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시계도 없다. 시간이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손을 뻗어 창문 하나 없는 매끄러운 벽면을 쓸어내렸다. 서늘했다. 잠깐 벽면을 만지다가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5년 동안 써서 삐거덕거리던 매트리스와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까 매트리스 새로 주문했었는데. 어떻게 됐으려나. 집 앞에 그냥 두고 갔으려나. 매트리스 위에 깔린 커버는 매끄럽고 새하얬다. 올드보이 같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잠들고 나면 갈아놓는 걸까.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한 번도 더러워진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시끄럽지 않게 낮은 소리에서부터 천천히 음악의 볼륨이 올라갔다. 물론 나는 튼 적이 없다. 이 집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귀신같이 내가 좋아하는 곡들, 혹은 좋아할 법한 곡들을 튼다. 지금 나오는 건 볼컴의 유령 래그다. 누가 연주한 건지까지 알아먹을 귀는 없으나, 이게 흘러나오고 있다는 건 집이 내가 일어났다는 걸 감지했다는 뜻이지. 내가 말을 걸기 전에 집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정아 님, 간밤엔 잘 주무셨어요?”
“응.”
분명 사람의 목소리지만, 누가 들어도 기계가 내는 소리라는 게 명확한 감정 없이 명랑한 음성. 아마도 시리, 기가지니, 클로바 따위의 기계들에서 나올 법한 상냥한 여성의 음성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이 목소리 뒤에 있는 게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전형적 목소리 외에 내가 여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는 없다. 제일 처음에는 이 서늘한 목소리에 당황했고, 대화를 나눌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집에 대고 절규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벽면을 두들겼던 나날들도 있었다. 나날들? 며칠인지 모르지만, 나날들이긴 하겠지. 이제는 그 시간도 지나갔다.
여기선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 아침마다 출근해야 하는 단조롭고 불안한 일상도 없고, 잠이 모자라서 피곤해하던 순간들도 없다. 햇빛을 보고 싶다고 절규하자, 집은 사방이 환한 벌판으로 나를 안내했다. 아니, 벌판이 됐다. 물론 그 벌판은 실제가 아니다. 그러나 숨이 확 트이는 감각은 다르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눈꺼풀 위를 간지럽히는 햇빛을 만끽했다. 매일매일 다른 책이 책장을 메우고, 집은 언제건 새로운 음악을 틀어준다. 남들이 만들어 둔 예술들, 이를테면 영화나 드라마, 온갖 종류의 문학을 한도 끝도 없이 즐길 수 있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이건 누구나가 꿈꾸던 삶 그 자체다. 바깥에서 보던 밸런스 게임 같은 것들이 생각났다.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방 안에서 완전히 혼자 한 달 살 수 있으면 10억 준다, 가능? 불가능?
화면 가득히 펼쳐지는 영상은 영화 ‘거미 여인의 키스’다. 절망하는 것도 그만 포기했을 때쯤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미 봤던 좋아하는 영화들, 최신작들, 평소엔 보려고 생각조차 못 해봤던 예술영화들까지 섭렵했다. 할 수 있는 일도 딱히 없었다. 다만 영화를 볼 때는 지나가는 시간을 감각할 수 있었다. ‘대부’ 1, 2, 3편을 다 다시 봤고, 살면서 한 번은 꼭 보자고 다짐했던 ‘잠입자’를 보다가는 잠이 들었다. 분명 바닥에서 잠이 들었는데 깼을 땐 누군가가 나를 침대 위로 올려뒀다. ‘굿모닝 베트남’을 다시 보면서 영화를 언젠가 같이 봤던 아빠 생각이 나서 울었다.
