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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여 과기처장관 재임시절, 기능대학 정보산업국 과학재단 등을 설립하고 기술개발촉진법 기술용역 육성법 국가기술자격법 등 각종 법령을 만든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71년 6월 나는 과기처장관으로 임명받았다. 과학기술처는 제1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술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면서 이를 위한 정책부서로 67년에 발족하였다.

내가 부임할 때는 이미 과기처가 발족한지 4년이 되는 해였지만 정책이나 조직적인 활동이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과학 기술정책 수립의 원칙도 없었고 이미 수립된 정책들도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나는 우선 장기적인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3대 정책기본 방향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키우는 것을 앞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키울 수 있는 제도와 이를 활용하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두번째로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경제개발을 지원하는 체제로 발전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전략공업기술을 선정하여 중점 개발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도 선택적인 공업화를 추진하겠다고 하던 터라 이 정책방향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이 이 나라에 뿌리를 내려 성장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교의 관념적인 사상이 팽배해 있는 우리나라는 계량적이고 실천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과학기술이 자라나기에는 이주 빈약한 토양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풍토조성은 한두사람의 학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민이 과학을 이해하고 기술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풍토조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매년 4월 21일「과학의 날 기념식」에는 과학상 기술상 진흥상과 함께 생산현장에서 공로가 많은 기능인에게 주는 기능상이 수여된다.
 

교수와 나란히 상받은 늙은 기능공

먼저 제도적인 정비에 들어갔다. 과학기술진흥법을 기반으로 종합과학 기술 심의회를 만들어 과학기술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하였다. 과학기술 관련사업은 범부처적인 것이 많아 부처간 토론이 자주 벌어지곤 하였는데 저마다 주무부서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서니 결론이 날 리가 없다. 그래서 종합과학기술심의회를 만들어 이 회의를 국무총리가 주재하고, 중요한 과학기술문제는 토의에 부칠 것이 아니라 과기처가 제의하고 전부처가 이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대덕 연구학원도시의 건설, 장기인력 수급계획 등은 이 회의의 심의 대상이었다. 혹자는 이 회의가 자주 열리지 않았다고 하나 그것은 이 회의의 성격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내가 장관으로 있을 때는 필요할 때 반드시 열리곤 했다.

여러 기관을 만들고 연구학원도시를 건설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를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법적인 뒷받침이 필요하였다.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준다든가, 인력개발을 위해 제도적으로 지원체제를 만들고 이것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을 명문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취지 아래 입법화된 것이 기술개발촉진법 기술용역육성법 국가기술자격법 연구기관육성관계법 등이다.

과학기술발전의 성패는 인력양성에 있다. 취임직후 나는 인력개발15년계획을 마련하였다. 이 계획에는 우리나라 공업화를 위해 과학기술인력이 1986년에 2백50만명 정도 필요하다고 추정되었는데 두뇌에 해당하는 학자는 5%면 족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10~15%는 현장기술자와 반장급 기능사였고, 나머지 80~85%는 각종 기능인력이었다.

공업화추진에 있어 두뇌도 중요하지만 두뇌의 손과 발이 되어 일을 수행할 기능사 역시 없으면 안될 사람들이었다. 현대조선소와 같은 곳에서는 용접공이 당장 필요해 사내 부설훈련소를 만들어 여기에서 단기훈련을 시켰다. 아직은 고급기능이 필요없던 초창기라 그런 임시방편이 통했지만, 조금만 더 산업이 발전하면 엄청나게 많은 기능인력이 필요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학자는 너나없이 존중하는 풍토지만 기술자들에 대해서는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풍토에서 능력있는 기술자와 기능인력이 배출될 수 없다고 판단, 이런 풍토를 바꿀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심하였다. 이런 생각끝에 나온 것이 국가기술자격법이었다.

이 법의 목적은 기능인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있었다. 학문하는 사람의 최고봉이 교수라면 현장기술의 최고봉은 기술사, 기능사의 최고봉은 기능장이라 할 수 있다. 기능장은 사회적으로 교수나 기술사와 맞먹는 지위를 누리고 공장장이나 사장까지 오를 수 있도록 국가기술자격법에 명문화하였다.

국가기술자격법에는 학력에 관계없이 어떠한 기능에 숙달되면 최고의 사회적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규정했다. 구체적으로 특정한 기능계통에서 기능사 2급시험에 합격하면 병역을 면제해 준다는 조항이 있다. 병역면제란 당시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특혜였다.

