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자동차 보급이 늘면서 가장 큰 약점으로 지목돼 온 배터리 폭발 사고를 해결할 기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반도체 기술을 이용해 배터리 화재 위험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국내 연구가 주목 받고 있다. 이 연구를 주도한 연구자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랸다 엥가르 아누그라 아르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청정신기술연구소 에너지저장연구단 학생연구원. 5월 10일 서울 성북구 KIST에서 그를 만났다.
랸다 엥가르 아누그라 아르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학생연구원은 인도네시아국립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2016년 2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에 입학해 KIST 청정신기술연구소 에너지저장연구단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속담이 있듯이, 학자를 꿈꾸던 엥가르 연구원의 주변에는 늘 그를 돕는 조력자가 있었다. 수학과 물리학 강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의 첫 번째 조력자였다. 엥가르 연구원은 “아버지는 최고의 과학기술을 배워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라고 말했다.
아버지 뜻에 따라 기술 발전이 뛰어난 일본, 독일 유학을 꿈꾸던 그는 앞서 UST-KIST 박사과정 프로그램을 마친 뒤 인도네시아국립대에 재직하고 있던 카이룰 후다야 교수 추천으로 한국 UST를 선택했다. 후다야 교수 또한 인도네시아 출신으로 지난해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인도네시아 숨바와기술대 총장으로 임용되며 인도네시아 과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다.
엥가르 연구원은 “한국 대학과 연구기관의 선진적인 모습을 접하고 그길로 한국 유학을 결정했다”라며 “모든 학생이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국책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는 UST의 독특한 교육 시스템에 특히 이끌렸다”고 밝혔다.
한국에 온 그는 태양광 등 친환경 에너지 변환 기술과 흔히 배터리(이차전지)라 불리는 에너지 저장장치를 개발하는 KIST 에너지저장연구단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새로운 조력자이자 스승을 만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잡았다. KIST 에너지소재 공정연구실장이기도 한 이중기 UST-KIST 스쿨 교수는 엥가르 연구원의 지도교수를 맡아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반도체 접목해 전기차 배터리 화재 막는다
이런 배경에서 엥가르 연구원은 최근에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 대학에서 세부 전공으로 응집물리학을 공부했던 그는 배터리 연구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전자 장치에 쓰이는 반도체를 이용해서 리튬이온배터리의 화재 원인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휴대폰, 노트북 등 우리가 사용하는 소형 전자제품 배터리의 음극 소재로는 흑연이 주로 쓰인다. 흑연은 안정적이지만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 용량이 매우 작다. 더 높은 에너지효율을 갖는 이차전지를 개발하기 위한 소재로 리튬금속이 꼽힌다. 이를 이용하면 흑연보다 약 10배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
하지만 리튬금속은 미세한 결정을 형성해 화재를 유발한다는 단점이 있다. 금속 표면은 매끄럽지 않고 미세하게 요철이 있어 전류를 흘리면 튀어나온 곳에 전자가 몰린다. 피뢰침에 벼락이 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전자를 따라 리튬이온도 몰려들고 그 결과 리튬 결정체인 덴드라이트가 형성된다. 덴드라이트는 자라면서 전지 양극의 분리막을 뚫고 전극과 전해질 사이의 반응을 일으킨다. 이는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의 원인이 된다.
엥가르 연구원은 금속과 이온의 접촉을 막는 반도체 박막으로 덴드라이트 형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을 찾았다. 플라스마 중합기술을 이용해 개발한 반도체 박막을 리튬금속 전극 표면에 씌워 전자가 통과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자 반도체 계면을 제외한 어느곳에서도 전자와 이온이 만나지 못해 덴드라이트가 형성되지 않았다.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ACS 에너지 레터스’ 3월 23일자에 실렸다. doi: 10.1021/acsenergylett.1c00150 엥가르 연구원은 “이 기술을 전기자동차와 같은 첨단기술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임연구원은 “물리학 이론을 접목한 엥가르 연구원의 핵심 아이디어로 의미 있는 연구결과를 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최근 그는 태양전지와 이차전지가 결합한 섬유 형태의 에너지 저장장치를 연구하고 있다. 옷으로 만들어 군사용, 산업용으로 널리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 8월 졸업을 앞두고 있는 그는 “UST에서 연구하는 동안 외국인으로 어떤 불이익도 받은 적 없다”라며 “UST에는 학생 상담 시설이 갖춰져 있어 동료나 교수에게 차별적 대우를 받으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UST 외국인 학생 비율은 약 33.7%이며, 박사과정 중인 외국인 학생 수는 한국인 수와 비슷하다.
그는 “졸업 후에도 에너지 저장장치 재료 개발 분야를 연구할 것”이라며 “한국이나 미국 등 과학 선진국에서 신진 기술을 섭렵해 인도네시아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유익한 연구를 하는 게 꿈”이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