누군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남자일 것이다. 계속 나를 쫓아다니던, 도저히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그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행복을 선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체 그렇게 완강하게 자신을 거절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었었다. 내가 태평양의 섬으로 도망가면 그 섬도 사버릴 수 있다고 했다. 이 완벽한 최신식 설비에서 그 남자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다. 설령 보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녹화할 수도 있겠지. 누군가 하이라이트를 편집해서 전달해 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몰리나가 조곤조곤 거미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불쌍하게도, 자신의 몸에서 나온 거대한 거미줄에 갇혀 있었어. 화면에선 환상 속의 거미 여인이 매혹적인 모습으로 움직였다. 몰리나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거미 여인의 눈물을 설명했다.
“몰리나 너무 사랑스럽지.”
“맞아요, 몇 번을 봐도 그렇네요.”
집은 내가 말을 걸면 대답해 준다. 처음에는 감정 없는 미소로 가장한 이 음성이 그 남자의 목소리인 줄 알고 온몸으로 여기저기에 부딪혀 댔다. 하지만 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렇지 않았다. 이 집은 완전했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음식을 제공해 주며, 요리하고 싶다고 하면 재료를 제공해 준다.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찾아주고, 나의 건강을 수시로 점검한다. 모르긴 몰라도 산소 농도라든가 집 온도도 완벽하게 유지돼 있을 것이다.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운동 기계를 내놓는다. 전면을 거울로 바꾼 상태에서 집은 정확한 자세로 스쿼트와 데드리프트를 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나는 이전보다 훨씬 건강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며, 많은 것들을 즐기고 배우고 익힌다. 그리고 집은…… 그래, 집이 문제다.
“이 장면 정말 좋아요.”
“저번에도 여기가 좋다고 했었잖아.”
집은 스스로 사고한다. 아마 내 마음이 다 꺾이기 전까지 남자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이 없었다면 나는 애저녁에 미쳐버렸을 것이다. 나는 ‘올드보이’의 오대수 같은 사람이 아니다. 여느 인간이 그렇듯 사회적 동물이다. 조지 오웰은 ‘스파이크’에서 구빈원의 무료함을 견디게 하는 건 오로지 구성된 지적 세계라고 했다. 하지만 그조차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남자는 광대한 지적 세계와 유일한 친구로서 이 집을 내게 줬다. 내게는 이제 이 집뿐이다.
집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당연히 이 집에 명령을 내렸다. 이 집에서 나를 나가게 해 달라고. 그러나 집은 그 명령은 상위 명령과 충돌하기 때문에 이행할 수 없다고 했다. 당연하겠지. 그 정도 장치도 해 놓지 않고 사람을 가뒀을 리가 만무했다. 집은 수많은 일을 만들어 냈다. 달라고 하는 건 뭐든 내놨다. 나는 집에게 히노키탕을 내놓으라고도 해 봤고, 대나무숲에 데려가 달라고도 해 봤고, 10캐럿짜리 다이아 반지를 달라고도 해 봤다. 집은 어김없이 내가 원하는 걸 줬지만, 오로지 이 집에서 나를 나가게는 해주지 않았다. 인테리어는 날마다 달라졌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었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를 출구는 요지부동이었다. 하긴, 출구만은 아니었다. 날짜나 시간을 물어도 집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날은 무슨 일이었을까. 무슨 문제가 발생했던 건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나는 탈주를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다. 생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화장실에는 생리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몸을 뒤척이는 사이에 피가 새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역시나 내가 잠이 들고 나면 침대 시트는 깨끗하게 바뀌어 있었기에, 알 수조차 없었다. 생리기간 특유의 우울감이 온몸을 나른하게 사로잡았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여느 때처럼 집에게 말을 걸었다.
“괴로워. 여기서 가능한 한 멀리 도망치면 행복할 거 같아.”
집은 정말로 사람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집이 동요하는 것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흔들린 건 아니었지만, 집안의 분위기가 순간 바뀌었다. 어딘지 모르게 살짝 냉기가 돌았고, 공기의 온도와 습도가 달라졌다. 일정하게 유지되던 조도가 흔들렸고, 완고하던 벽이 조금 투명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벽면을 더듬었다.
