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지난해 11월 28일 경기 과천시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한 경마 경주. 출발신호와 함께 게이트가 열리고, 열두 마리의 말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그중에서 순발력이 뛰어나고, 다른 말 뒤에서 모래를 맞기 싫은 말들은 처음부터 가장 앞서기 위해 치고 나왔다. 몇몇 말은 그 뒤에 달리며 결승선 몇백m 앞에서 막판 역전을 노리기 위해 힘을 비축했다.
열두 마리 중 파란색 모자의 기수가 탄 말은 마지막 코너를 돌 때까지 꼴찌 그룹에 있길 선호하는 말이다. 보통 이런 말은 지구력이 좋아 마지막 직선주로 400m를 남겼을 때부터 젖 먹던 힘을 짜내 속도를 높인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날은 영 출발이 좋지 못했다. 말이 앞이 아닌 위로 껑충껑충 뛰는가 싶더니 어느새 꼴찌 그룹에도 못들 만큼 뒤처졌다. 가장 앞선 말과 차이가 많이 벌어지면 막판 역전극도 없다. 다급한 기수는 꼴찌 그룹에라도 들기 위해 말 오른쪽 허벅지에 연신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마지막 코너를 돌 때까지 꼴찌 그룹조차 들지 못했고, 결국 열두 마리 중 11등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경기가 끝나고 기수는 ‘채찍 과다사용’으로 제재를 받고 과태금 10만 원 처분을 받았다.
동물복지 호소에 줄어드는 채찍질
동물에게 채찍질하는 장면은 사람들에게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반려견이나 반려묘는 물론, 곰이나 코끼리, 호랑이 등 예외가 없다. 하지만 말은 조금 다르다. 말에 채찍질을 하는 모습은 별 비판이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때가 많다. 심지어 영화나 경마 경주에서는 채찍질하는 모습이 멋지게 그려지기도 한다. 말은 사람들의 여흥을 위해 공공장소에서 구타당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물론 말에게 가하는 채찍질도 잔인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 세계, 특히 경마의 인기가 높은 영국과 호주의 동물단체들은 채찍질을 금지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했다. 그래서 채찍질하지 않는(whip-free) 경주를 따로 만들거나 채찍질 규정을 강화했다. 가령 채찍을 덜 아픈 패드 채찍으로 바꾸거나, 거리당 채찍 횟수 제한을 두는 식이다.
한국마사회도 2015년에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채찍 사용을 금하는 경주마 학대 금지 조항을 신설했다. 2017년부터는 경기 중 말에게 자극이 적은 패드 채찍 사용을 의무화하고 결승선 직전 400m 구간에서 채찍 사용횟수 제한을 기존 25회에서 20회로 축소했다.
2019년부터는 규정이 더욱 강화됐다. 지정된 9개 브랜드의 채찍만 사용할 수 있고 채찍 횟수 제한이 전 구간에 적용되게 됐다. 특히 출발 후 100m지점부터 결승선 직전 400m 구간에서는 채찍을 10회 이내로 사용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리고 경기 중뿐만 아니라 새벽 훈련에서도 패드 채찍을 써야 한다.
이처럼 동물복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며 말에 대한 대우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호주의 동물복지단체가 2017년 호주 시민 153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가운데 채찍질에 찬성하는 사람은 2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여전히 충돌은 있다. 경마 종사자를 비롯해 경마에 많이 참여하는 사람들은 경주에 대한 말의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채찍질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폴 맥그리비 호주 시드니대 수의과학대 교수가 이 설문자료를 자세히 분석해본 결과 경마를 더 많이 즐기는 사람일수록 채찍질을 찬성하는 경향이 높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doi: 10.1371/journal.pone.0192843
채찍질해도 말은 똑같다
이런 가운데 경마 종사자들과 애호가들의 생각을 뒤엎을 연구가 진행됐다. 키릴리 톰슨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대 경영대 책임연구원과 필 맥마누스 호주 시드니대 지구과학대 교수 등 공동연구팀은 2017~2019년 영국에서 진행된 126건의 경마 경주를 분석했다. 67건은 채찍을 들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경주였고, 59건은 채찍질이 허용된 경주였다. 영국은 1999년부터 채찍질하지 않는 경주도 시행하고 있다.
