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지금부터 촬영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치 내가 BTS 멤버가 됐다고 생각하고 가장 멋있는 포즈를 취해주세요.”
11월 5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SK-T타워 1층. 초록색 장막(그린 스크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방의 중심에 서자 마이크를 통해 임국찬 SK텔레콤 점프스튜디오 선임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3분 남짓 촬영을 마친 후, 임 선임매니저는 “현실과 가상을 잇는 혼합현실(MR) 콘텐츠 제작의 시작을 체험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을 가상에 옮겨 담다
점프스튜디오는 SK텔레콤에서 운영하는 MR 콘텐츠 제작 시설이다. 지난해 4월 개관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볼류메트릭 캡처’ 기술이 적용된 아시아 최초의 MR 스튜디오로 개관 당시부터 화제를 모았다.
MR은 가상공간에 현실의 물체를 옮겨놓거나 현실 속에 가상의 물체를 구현해내는 기술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상공간 속 현실의 물체는 MR뿐만 아니라 메타버스 등 가상 콘텐츠로 옮겨갈 수도 있다. 볼류메트릭 캡처는 MR을 구현하기 위해 인물이나 사물을 4K 해상도로 촬영한 사진을 3D로 합성해 현실과 같은 수준의 외형을 디지털화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이날 기자를 3D 영상으로 촬영한 스튜디오에는 총 106대의 카메라가 360도로 배치돼 있다. 이 가운데 절반은 일반 광학카메라이고, 나머지 절반은 적외선 카메라다. 카메라는 8개 방향에 배치돼 있으며, 한 쌍씩 짝을 지어 사진을 찍는다. 마치 사람의 두 눈으로 대상을 보는 것처럼 공간감을 인식한다. 광학카메라로는 인식하기 어려운 표면의 세밀한 주름이나 움직임은 적외선 카메라의 도움을 받는다.
촬영 후 30분가량이 지났다. 작업실에 있는 컴퓨터 화면에는 기자의 모습이 3D로 그려졌다. 기자의 얼굴은 물론 옷의 색감과 구겨짐까지 구현된 아바타였다. 디지털 공간에 기자의 쌍둥이가 탄생한 것이다.
3D 영상 콘텐츠가 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3D 영상은 2차 가공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영상 콘텐츠로 재탄생된다. 특히 우리가 보존해야 할 문화나 유명인들의 모습을 가상의 공간에 그대로 표현할 때 유용하다.
그간 점프스튜디오에서 탄생한 MR 영상 콘텐츠는 십수 개에 달한다. 대표작 중 하나는 ‘태평하기를’이라는 제목으로 문화재청과 협력해 만든 무용 영상이다. 방송안무가 리아킴이 출연한 영상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보유자인 양성옥 명인의 춤사위를 점프스튜디오에서 촬영해 다양한 구도로 합성했다. 덕분에 일반적인 기법으로 촬영된 영상에서는 볼 수 없는 다채로운 구도를 구현해 보는 재미를 더해낼 수 있었다. 우리 문화재인 태평무의 춤사위를 세세하게 묘사해낸 것은 물론이다.
임 선임매니저는 “볼류메트릭 캡처는 광학 촬영 기반의 기술인 만큼 손끝의 움직임까지 디지털화할 수 있어, 앞으로는 무형문화재를 디지털로 보존하는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데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그룹 BTS도 점프스튜디오를 거쳐갔다. BTS와 영국의 밴드 콜드플레이가 함께 만든 곡 ‘마이 유니버스(My Universe)’의 뮤직비디오 촬영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임 선임매니저는 “애초에 BTS와 콜드플레이가 직접 만나서 해당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계획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이들이 한곳에 모일 수 없게 됐다”며 “점프스튜디오에서 각 멤버의 모습을 촬영해 영국으로 보냈고, 디지털 공간에서 콜드플레이와 만나 뮤직비디오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다양한 구도로 색다른 영상미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3D 캡쳐 기술의 정수는 아니다. 3D 홀로그램과 메타버스의 구현 등 차세대 콘텐츠로의 전환이 이뤄진다면 3D 캡처 기술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진다. 가령 인기 가수의 공연을 3D로 촬영해 홀로그램이나 메타버스로 구현하면 콘서트 현장에 가지 않고도 현장에서 보듯 즐길 수 있는 실감형 콘텐츠로 재탄생시킬 수 있다. 다만 3D 홀로그램 기기 개발, 메타버스 환경 구현 등 선행돼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임 선임매니저는 “앞으로 가상공간에서 3D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하드웨어가 보급되기 시작하면 영상 콘텐츠의 패러다임이 급격히 바뀔 수 있다”며 “이곳이 현실과 가상공간을 잇는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