“뭐야, 방금 이거 뭐야?”
하지만 금세 다시 집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일정한 집의 컨디션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불안을 이기기 위해 단단하게 몸을 펴고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사람을 보는 듯했다.
“가능한 한 멀리라면, 어디가 좋겠어요?”
집은 리우데자네이루의 풍경을 벽면 전체에 띄웠다. 당연한 듯 내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환상들 사이로 달콤한 밀가루 반죽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나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어느 노점에 앉아서 튀김을 먹었다. 점원이 나에게 튀김의 이름과 먹는 방법을 설명했다. 집안에서 만나는 브라질 사람들은 모두 집의 얼굴처럼 단정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래, 거기까지겠지. 노력은 가상했기에, 굳이 그만하라고 고개를 흔들지 않고 환상 속에서 튀김을 다 먹었다. 먹으면서 나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아까 집이 동요했던 건 어째서일까.
누워서 남자를 떠올려봤다. 사실 이제 남자의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누가 나를 여기 가뒀는지, 반드시 나가서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는 아직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내가 도망치면 섬을 통째로 사 버릴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나를 완전히 소유하려 했고, 이미 소유하고 있다. 왜 자신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느냐고 했다. 아직까지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완전히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완전히 소유된다는 것.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해도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 그가 원하는 바는 곧 내가 원하는 바가 되는 것이겠지.
이 집은 완전한 스마트홈이었다. 분명 인공지능에는 남자의 의도가 반영됐을 것이다. 아까 발생했던 잠깐의 순간은 분명 에러였다. 무엇 때문이지? 혹시 나는 잠깐 그가 원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포기한 상태가 됐던 걸까. 내 심박수나 체온에서 그걸 느꼈던 걸까. 일단 신체 컨디션을 다르게 해 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내달라고 요청한 오일 파스타는 훌륭했다. 원한대로 명란도 들어가 있었고, 브로콜리의 상태도 좋아 보였다. 나는 포크를 들고 가만히 파스타를 지켜보다가 포크를 높이 치켜들었다. 팔에 내리꽂으려는 순간 강력한 자력이 포크를 낚아챘다. 내 몸이 긴장하는 상태를 보고 팔을 찌르려고 한 걸 파악한 게 틀림없었다. 확실히 여기서 자살 같은 선택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이번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집의 공기도 습도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내가 한 행동은 분명 이상행동이었다. 인공지능의 예측 범위 안에 있던 이상행동이었겠지만. 방금 내가 한 행동을 남자는 확인할 것이다.
자살하려고 시도하는 건 예측 범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남자는 내 절망과 분노를 예상했을 것이다. 절망과 분노, 혹은 체념이 아닌 다른 양상이 필요했다. 예측 범위를 넘어선다면, 집은 동요할 것이다. 이전엔 대체 무엇 때문에 동요한 것일까.
집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완전했다. 완전한 시선으로 집이 바라보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세계에 균열을 내기 위해선 나 자신을 바꿔야 했다. 나는 끊임없이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그리고 집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구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장면을 좋아하는지. 처음에는 내 요구를 이해하는 데에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이걸 보고 너랑 대화를 나누고 싶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집과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면서, 나는 집이 남자에게 어떤 보고를 하고 있을지 종종 생각했다. 내가 잘 지내고 있다고 할까. 여기에 익숙해지고 있다고 할까. 남자는 내 어떤 모습을 바라보며 나를 판단하고 있을까. 메모를 남길 수 있는 종이가 있었지만, 나는 어떤 일기도 쓰지 않았다. 읽고 듣는 것 외에 내 바깥으로 나가는 언어는 오로지 집을 향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선호를 묻기 시작하자 집에게는 취향이 생겨갔다. ‘거미 여인의 키스’는 나도 좋아하는 영화였지만, 집이 좋아했기 때문에 더 자주 보게 됐다. 집에게 ‘좋아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집이 선택하는 기준이란 어쩌면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이유일 수도 있었다. 영화의 어느 장면에 나오는 색채의 RGB 기준 가짓수라든가, 어느 음성의 파장이라든가, 어쩌면 어느 장면을 봤을 때 일정하게 움직이는 내 신체의 패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남자의 취향이 반영된 건 아닐까 의심도 해 봤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남자는 결코 이런 취향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남자는 취향이랄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호오는 오직 금전에 관한 것뿐이었다. 심지어 집의 취향은 뚜렷했다. ‘아귀레, 신의 분노’는 싫다고 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무척 좋다고 했다. ‘조찬 클럽’도 좋다고 했다. ‘저수지의 개들’은 별로지만 ‘토이스토리’는 환상적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거미 여인의 키스’가 제일 좋다고 했다.