연구팀은 126개 경주의 데이터를 면밀히 분석했다. 본래 경마 경주의 데이터는 매우 자세히 기록된다. 구간별 말의 주행 기록과 특징적인 움직임은 물론이고 주행 중 사고나 다른 말에 대한 방해 등 경주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긴다.
연구팀은 이를 십분 활용했다. 이 데이터들을 가공해 통계학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자료 분석 기법인 선형 혼합 모형 및 로지스틱 회귀 모델에 대입했다. 이 기법들은 여러 독립된 자료들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수학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도구다.
그 결과, 채찍질은 말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채찍질을 한다고 해서 기록이 더 좋아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는 2011년과 2018년 호주 시드니대 연구팀이 내놓은 결론과 동일했다.
연구팀이 처음으로 밝힌 건 채찍과 조향의 무관련성이다. 보통 동물단체에서 기록 단축을 위한 채찍질을 금지하라고 요구하면, 경마 종사자들은 기수의 안전을 위해 채찍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톰슨 책임연구원 역시 “경마 업계에서는 흔히 경주마끼리 혼선이 일어나거나 (말이 요동을 일으켜) 기수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을 들며 안전을 위해서는 채찍질이 필수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연구팀이 말끼리 충돌 및 방해가 일어난 경주(61건)와 말이나 기수가 이상행동을 보인 경주(68건, 21건)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채찍질은 말의 방향을 조종하거나 혼선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톰슨 책임연구원은 “채찍 대신 고삐를 이용하거나, 기수의 체중을 이동시켜 방향 전환을 수월히 할 수 있다”며 “경주마가 빠르고 바르게 달리도록 채찍질하는 건 말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연구결과는 동물학 및 수의학 분야 학술지 ‘애니멀’ 지난해 10월 29일자에 게재됐다. doi: 10.3390/ani10111985
동물도 사람도 채찍질은 똑같이 아프다
일부 사람들은 말과 같이 몸집이 큰 동물일수록 통증에도 강할 것으로 생각하고 더 거칠게 다룬다. 하지만 큰 동물이 통증에 강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폴 맥그리비 호주 시드니대 수의학대 교수팀은 사람과 말이 통증을 느끼는 데 차이가 없다는 연구결과를 ‘애니멀’ 지난해 11월 11일자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사람 10명과 말 20마리의 엉덩이 피부 바깥층을 현미경으로 비교 관찰했는데, 통증과 직접 연관된 표피층의 두께와 통각을 느끼는 말단 신경세포의 밀도가 거의 같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맥그리비 교수는 “말도 날아다니는 곤충이나 다른 말과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채찍질에 대해 인간만큼 고통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doi: 10.3390/ani10112094
말의 채찍질이 무용하다는 사실은 사람에게도 교훈을 준다. 흔히 교육에는 당근과 채찍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한다. 말에게 가하던 채찍이 꼭 체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엄격한 훈육과 그에 수반되는 체벌을 상징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그런데 체벌로 이뤄지는 훈육은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크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돼 있다. 미국 소아과학회는 2018년 ‘건강한 아이로 키우기 위한 효과적인 훈육’이라는 훈육지침의 개정안을 내놨다. 이 안에는 체벌로 인한 뇌 이상, 행동 이상에 대한 다수의 연구결과들이 포함돼 있다.
우리나라도 ‘자녀 징계’에 대해 62년간 정당성을 보장했던 법안이 지난해 사라졌다. 1958년부터 민법 제915조에는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었다. 지난해 10월 13일 법무부는 이 가운데 ‘필요한 징계’ 부분과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 부분을 삭제하는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이제 더 이상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채찍질은 소용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