 마을에 전해 내려오던 퍼즐을 풀면서 그래프 이론을 생각해냈다. 문제는 프레겔강으로 서로 분리돼 있는 4개의 마을 영역(A, B, C, D)을 이미 놓여진 7개의 다리들(a, b, c, d, e, f, g)을 각각 한번씩만 건너서 모든 영역을 방문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퍼즐을 접한 오일러는 그 다리들과 프레겔강 줄기들에 의해 분리돼 있으면서 이 다리들로 연결된 4조각의 땅덩어리를 각각 연결선과 점으로 나타낸 그래프로 나타냈다그리고 이 그래프의 속성을 파악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정답은 그러한 경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좀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한붓그리기 정리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정리는, 임의의 그래프 선들을 각각 단 한번씩 지나 시작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그 그래프의 각 점에 연결된 선들의 숫자가 홀수인 점이 0 또는 2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