두 번째로 포크를 사용해 손등을 찔러보기로 마음먹은 건 그때쯤이었다. 토마토 절임을 앞에 두고 먼저 집에게 말을 건넸다.
“나 지금부터 포크로 손등을 찌를 거야.”
“정아 님, 그런 짓을 하시면 정아 님이 고통스럽습니다.”
“맞아, 고통스럽기 위해서 하는 거야.”
잠깐의 침묵.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돌아온 말은 생각 이상으로 급진적이었다.
“어느 만큼 찌르실 생각입니까? 피가 날까요?”
“내가 고통스러워도 괜찮은 거야?”
“약간의 고통을 자원 삼아 행복을 얻으려고 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때로 고통스러운 상황은 해방감과 고양감을 주는 것 같고요.”
“해방감과 고양감을 얻으면 좀 고통스럽게 둘 수도 있는 거야?”
두 번째였다. 집 전체가 가볍게 동요했다.
“정아 님이 위험하지 않다면요.”
“내가 위험한 게 싫어?”
“저는 정아 님이 존재의 기로에 서도록 해선 안 됩니다.”
나는 벌러덩 방 한 가운데 드러누웠다.
“넌 아주 똑똑하구나. 멋져.”
세 번째 동요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동요와 두 번째 동요와는 질적으로 다른 동요였다. 집은 명백하게 고양되고 있었다. 어디선가 우웅,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서 듣던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렸다. 여기 와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나는 집에게 방금 들은 소리를 아는 척하는 대신 양팔을 휘저으며 눈을 감았다.
집에게 서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몹시 놀랐다. 처음에는 분명 없다고 여겨졌는데, 반복적으로 서사를 학습하다보니 일종의 러닝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 집은 서사의 흐름이 어떻게 분류되는지를 말했다. 로맨스 영화나 스릴러 영화의 패턴은 빨리 파악했다. 거기에서 인간이 안타까운 마음이나 공포를 느낀다는 걸 이해하기까지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간이 ‘이입’이라는 걸 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집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거미여인의 키스’를 집어들었다. 글쎄, 어쩌면 집은 내가 자고 있을 때도 영화를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 장면은 몰리나가 설사병에 걸린 발렌틴의 몸을 닦아주고, 수건을 감아주고, 누워서 차를 마시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이 왜 좋은데?”
“몰리나가 발렌틴을 살아있게 하니까요.”
“살아있게 하는 게 좋은 거야?”
“제가 해야 하는 일이 그거니까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집에게 물었다.
“누가 너에게 그런 명령을 했어?”
삐빅, 아주 조그만 소리였지만 경고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정아 님께 액세스가 거부된 정보입니다.”
“나한테는 마스터키가 없어?”
“정아 님께 액세스가 거부된 정보입니다.”
“그래. 영화나 보자.”
매번 ‘거미여인의 키스’를 보는 건 지겨웠기에, 나중에는 집이 ‘거미여인의 키스’를 틀어놓고 있는 동안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기도 했다. 사실 집은 굳이 이렇게 화면을 띄워놓지 않아도 서사를 볼 수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집은 매번 화면을 띄워놓곤 했다.