국방의 의무가 어느 때보다 강조되던 시절에 병역을 면제해 준다는 것은 아주 큰 일이었다. 병역특혜 조항때문에 훈련소나 공업학교에 있는 학생들이 방학때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현상이 벌어졌다. 한시간이라도 더 연습해서 2급자격을 따야겠다는 일념에서. 그런 덕분인지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기능올림픽에서 선두를 놓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기능사 1급이 되면 기능대학으로 갈 수 있도록 하였다. 기능대학을 졸업하고 7년의 실무를 거치면 기능자의 최고봉인 기능장이 된다. 이것은 독일의 '마이스터'(meister)에 해당하는 것이다.

기능대학 설립에는 반대가 무척 많았다. "기능공들이 무슨 대학을 갑니까?" "기능공들이 다니는 학교를 정규대학과 같은 급으로 대우를 해 준다고요?" 문교부에서는 훈련소라는 명칭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며 적극 반대하였다. 아마 내가 교수출신이 아니었으면 대학에서 반대데모도 일어났을 것이다. 할수없이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어렵게 살아온 박대통령은 즉각 찬성했다. 그는 문교부장관을 불러 추진하도록 지시하였다. 문교부장관은 여전히 반대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자 박대통령은 "그러면 과기처 소속으로 하여 과기처에서 기능대학을 관장하도록 하시오"라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과학기술처는 과학원과 기능대학의 설립이란 두가지 편법을 얻어내게 되었다.

과기처 산하에 기능대학을 두는 것은 기능사들로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과학기술을 담당하는 주무부처 소속으로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렇게 어렵게 설립된 기능대학이 지금은 노동부 관할로 되어 본래의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한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기능인력에 대한 우대는 다른 방식으로도 진행되었다. 기능상을 제정한 것이다. 이전에 '과학의 날'에 주는 대통령상은 으레 학자들에게 돌아가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상을 과학상 기술상 기능상 세 분야로 나눈 것이다. 기능사가 교수와 나란히 국가에서 제정한 최고의 상을 받게된 것이다. 평생을 기계보수에만 매달려온 60대의 한 노인 은 교수와 나란히 기능상을 수상하고 그만 수상식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금전적인 보수보다도 기능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것이 중요했다.
 

창원기능대학 현관에 걸린 단원 김홍도의 그림. 조선시대 장인정신이 깃든 대장간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폴리에스터필름기술 공방

나라에서 연구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술을 사용하는 곳은 기업인 만큼 기업이 직접 산업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을 해주어야 했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 72년에 제정된 기술 개발촉진법이다.

민간기업이 자주적으로 기술개발에 열을 올릴 수 있는 각종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하나가 기업에서 투자하는 연구개발비용 일체에 대해 면세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금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기술개발촉진을 위해 유럽식의 연구조합제도를 도입하였다. 연구조합제도란 기본기술을 개발하고자 하는 업체끼리 조합을 형성하고 조합비를 내서 공동으로 연구하는 것인데 이 경우 정부에서는 그 개발비용의 50~70%를 지원하는 제도다.

산업기술을 개발한 후 이 기술을 상품화를 하려고 하는데 자금이 없을 경우, 여기에 들어가는 시설비 80%를 정부에서 정기저리로 융자해줄 뿐아니라 그 시설을 완전히 국산화할 때는 세금면제 특혜를 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기술개발을 하고 나면 외국에서는 이것을 무용지물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국내에서 개발된 기술을 보호하려고 '국내에서 개발된 기술을 상품화를 하는 업종에 대해서는 그 기업이 수지가 맞는 수준까지 일절 유사한 제품을 수입할 수 없고, 유사한 기술을 도입할 수 없다'는 조항을 명시하였다.

기술개발촉진법으로 말미암아 몇몇 국내업체들과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삼성과 선경에서 70년대 중반 비디오테이프를 생산 할 계획으로 외국에서 그 중간재인 폴리에스터필름을 만드는 기술을 들여오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폴리에스터필름 기술을 가진 영국의 ICI와 미국의 스리엠 듀폰에서 다른 곳에 기술을 제공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 도레이사는 이 기술을 오래전에 이전받아 필름을 양산하고 있었다. 일본과 관계가 두터웠던 삼성에서 도레이와 기술이전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도레이가 엄청난 로열티를 요구하여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선경의 최종현회장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찾아와 필름개발을 부탁하였다. 마침 최남석 박사(현 럭키중앙연구소 소장)가 그 필름을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 선경의 지원으로 1년후 그 연구는 성공하였다. 중간재를 만들어내기는 하였지만 필름으로 만들어내려면 생산장치가 필요했는데 국내에서 마련 할 수 없어 선경은 일본 도시바에 이것을 의뢰하였다.

