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월 만입니다. 긱블의 살아있는 화석이자 전자파트의 심장 민바크 님의 단독 샷으로 기사의 포문을 연 게 말이죠. 마지막이 지난해 6월호에 실린 나비보벳따우 연주기였던가요. 지난 두 달 연속으로 전자파트 신예인 키쿠 님의 활약이 기사로 소개된 게 자극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쨌든 오랜만에 민바크 님이 들고나온 작품이라니 두근두근 설렙니다.
어떤 작품을 만들 건지 묻자 대뜸 영상을 하나 보여줍니다. 영상을 틀자 요상한 전자음부터 들려옵니다.
‘비이유우우우웅, 쿰칫쿰칫쿰칫 탁!’
이 전자음을 만드는 두 연주자의 양손에는 모두 바코드 스캐너가 들려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스캐너입니다. 두 연주자는 스캐너를 여러 모양의 바코드에 이리저리 갖다 대고 있습니다. 막대 간격이 촘촘한 것, 반대로 널찍이 떨어져 있는 것도 있고, 동심원 모양, 방사형 모양 등 스무 가지가 넘는 바코드가 사람 키만큼 큰 종이에 그려져 있습니다. 두 연주자가 스캐너를 어떤 모양의 바코드에 가져다 대는지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나는데요. 연신 손을 휘저으며 여기저기서 스캐너를 작동하니 정말 하나의 전자음악과 같이 들립니다.
민바크 님은 이걸 따라 만들어 볼 심산입니다. 별다른 제작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일단 바코드 스캐너를 뜯어보겠다고 합니다.
전위의 기준, 그라운드를 찾아라
바코드 스캐너를 샀습니다. 일렬로 배열된 바코드를 읽는 스캐너는 크게 레이저 방식과 CCD 방식이 있습니다. 레이저 방식은 적외선 레이저를 발사했을 때 반사되는 빛의 양을 측정해 바코드 모양을 구별합니다. 적외선 레이저는 흰색에 반사되고 검은색에 흡수돼서, 바코드 모양에 따라 반사되는 빛의 패턴 역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반면 CCD 방식은 카메라처럼 바코드를 촬영한 뒤 그 이미지를 분석해 코드 정보를 추출합니다. 이 중 민바크 님은 레이저 방식의 스캐너를 택했습니다. 영상에서 본 스캐너는 빛의 흡수량에 따라 달라지는 주파수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바크 님은 이 레이저 바코드 스캐너를 한 개에 거의 8만 원을 주고 샀다고 합니다. 같은 상품을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봤습니다. 5만 9000원에도 팔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2만 원 바가지 썼습니다(전자밖에 모르는 바보).
바로 분해 들어갑니다.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는 인쇄회로기판(PCB·printed circuit board) 하나만 덜렁 있습니다. 분해했지만 이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연구해보겠다”고 말하는 민바크 님을 믿어보겠습니다.
영상에서 본 바코드 스캐너와 일반 스캐너의 차이점은 소리였습니다.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스캐너에서는 어떤 바코드를 찍든 ‘삑’ 하는 일정한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연주자의 손에 있는 스캐너는 여러 가지 소리를 내죠. 영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민바크 님은 이 차이를 만드는 전선 하나를 포착해냈습니다. 연주자의 바코드 스캐너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선이 연결돼 있었는데요. 하나는 전원을 공급하는 기본적인 선인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스캐너 케이스의 손바닥을 얹는 부분에 구멍이 뚫려있고, 이 구멍을 통해 안으로 연결된 선입니다.
이 선이 어디에 연결돼 있을까 한참을 고민해봅니다. 스캐너 안에는 인쇄회로기판 하나뿐이니 분명 이 기판 위에 연결됐을 겁니다. 기판 위에는 수백 개의 납땜 지점이 있습니다. 이중 범인이 있습니다. 범인은 바코드의 모양에 따라 다른 형태의 신호를 발생시킬 겁니다.
일단 그라운드(GND)부터 찾아봅시다. 그라운드는 일종의 전기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정확한 크기를 재거나 비교할 때는 통일된 기준점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산의 높이는 해수면을 기준으로 재기 때문에 전 세계의 모든 산의 높낮이를 비교하는 게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회로에도 기판 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전위에 대해 기준이 되는 0V 지점이 있는데 이게 바로 그라운드입니다.
바코드 스캐너 개발자가 심어놓은 그라운드를 민바크 님이 찾아내야 합니다. 그라운드는 전압계로 찾을 수 있습니다. 민바크 님이 전압계의 두 전선 끝을 기판 위에 대봅니다. 대충 이쯤이 그라운드일 것 같아서 대봤는데 단번에 연결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자파트의 심장답습니다.