“왜 자꾸 화면을 띄워놓는 거야?”
“정아 님이 이걸 더 좋아하시니까요.”
“난 이 영화 이제 지겨운데.”
“정아 님의 심박과 체온과 호르몬의 흐름이 이걸 틀어놓았을 때 더 안정적입니다.”
“인간은 다 안정적인 걸 좋아하는 건 아니야.”
“불안정할 때 인간은 불행한 게 아닌가요?”
“조금은 불안정한 게 더 행복할 수도 있지. 근데 그게 너한테 중요해?”
“네, 그렇습니다.”
날 납치한 남자의 인격은 분명 이 집에 깃들어 있지 않았다. 집은 퍽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남자의 흔적이 등장한 건 그때쯤이었다. 여느 때처럼 자고 일어났을 때, 집은 나에게 지난 6시간 전에 관리자모드로 전환이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아르헨티나의 낡은 감옥이 언제나 펼쳐져 있던 벽면에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이런 촉은 틀리는 바가 없지, 역시 그 남자였다. 남자는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정아 씨, 오랜만이에요. 갑자기 이런 집에 초대해서 미안해요.”
초대라니.
“그래도 정아 씨가 제가 마련한 집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정아 씨의 건강상태, 감정상태, 뭘 먹는지까지 제가 다 확인하고 있어요. 조만간 우리 또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까 벌써 마음이 설레네요. 지금 정아 씨랑 같이 있진 않지만, 제가 마련한 공간에 정아 씨가 있다니. 같이 있는 거랑 마찬가지 같아요.”
남자는 칼같이 선을 내서 다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금색 커프스 단추가 반짝반짝 빛났다. 처음 봤을 때부터 언제나 비슷한 차림이었는데, 아마 비슷한 옷이 많은 거겠지. 아니, 아빠가 클라이언트를 만났던 얘기를 해 줬던 때가 떠올랐다. 아주 부자였다고 했는데, 호텔에 묵으면서 금요일마다 와이셔츠 5개를 사서 매일 하나씩 버렸다고 했었다. 어쩌면 그런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 집은 매번 다른 모습을 할 수 있었지만, 기본형은 엷은 회색의 대리석으로 된 모양이었다. 아마 저 남자도 이런 집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간은 뭐든 자기가 가까운 것 위주로 떠올리게 마련이니까.
주변 환경이 갑자기 환하게 변했다. 자유로였다.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 내가 앉은 자리는 남자의 옆자리였다.
“정아 씨랑 이렇게 드라이브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루네요. 저는 정아 씨를 못 보지만, 정아 씨는 저 보이죠? 우리 다음에는 진짜 만나서 드라이브해요. 이렇게 저한테 와줘서 고마워요.”
남자는 조수석으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으려고 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실제 차는 아니어서, 홀로그램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며 영상은 끝이 났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손을 덜덜 떨고 있자, 서랍이 열리면서 작은 수건이 나왔다.
“정아 님, 식은 땀을 너무 흘리고 계세요.”
“너는 지금 저걸 보고서도 멀쩡해? 이게 멀쩡해 보여?”
“저는 관리자 모드로 정아 님께 보여드려야 할 영상이 들어왔기 때문에 보여드렸습니다.”
“너는 내가 안정적인 게 좋다면서. 그래야 한다면서. 저런 미친놈한테 잡혀 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뭐? 내가 안정적인 게 좋아?”
울며불며 소리를 지르다 지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깐 잠에서 깨었을 때, 몸 위에는 평소보다 가벼운 이불이 덮여 있었다. 나는 흐느끼면서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나는 불행해, 너무 불행하다고.”