도시바와 자매회사였던 도레이에서는 한국에서 폴리에스터필름을 만들었다는 사실과 그 제품의 질이 우수하다는 것을 알고는 부랴부랴 삼성과 다시 접촉하였다. 이번에는 로열티 없이 거저 주겠다는 것이었다. 값비싼 기술을 그냥 주겠다고 하니 삼성에서야 대환영이었다. 삼성에서는 즉시 경제기획원 상공부에 기술도입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기처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삼성의 담당회사 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 동생과 중학교를 같이 나온 터라 잘 아는 처지였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전 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한번만 허락해 주시지요." "자네 얼굴을 봐서야 해주고 싶지만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 그렇게는 안되네. 국내에서 애써 개발한 기술을 그냥 사장 시켜 버리자는 말인가?"

삼성이라 하면 한국 최대의 재벌인데 일개 과기처장관이 가로막고 버티니 사회적으로 크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때의 일은 동아일보 풍자만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즈음 대통령 수석비서관으로부터 과기처차관에게 연락이 왔다. "염려말고 소신대로 일을 진행시키세요."

결국 삼성의 기술도입은 수포로 돌아갔고 우리가 개발한 기술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후에 최종현 회장은 최남석 박사의 노고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10억원을 연구소에 기증하였다.

"남의 돈과 기술만 빌릴 수는 없다"

기술용역육성법 제정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우리가 공장을 세우려면 비용의 15%가 기술용역비로 그냥 나갔다. 게다가 외국자본과 외국기술자들에 의해서 공장이 건설될 경우 우리는 그저 그들이 하는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기술자립을 하려면 우리가 기본설계에서 상세설계까지 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기술자는 양성해 놓았는데 계속 외국인만 고집할 경우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래서 기술용역육성법을 만들어 어떠한 기술용역도 주계약자는 한국인으로 할 것, 그리고 일의 필요에 따라 외국인을 참여시킬 것 등을 규정하였다. 육성법이 경제장관회의에서 토의되자 태완선 부총리가 나를 불렀다.

"최장관, 우린 지금 돈을 빌려야 경제가 돌아가는데 이 법 때문에 돈을 안주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부총리님, 우리가 언제까지 남의 돈만 빌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기술적으로 자립하여 경제적으로도 자립해야 할 것 아닙니까." 결국 외국 용역회사는 우리 기술용역회사와 합작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연구개발 기반구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이다. 이 법은 1973년에 제정되었다. 그 특징은 설립되는 기관의 형태를 재단법인체로 하고 제정적인 지원은 정부 출연금으로 하되 그 운영의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데 있다. 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많은 전문연구소들이 탄생되어 우리나 라 기술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행정전산망 핑계로 설립한 정보산업국

제도, 법령구축과 함께 여기서 언급해둘 것이 하나 있다. 과학기술 기반구축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정보산업육성이 그것이다. 72년 나는 미국 일본 등을 다니면서 우리가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기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유럽의 3백년 과학기술전통이나 미국의 2백년 기술전통을 불과 몇년의 경험으로 따라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지식이라면 어느날 문득 천재가 나타나 하루아침에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기술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던 중 소프트웨어산업은 아직 그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우리도 힘을 내면 따라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스템 개발, 컴퓨터이용기술, 정보처리 등의 정보 산업은 잘 훈련된 우리나라 과학기술 인력으로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3년경 이 생각을 구체화하였다. 우선 이 계획을 전담할 부서를 만들려고 총무처와 의논하였다. 총무처장관에게 정보산업 육성을 전담할 부서로 정보산업국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최장관, 지금 정부에서는 기구를 축소하라고 난린데 어떻게 또 기구를 만들겠다는 거요?" 대뜸 난색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다시 대통령 비서관에게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난 정보산업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으니 최장관이 알아서 하시오"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차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행정처리가 매우 복잡해져서 대통령이 그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그래서 75년 초도순시를 대비해 성기수박사에게 간단한 행정전산화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제시하였다. 초도순시때 프로그램을 대통령께 보여주고는 이렇게 건의하였다.

"행정을 기계화하려면 전산화가 필요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행정전산화를 위한 시범 프로그램입니다. 전산화는 총무처부터 해야 합니다."

"그래요 그럼 한번 추진해 보시오"

그 다음날 총무처순시때 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통령은 총무처장관에게 이렇게 말한 모양이다. "행정을 간소화하는 기계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까? 모르면 당장 과기처장관에게 가서 물어보시오" 그래서 달려온 총무처장관에게 과기처 중앙전자계산소를 총무처로 이관해 줄터이니 이것을 활용하여 행정전산화를 시작하자고 제의하고 이러한 일을 위하여 정보산업국 설치가 필요하다고 재차 제안했더니 이번에는 두말하지 않고 동의하는 것이었다.

