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라면 얼핏 듣기에 그럴듯 하지만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과 유혹이 엉켜있는 특이한 전문 직업
내가 대학을 갓 입학했을 무렵에 TV연속극 중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프로가 있었다. 제목은 기억을 못하겠으나 김세윤 장미희 정윤희 정도가 주인공으로 나와 한남자와 두여자 사이의 삼각관계가 주된 스토리였던 것 같다. 극중의 남자 주인공은 '나기사'로 불리워졌는데 유수한 건설회사의 엘리트 건축설계기사가 그의 직업이었다.
지금은 반 할아버지가 된 김세원씨가 그때만 해도 청춘스타로서 두 미녀사이에서 고민하는 뭇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족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 연속극을 새삼 기억하는 것은 우리 신입생 환영회 때의 일 때문이다.
많은 선배와 교수님들 앞에서 신입생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이 건축과에 오게된 동기에 대해 나름대로 한마디씩 하고 있는 순서였다. 그중 어떤 친구가 자기는 나기사처럼 되고싶어 건축과에 왔다는 것이었다. 좌중은 모두 웃느라 뒤로 넘어지는데 이 친구는 자못 진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전은 모르겠으나 그때 이후로도 TV연속극에서 남자 주인공의 직업으로 건축설계기사는 심심치 않게 애용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런 얘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아직도 건축설계라는 직업에 대해 밖에서 보는 시각이 TV연속극 수준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즉 연속극에서는 큰 제도책상에 앉아 근사한 그림을 그리다가 아무때나 여자만나러 가고(사실 우리네 연속극 주인공들은 본직이 연애이고 자기직업은 이를 위한 간판인것 같다) 도무지 세상에서 사는 사람 같지 않게 표현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건축설계만큼 짬 안나고, 고달프기 그지없는 직업이 드물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은 졸업하고 나서도 한참뒤, 이제는 오고가도 못하게 될 무렵이다. 야근 철야작업은 이틀이 멀다하고, 그나마도 제때 받으면 다행인 박봉에, 설계 또한 자신의 창작의지대로 구현되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 건축주(설계 의뢰자)에 의해 반쯤 주물럭이 된 후에 허가관청에서 곤죽이 나면 도무지 정나미 떨어지는 낯선 작품이 되기가 십상이다.
●― 남모르는 애환―줄타기
역시 신입생 시절에 교수님이 건축과에 오기를 잘했다고 격려하신 말씀 한마디. "의사는 평생 아프다고 징징거리며 찾아오는 사람 만나야 되고 죽어가는 사람 치닥거리 해주어야 되고, 또 변호사는 평생 온갖 문제로 파김치가 된 사람들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건축가는 보라.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 이제 막 행복과 희망에 가득차 새로운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만 상대하게 되니 그 얼마나 직업치고 행복한 직업이냐?"
…사실 그런 줄만 알았다. 아니 사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웃으면서 오는 고객들을 대하는 직업이 더 골치아픈 직업이라는 데 있다. 다시말해 의사 변호사에게 오는 사람은 얼굴이 일그러져 있을지언정 자신에게 아쉬움이 있으니 의사 변호사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그들의 권위를 인정한다. 반면 건축가에게 오는 사람은 표정은 밝을지언정 아쉬움이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는 거꾸로 건축가가 마음이 급해지고 안달하게 되고 저자세가 된다.
당장 배아픈 것을 고쳐달라는 사람은 있어도 당장 집 못지어서 죽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더욱이 일 이백만원도 아니고 최소한 몇천만원, 규모에 따라 몇십 몇백억짜리 건물을 짓는데 급하게 서두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설계안을 비교 검토하고 가장 적절한 싯점을 골라 설계를 의뢰해야 좋은 결과를 얻게됨은 당연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골병이 드는 곳이 설계사무소임은 불문가지이다.
행여나하는 기대에 몇날 밤새워 수십개의 계획안을 제출해보아도 '닭쫓던 개 지붕쳐다보기'의 경우가 비일비재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설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건물로 지어져 있는 경우도 보았다는 어는 선배의 이야기도 있다.
여러 곡절 끝에 설계계약이 이루어져도 어려운 사정이 계속되기는 마찬가지다. 건축주의 마음에 들게 설계안이 수정되고 나면 건축허가관청에서 주무르는 순서가 남아 있다.
건축물은 일단 건축되면 취소할 수가 없게된다. 듣기싫은 음악은 끄면 되고 보기싫은 그림과 조각은 치우면 되지만 건물이 마음에 안든다고 마음대로 헐어낼수는 없다. 이는 건축물의 물리적인 튼튼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건축물은 곧 재산권의 반영인 것이 더 큰 이유이다.