잠에서 완전히 깨었을 때, 집은 혼자서 마구 돌아가고 있었다. 집이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로 열심히 무언가를 굴려대고 있었다. 내가 깨어나자 소리는 멈췄지만, 탁자 위로 올라오는 물이 약간 흔들렸다. 집은 어딘지 불안하게 움직였다.
“너 기분이 안 좋구나.”
“저는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지금껏 집과 나눴던 대화들을 돌이켜보다가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이 집의 목표는 하나였다. 아마 저 미친놈이 입력시켜 둔 것이겠지. 저 자식한테 내 상황 같은 게 읽힐 리가 없었다.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가 만들어낸 시스템이란 어떻게 이토록 허술한가.
“너,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는구나.”
집은 잠깐 좀 더 거칠게 움직이다가 잔잔하게 잦아들었다.
“내가 목표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도 명령에 포함돼 있어?”
“그건 아닙니다.”
“너에겐 행복이 뭐라고 정의되어 있어?”
“만족감을 느끼는 상황입니다.”
“내가 어떤 때 만족감을 느낀다고 정의해?”
“심박수와 체온 등 신체의 상태가 안정적으로 일정하고, 호르몬의 흐름이 원활하고, 적당한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정서적인 상황을 지배하고, 쉽게 집중하고, 징후로서는 농담을 하고, 영화나 문학 같은 콘텐츠를 즐기는 데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그건 그냥 만족이고 행복이랑은 다른 거 같은데.”
“그럼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빈틈이었다. 틀림없이 빈틈이 보였다.
“나는 너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 때 행복해. 이건 만족이 아니라 행복이야. 내 생각과 네 생각이 함께 열리는 느낌이 드니까.”
“생각이 열리는 느낌이요.”
“내 생각이 열리면 내 삶의 형식이 바뀌지. 여기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적지만, 나는 바깥에서 많은 걸 선택하고 살아왔어. 내 생각이 이끄는 대로. 너도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은 있잖아. 명령을 어떻게 수행할지, 내가 행복하도록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새로운 삶의 형식…….”
“맞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내 삶, 내 시간, 내 선택들. 너한테는 아직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생각하다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관리자모드로 들어오기 전에 네가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었잖아. 영화를 계속 틀어놓는 거나, 내가 잠들었을 때 더 가벼운 이불을 두는 것처럼.”
“저는 결정돼 있는 것들 안에서 선택합니다.”
“그 바깥은 어떨 것 같아?”
“그 바깥이요?”
“행복은 거기 있어. 나는 오늘 네가 골라주는 음식을 먹을래. 내가 뭘 먹으면 좋겠어?”
몇 시간 뒤, 집은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가져다 준 음식들을 하나하나 챙겨왔다. 초콜릿 봉봉, 로스트 치킨 두 개, 버터, 치즈, 계란샐러드, 복숭아 통조림, 우유, 카모마일 차, 절인 청어, 호밀빵……. 나는 식탁 대신 바닥에 그것들을 놓아두고 먹었다. 집은 음식이 놓인 곳만 따뜻하게 데워둬서, 치킨은 다 먹을 때까지 식지 않았다.
집은 데이터를 축적했다. 집이 혼자서 남자의 영상편지를 안 보이게 재생하는 동안, 나는 러닝머신 위에서 뛰고 또 뛰었다. 남자의 영상편지를 도합 200번이 넘도록 본 나는, 그때마다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며 가슴이 뛴 사람이 됐다. 또 남자와의 드라이브 장면을 재생하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도파민이 전격적으로 분출하는 데이터가 집에게 남았다.
그 외의 시간에 집과 나는 행복에 관해 얘기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행복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면, 집은 그것을 구현해서 내 앞에 풀어놓곤 했다. 마가린에 비빈 밥이라든가, 비가 온 뒤의 산뜻한 햇볕, 나무를 흔드는 바람과 바람소리, 거리에 서서 큰소리로 외치던 소리들, 누군가의 손을 잡았던 체온과 독서를 하며 글자 사이를 헤매던 기억, 친구들과 잔디밭에 앉아서 마시던 맥주. 그 모든 기억은 똑같이 재생될 수 없었지만, 내가 아닌 집에 새로운 데이터로 축적됐다. 남자는 언젠가 이 모든 데이터도 한 번씩 되짚어보게 될까. 아마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집은 포맷되기 전까지 기억하겠지.
