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드론을 띄우고, 프로그램 하나로 단백질의 구조를 예측하는 세상입니다. 첨단과학기술이 SF 소설 속 세계를 차근차근 이룩하고 있습니다. 한편 첨단과학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중 기자가 과학기술의 한계를 가장 절감하는 곳은, 다름 아닌 화장실입니다.
다급히 들어가 ‘일’을 해결하고 보니 휴지 걸이에 앙상한 휴지심만 남아있는 광경. 이 순간 1m2 남짓한 작은 땅 위에 홀로 놓인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인류는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극한 상황 속 대처방안은 선사시대 조상님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죠. 적당한 나뭇잎을 고민했을 그들과 양말 또는 휴지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우리는 닮았습니다.
이런 한계를 넘어설 기술은 모두의 염원인가 봅니다. ‘충전식 휴지’라는 설명과 함께 움짤(짧은 영상) 하나가 인터넷을 떠돌고 있습니다. “문과가 아이디어를 내도 이과가 일을 안 한다”는 댓글이 어김없이 등장해 도발하는군요. 좋습니다, 이과가 한번 일해보겠습니다.
1해봤습니다: 에너지를 질량으로 바꾸는 매직?
우선 움짤을 살펴봅시다. 휴지심에 전기 코드가 연결돼 있고, 이 코드가 콘센트에 꽂혀있네요. 잠시 기다리자 둘레에 휴지가 두툼하게 생겨납니다. 마치 휴지가 전기로 충전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전기만 공급했을 뿐인데 질량을 가진 물체가 생겨난다니요. 정신이 아득해지던 와중, 아인슈타인이 귓가에 속삭였습니다. “E=mc2”
사실 전기 에너지를 질량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수식, E=mc2는 질량에 빛의 속도를 제곱한 값을 곱하면 에너지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질량과 에너지는 서로 변환될 수 있는 관계라는 겁니다. 이걸 ‘질량-에너지 등가원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휴지 한 통의 질량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전기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제품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의 무게는 대략 150g 정도입니다. 150g은 약 37억 kWh(킬로와트시·1kW의 전력을 1시간 생산한 전력량)의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습니다.
37억 kWh라 하면 감이 잘 안 오는데요, 과학동아 편집실에서 사용하는 냉장고(용량 160L) 한 대를 한 달 동안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은 30.6kWh입니다. 이걸 1년간 사용하면 전기요금은 5만 9000원이 나오죠. 단순히 계산해보면 휴지 한 통을 충전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냉장고 1000만 대를 일 년간 사용할 때 필요한 에너지와 맞먹습니다. 전기요금은 5900억 원 정도 나오겠네요. 그냥… 휴지를 사시는 편이….
2런 방법도 있습니다: 고오급 가죽 휴지로 우아하게 닦자
조금 더 저렴하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우아함도 놓치지 않을 겁니다. 휴지심에서 가죽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이미 상용화되기도 했죠. 바로 ‘버섯 가죽’입니다. 최근 비거니즘이 식생활을 벗어나 패션, 화장품 등 생활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버섯 가죽은 버섯의 영양기관인 균사체를 가공해 가죽 형태로 만든 겁니다. 동물을 죽이지 않고도 가죽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죠. 벌써 버섯 가죽으로 만든 아디다스 운동화, 에르메스 핸드백 등 다양한 제품이 공개됐습니다.
다 쓴 휴지심 위에서 버섯 균사체를 키운다면 어떨까요. 류재산 국립한국농수산대 버섯학과 교수는 “종이도 버섯이 이용할 수 있는 유기물”이라고 했습니다. 나무를 원료로 만드는 종이의 주성분은 셀룰로오스입니다. 버섯이 효율적으로 분해해 탄소 공급원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물질이죠. 류 교수는 “실제로 신문지나 폐지 등으로 버섯을 재배하는 곳도 있다”고 했습니다.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 버섯이 자랄 최적의 생장 환경도 만들 수 있습니다. 류 교수는 “균사체가 자라는 배양 과정에는 보통 20℃ 내외의 온도와 60~70%의 상대습도가 적당하다”며 “농가에서는 가습기를 이용해 습도를 맞춘다”고 설명했습니다.
냉장고 1000만 대를 가동하는 것에 비하면 가습기 정도야 껌이죠. 휴지심에서 버섯을 키우고, 균사체를 수확해 가공하면, 손쉽게(?) 버섯 가죽 휴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단 휴지심 속 셀룰로오스의 양에도 한계가 있으니 가끔 휴지심을 교체해줘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