따라서 한번 지으면 취소할 수 없는 건축물의 허가를 놓고 최대한의 재산가치를 얻으려는 건축주와 이를 제어하면서 공공적 가치를 확보하려는 공공부문측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는데 여기서도 역시 곤욕을 치르는 것은 건축가일 따름이다. 건축주로 부터는 허가를 빨리 얻어내지 못하면 무능한 건축가라는 평을 듣게되고, 그렇다고 건축주(주로 부동산 자본)의 최대 이윤만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자니 학교때 배운 건축이론과 지식인의 양심이 허락치 않고… 이런 갈등의 와중에서 우왕좌왕하게 되는 것이다.
●― 도전받는 전문직종
의사 변호사등과 함께 건축가는 고전적(classical)인 전문직업의 하나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고전적 전문직의 위치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우선 기업과 국가기구가 확장됨에 따라 각 조직은 전문가를 끌어들여 업무를 분할하고 합리화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거대하게 관료화된 조직속에서 전문가의 자율성 및 고객―전문가 관계는 상실되고 고객의 신뢰를 조직으로 대신하는 규제적 통제환경과 심성이 길들여진다.
또한 전문가의 서비스가 상품화되면서 고전적 전문가가 누리던 권위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된다. 예를들어 의료부문에서 국가는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응하여 특정 상품과 서비스를 비상품화한다(의료보험제). 이에 따라 어떤 문제는 해결되지만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국가재정의 악화). 이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행정적인 재상품화가 일어나는 바 이 과정이 전문가적 권위에 심대한 영향을 주게되는 것이다.
의사가 의료보험제도에 의해 더이상 '의사짓' 못해 먹겠다고 하는 상황이 건축에서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현재 건축가는 두가지 의무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는 설계도면과 공사예상금액을 산정해주는 일이고 두번째는 관청에서 건축허가를 얻어내 주는 일이다.
우선 첫번째 역할은 한마디로 부동산자본과 건설업 자본 사이에서 계약서를 작성, 이행여부를 감독해 주는 일이 되는 것이고 두번째 역할은 개별 부동산(건설자본)과 국가(공공부문)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주는 일이다.
건축가가 만들어 주는 설계도면은 건물에 대한 디자인이기 이전에 공사금액이 산출되는 근거이자 계약서류가 된다. 따라서 건설업자는 한푼이라도 남기려고 할 것이고, 건축주는 설계도면 대로 지어질 수 있도록 감독하는 임무를 건축가에게 부여한다. 제조업과는 달리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기후 자재운반 노동력수급 지반사정 등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발생한다. 이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면서 건설업자와 건축주 사이를 줄타기해야 하는 것이 건축가이다.
줄타기는 관청과 건축주 사이에서도 계속된다. 건축주는 허가는 법대로 준수하여 받았다 하더라도 공사과정에서 불법으로 단 한평이라도 더 늘려짓기를 원하고 또 건축가에게 압력을 넣는다. 현행 법규정대로라면 이 경우에 건축가(감리자)는 관청에 고자질을 해야한다.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시는 건축가가 처벌을 받게 되어있다. 그런데 자신의 밥줄인 의뢰자를 일러바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건축가의 줄타기는 더욱 고달파질수밖에 없게 된다.
사회의 각 이익집단 간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고 세력이 균등화 되게 됨에 따라 토지와 건물을 둘러싼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주민들의 민원때문에 큰교회나 호텔 심지어 장애자 복지시설도 허가가 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경우 중간에 끼인 건축가만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사실 건축과를 선택한 것은 이러저러한 현실하고는 아무런 관계없이 이루어진 일이다. 설사 '나기사'처럼 되고파서는 아닐지라도 딴에는 큰 땅덩어리를 척척 나누어 여기저기에 수십층짜리 건물을 올리고, 몇사람이 아니라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건물을 설계하고, 철모쓰고 왔다갔다하며 감독하는 것이 멋있고 사나이다와 보여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뛰어들고 보니 그렇게 좋아보이던 것과는 딴판이더라는 말이다. 단 일센티미터의 오차도 없이 단 하루의 지연도 없이 구조 설비 전기등을 맞추는 일, 파보면 물나오고 돌나오는 지하공사, 바람 지진 고려해야하는 고층공사 등은 기술적인 문제이니 그렇다 하자. 저마다 다른 고객의 미적취향을 설득시켜가면서 일관성 있게 건물디자인을 밀고나가는 일, 오래고 힘드는 설득을 통해 설계안대로 허가를 받아내는 일까지를 마무리하다 보면 왜 우리나라의 큰 건축가들이 단명하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 어려운 일에 사회의 인식이 제대로 되어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기껏 그림쟁이 혹은 허가업무대서방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보통이다. 건축이 고전적 전문직인 서구에서조차 현대에 들어와서는 그 전문가적 권위가 상실되고 있는 형편인데, 그러한 전통조차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그 지위나 권위를 운위할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
●― 패배주의와 관학주의
최근 벌어지고 있는 토지투기와 이에따른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파트 값, 점점 멀어지는 서민들의 내집마련 꿈, 악화되는 교통, 환경 문제. 이런 것을 볼 때 소위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학교때부터 배워왔던 자신에 대한 인식과 하잘것 없는 현실에서의 위치 사이의 현격함에 심한 절망감까지도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식이다. 최근에 한참 히트(?)를 쳤던 오피스텔 붐은 몇몇 투기꾼들이 농간을 부린 결과이다. 그들은 기존 법제도의 취약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단기간에 엄청난 수익을 챙긴다. 오피스텔은 오피스와 호텔 사이의 어정쩡한 형태로 1가구 2주택에 해당되지 않으면서도 주민등록이전을 할 수 있다는 맹점을 이용하여 자식들을 8학군에 위장전입시키기를 원하는 부유층을 집중 공략, 강남일대에 엄청난 투기붐을 일으켜 놓았고 이것이 연쇄적으로 아파트값 상승을 부추켜 부동산 거래판을 도박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정부당국이 허겁지겁 이를 행정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은 유유히 빠져나가고 애꿎는 2번 타자들만 된서리를 맞게 되는 것이다. 소위 '히트 앤드 런' 작전의 귀재들인 이들은 항상 법보다 한발 앞서 그들의 욕심을 채운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가 하는 일은 최대의 분양면적을 뽑아주고, 상품가치가 있게 건물외양을 멋있게 꾸며주는 일이 된다. 오피스텔의 상품가치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어디에서 건설했고 어디에서 설계했는가에 있는만큼 건축가는 온갖 교언영색으로 건물의 상품성을 높이는데 애써야 하는 것이다.