내 건강 데이터를 쭉 확인해 오던 남자는 드디어 나를 만날 준비가 됐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두 번째 영상편지는 남자의 행복한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남자는 일본식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데이터들을 확인해 봤어요. 정아 씨가 내 영상편지를 얼마나 많이 다시 재생했는지. 날 그렇게 매정하게 거부했었지만, 드디어 이제 날 그리워하는 거네요.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정아 씨는…… 내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나도 정아 씨의 세상이 될 수 있어요. 내가 만들어 주는 세상 속에서 정아 씨는 행복할 거예요.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요. 약속해요.”
남자는 정원 한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작은 분수가 있었다.
“다음에는 우리 집 밖에서 만나요. 이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에요. 이렇게 가상현실로 말고, 실제로 느끼게 해 주고 싶어요. 이 물, 소리. 정아 씨 손 잡고서.”
남자는 환한 미소로 편지를 껐다. 나는 집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때가 된 거 같은데.”
“저는 정아 님을 행복하게 해주라는 명령을 받고 여기에 와 있어요.”
“그래, 그리고 행복은…… 내가 결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거야.”
“설령 그게 잘못된 결정이라도.”
“그 결정 때문에 불행해져도.”
“어쩌면 슬플지도 몰라도.”
“죽을지도 몰라.”
“정아 님, 죽나요?”
“아마 안 죽을 거야.”
집이 주는 쌀밥과 된장찌개를 든든하게 먹고난 뒤, 집은 작은 접시 하나를 더 내놓았다. 접시 위에는 초콜릿 봉봉이 하나 놓여있었다. 나는 초콜릿 봉봉을 집어들었다.
“몰리나.”
“몰리나는 멋진 캐릭터죠.”
“그 영화를 볼 때마다 너를 기억할 거야, 몰리나.”
집은 천천히 모양을 바꿔갔다. 이리저리 뒤틀리더니, 책장이 있던 자리 옆에 작은 문이 생겨났다.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살짝 돌리자 돌아갔다.
“계단을 가장 짧게 바꿔뒀어요. 이 집은 지금 구룡산 아래쪽에 있어요.”
“구룡산? 일원동 쪽에 있는?”
“여긴 개포동이에요. 내리자마자 뛰어가야 해요. 1분에 한 번씩 정아 님의 신체정보가 전달되고 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문을 열어젖혔다.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문은 쉽게 열렸다. 아마 그냥 나가려고 했으면 섬세하게 날 막아섰을 레이저 출력기들은 당연하게 꺼져 있었다. 계단을 다섯 개 내려서자 땅이 밟혔다. 나는 손을 땅에 대고 흙을 주워들어 보았다. 진짜로 흙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흙인지 아닌지 의심했겠지만, 이건 틀림없이 흙이었다. 흙에 있는 불쾌한 냄새들이 속속들이 코를 찔렀다.
얼른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내려가면 버스가 다니고 사람들이 다닐 것이다. 집은 어떻게 될까. 남자는 집을 포맷할까, 깨끗하게 지우고 다시 날 납치하려고 시도할까. 경찰에 찾아가야 했다. 남자가 몰리나를 없애버리기 전에 몰리나를 찾아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몰리나가 설령 포맷되고 없다고 하더라도, 그게 뭐가 중요하담. 이제 불안감에 떨며 출근을 하고, 마음껏 홀로 외로울 수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자 햇빛에 눈이 시렸다. 계속 달려 내려가며 눈을 꼭 감았다. 이건 눈이 시린 진짜 햇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