바코드 모양 따라 오르내리는 전압
정말 중요한 범인을 찾을 차례입니다. 수백 개의 납땜 지점 어딘가에는 바코드 모양에 따라 유독 다른 신호를 내는 지점이 있을 겁니다. 민바크 님이 오랜만에 오실로스코프를 꺼냈습니다. 오실로스코프는 전압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장비입니다. 꿀렁꿀렁이는 전압 변화가 그대로 화면에 나타나죠. 납땜 지점 하나하나에 오실로스코프를 청진기처럼 대보면서 바코드 모양에 따라 전압도 변하는지 살펴봅니다.
그런데 이게 영 판단하기 애매합니다. 살짝 꿀렁이는 게 제대로 된 신호인지 아니면 잡음인지, 또 바코드 모양에 맞게 바뀌고 있는 건지 헷갈립니다. 수백 개의 납땜을 일일이 진단할 생각을 하니 막막합니다.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전자회로에 조예가 깊은 (아직 긱블 채널에도 미공개된) 신입 긱블러 수드래곤 님을 모셔옵니다. 수드래곤 님은 화타에 빙의한 듯 인쇄회로기판을 슥 쳐다보곤 오실로스코프를 이리저리 대봅니다.
“여기인 것 같은데요.”
오실로스코프 화면에는 굵게 물결이 그려져 있고, 중간중간 전압이 급격히 오르내리는 구간이 있습니다. 이 오르내리는 횟수나 간격이 바코드 패턴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정말 맞는지 소리로 확인해봅시다. 우선 수드래곤 님이 발견한 지점과 민바크 님이 발견한 그라운드에 각각 전선을 연결해줍니다. 납땜이 필요합니다. 민바크 님의 눈이 반짝입니다. 그라운드는 비교적 커서 깔끔하게 납땜이 됐습니다. 신호가 발생한 지점을 납땜할 차례인데, 민바크 님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크기도 매우 작을뿐더러, 그 주변으로 다른 납땜 지점들이 촘촘히 박혀있습니다. 까딱하면 여러 지점을 납땜으로 덮어서 합선될 수 있습니다. 매우 민감한 작업이라는 걸 여러 번 강조합니다. 유튜브에 올라갈 영상을 찍어야 하는데 촬영까지 거부합니다.
혼자만의 시공간에서 정교하게 납땜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오실로스코프 화면에는 온갖 잡음과 알 수 없는 전압 변화가 감지됩니다. 옆에 있던 전자파트 신예 키쿠 님이 답답하다며 깐족댑니다. 전자파트의 심장은 화가 치솟지만 인자하게 자리를 양보합니다. 키쿠 님이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납땜해 봅니다. 역시나 실패합니다.
민바크 님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자리를 차지합니다. 몇 초간의 정적, 아무 말 없이 오실로스코프로 검사해봅니다. 바코드 모양에 따라 전압이 선명히 변합니다. 성공입니다. 이로써 신호선과 그라운드선을 완성했습니다. 또 다른 바코드 스캐너 하나에도 같은 작업을 해서 총 2개를 마련했습니다.
이를 오디오 단자에 연결해줍시다. 3극 단자를 준비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오디오 단자는 3극과 4극으로 나뉩니다. 흔히 사용하는 이어폰 끝을 보면 금속이 3개 또는 4개 구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숫자를 뜻합니다. 구간마다 역할이 다릅니다. 3극 단자는 맨 끝부터 왼쪽 스피커, 오른쪽 스피커, 그라운드와 연결돼 있습니다. 만약 이어폰 앞쪽만 살짝 꼽혔다면 왼쪽 이어폰에서만 소리가 들릴 겁니다. 4극 단자는 이에 더해 마이크가 연결된 구간이 있습니다. 이어폰 중에 마이크 기능이 탑재된 단자는 4극 단자로 돼 있을 겁니다.
민바크 님이 준비한 바코드 스캐너가 2개이니 신호선도 하나씩 총 2개입니다. 그 중 하나는 왼쪽 스피커 구역, 나머지 하나는 오른쪽 스피커 구역에 연결하고, 그라운드선은 모두 그라운드 구역에 연결합니다. 스캐너를 바코드에 가져다 대자 모양에 따라 ‘쿰칫쿰칫’ 다른 소리가 납니다. 좀 더 소리를 키우기 위해 앰프에 연결해줬습니다.
이제 악보 역할을 할 바코드를 인쇄해야 합니다. 바코드 모양을 스무가지 정도는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전자밖에 모르는 바보2). 아무래도 심미적 소양이 있는 외관파트의 찬스 님이 잘 만들어 줄 것 같습니다. 부탁합니다.
악보까지 완성됐습니다. 영상에서 본 것처럼 사람 키만큼 크게 만들었습니다. 소리도 다양하게 잘 납니다. 근데 음악이라고 하기엔…. 어떻게 해야 음악처럼 들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전자밖에 모르는 바보3). 음악 유튜버 조매력 님께 부탁했습니다. 민바크 님 단독 작품인줄 알고 시작했는데 여러 명의 능력을 십시일반했습니다. 자, 그럼 조매력 님은 이 바코드 스캐너로 어떤 전자음악을 완성했을까요. 유튜브 긱블 채널에 4월 말에 업로드된 영상을 통해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