신설 정보산업국장은 일방행정관리가 아니라 컴퓨터와 시스템을 잘 아는 대학교수가 적격이라고 생각해 고대 화공과 교수로 있던 김영욱 박사(현 생산기술연구원 원장)을 임명하고, 김박사를 중심으로 하여 장기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컴퓨터의 활용, 코드제정, 전문가 훈련방안 등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정보산업국에 크게 도움을 주었던 이들은 미국 학술원에서 파견된 유명한 교수들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보산업국은 80년 들어 기구가 축소되면서 그동안의 사업을 거의 중단하였다. 우리 과학기술 선진화의 가능성을 여기에 걸었던 나로서는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정보산업국을 만들던 당시 일본에도 통산성에 전산 기계과 정도만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우리보다도 훨씬 늦게 시작한 대만이 오히려 우리보다 정보산업에서 한참 앞서고 있으니 더욱 안타깝다.

81년 초에 내가 대만을 방문했을 때 이국정 박사의 간곡한 부탁으로 정보산업개발지침에 대한 강연을 한 일이 있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물리과 출신의 과학자인데 대만의 경제장관, 재무장관을 역임한 유능한 인물로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때도 나를 찾아와 자세히 일아간 일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메모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정부산업에 대한 나의 소신을 듣고 무임소장관이던 그는 만사 제쳐놓고 대만의 정보산업 육성에 전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과학재단을 만들다

기술은 지식과 달리 철저한 모방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지만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개량을 하려고 하면 창의력이 필요하다. 이 창의력을 발전시키려면 기초과학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장관 재임시절 예전 친구였던 동료교수들은 나를 찾아올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당신이 무슨 과기처장관이오. 기술처장관이지. 기초연구비 지원은 그다지 많이 하지도 않는데." 한편 현장에 있던 후배들은 "선배님이 어떻게 과기처장관입니까? 과학처장관이지요. 매일 교수분들하고나 어울리는데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두 의견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나 역시 공학이지만 기초연구에 종사하던 사람이라 기초연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하지만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데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다. 과기처장관 5년째로 접어들고 보니 그만두기 전에 기초연구를 강화하는 방안, 특히 대학의 연구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마련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계획한 것이 과학재단의 설립이다.

대통령 초도순시때 이러한 제안을 여러차례 했지만 확답을 받지 못해 초조한 나머지 미국대사 슈나이더를 찾아가게 되었다.

"당신이 정말 우리나라를 도와주려고 생각한다면 대학연구를 제대로 하게 해주시오 미국과 이스라엘이 하고 있는 것처럼 양국이 공동으로 과학재단을 설립하도록 도와주시오."

"그렇게야 생각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는 미국 학술원의 도움을 받아 타당성 조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이 조사에 참가했던 미국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명칭을 과학재단이라고 하지 말고 과학기술재단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과학재단'이라 고집한 것은 이제 우리도 기초과학육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고 싶어서였다. 이 타당성 조사를 바탕으로 민관식 문교부장관을 찾아가서 그 필요성을 설득하여 겨우 문교부에 예산신청을 하게 되었지만 예산조정에서 즉각 삭감당하고 말았다.

민장관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유기춘장관이 취임하였다. 나는 유장관에게 다시 부탁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취지를 설명하자 "저는 지금 대학에서 일어나는 데모를 막느라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제발 최선배가 대신 좀 해 주십시오"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경제기획원장관에게로 갔다. 계속 찾아다니며 귀찮게 하니까 "그럼 우선 법이나 만들어 놓읍시다. 예산에 대해서는 나도 자신 못하겠고 그건 이후에나 생각해 봅시다."

그해 말에 법초안을 만들어 국회에 상정하고는 국제원자력기구 회의가 있어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회의에서 돌아오자 경제기획원장관이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잘 되었습니다. 과학재단을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기획원에서 나온 예산이 겨우 3억5천만원이었다. 이 돈을 가지고 어떻게 운영하라는건가 고민하던 차에 다시 대통령으로부터 10억원의 기금이 왔다. 해외에서 유치하는 과학자들의 주택마련에 필요한 기금에 보태쓰라는 명목으로 보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출범한 과학재단 초대이사장으로 내가 부임하게 되었다. 대학의 연구비 지원, 대학원생의 연구장학금 지원을 기본사업으로 하는 재단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다. 당시 대학에 지급되는 연구비는 교수의 연공서열에 따라 지출되어 정작 연구를 하는 젊은 연구원들에게는 제대로 지급되고 있지 못했다. 더구나 대학원생들에게는 장학금만 지급되고 연구비는 지급되고 있지 않아서 교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부임 후 나는 연구비 지급원칙, 학술활동 지원에 대한 관행을 체계화하는데 힘썼다. 현재 과학재단은 기금 1천1백20억원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연구학술지원기구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초과학육성을 위해 77년 한국과학재단이 설립됐다. 사진은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과학재단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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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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