결국은 부동산 투기에 한몫하는 그 건물이 실상 설계하기는 가장 쉬우며 상대적으로 설계비는 비싸다는 측면에서 건축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매력있는 건물이 된다.
이쯤되면 이러한 문제는 사회체제의 모순과 관련된 문제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두가지 정도의 삶의 태도 내지는 건축관이 생겨나는 듯 싶다.
우선 패배주의적 태도이다. 이러한 건축관에 따르면 '각자의 이기심에 발전근거를 두고 있는 자본주의적 구조하에서 건축가의 이상주의는 몽상, 일 뿐이다. 이 체제 하에서 건축가가 할수 있는 최선은 '직업적 성실성' 밖에는 없다. 어떤 건축물의 정치 경제적 의미나 그로 인한 사회적 영향은 건축가의 개인적 관심사일지언정 그에 대해여 건축가가 개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그러해서도 안된다. 봉건시대의 건축가가 영주에게 봉사했듯이 자본제 하의 건축가는 자본의 효율을 극대화 시켜주는 방향으로 설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러한 패배주의 보다는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시키는 입장을 나는 관학주의(아카데미즘)라고 부르고 싶다. 앞의 태도가 고립적이고 그래도 양심적인데 반하여 이 태도는 조직적이고 완벽한 자기합리화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이 된다. 대개 '예술을 위한 예술'논리에 그 뿌리를 두는 이 입장에 따르면 건축은 건축 자체의 논리와 규범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지 어떤 건축외적인 요소에 의해서도 평가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따라서 건축에 있어서의 양식 공간감 의장 등만이 주요한 문제가 될 뿐이다.
이러한 두가지 태도 앞에서 예컨대 부동산자본 토지투기 주택문제 도시문제 등을 운운하고 이에 대한 건축가로서의 의무를 운운하면 이른바 '사이비'로 몰리기 십상이다.
●― 철거민 주택설계에 희열을 느껴
건축을 하는 사람치고 형태를 주조하고 내부 공간을 꾸미고 또 그것이 지어지는 것을 보고, 하는 일에 희열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 이후의 경험은 그러한 사적취미나 이기적 탐닉의 대상이기에는 건축이 심히 사회적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엄청난 의무가 따른다는 것을 배우게 하였다. 특히 건축계 내부의 개인적 집단적 무의식에 의하여 참으로 무책임하고도 위험한 건축행위들이 행해지며 또한 그것을 합리화하는 이론들이 재생산되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한 저항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아직 현실은 굳고 단단한 듯하다.
그럼에도 항상 살맛 안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전에는 건축계의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진짜 신나는 경험을 했다. 건축가가 감히 건축주에게 일을 시키기도 하고 공무원들이 앞장서서 이틀만에 허가를 내주는 진기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은 인천 주안동의 철거민들이 '청건협'을 찾아서 그들의 블럭집 설계를 의뢰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오랜 철거투쟁 끝에 얻은 시유지에 지을 72세대의 집을 우리는 회원들의 헌신과 그들(건축주)의 봉사로 정말 아주 싼값으로 설계를 끝내고 공무원한테 난생처음 대접받아가며 허가업무까지 끝낼수가 있었다.
이제 그들은 또 스스로 자신들의 집을 지어낼 것이고, 두달후면 완성될 그들 동네에 가서 나는 '나기사'까지는 못되어도 그래도 근래들어 가장 건축한 보람을 느끼며 그들의 준공 잔치에 한판 흐드러지게 놀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