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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올해 12월로 예정된 남극점 출장 계획이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2014년부터 한 해를 빼놓고는 북반구의 겨울(남반구의 여름)마다 한두 달씩을 보냈던 남극점이다. 올해는 설날을 가족과 보낼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괜한 아쉬움도 밀려왔다. 그리고 떠올렸다. 내가 어쩌다 벌써 여섯 번째 남극행을 준비하게 됐지?

 

밤하늘을 보다가 과학자를 꿈꾸게 된 소년


1995년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많은 어린이가 그렇듯 밤하늘에 있는 달과 별들은 내게 너무 신기한 존재였다. 그해 어린이날 달 지도와 함께 작은 망원경을 선물로 받았다. 망원경을 이용해 울퉁불퉁한 달 표면이나 예쁜 토성의 고리를 눈으로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는지,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서는 하늘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중학생 무렵 자연스럽게 나는 인터넷 통신을 통해 알게 된 아마추어 천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천체 사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장롱에서 묵고 있던, 아버지가 1980년대부터 쓰던 니콘 필름 카메라를 꺼내 별의 일주 운동을 사진에 담았다. ‘어떤 별은 왜 더 밝을까’ ‘왜 별마다 다른 색깔의 자국을 남길까’ ‘뿌옇게 흔적을 드러낸 은하의 정체는 뭘까’와 같이 ‘왜?’라는 호기심이 끊임없이 나를 자극했다. 


1999년부터 구독하기 시작한 과학동아는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지금처럼 인터넷에서 과학 기사를 쉽게 볼 수 없던 때라 궁금한 것이 있으면 과학동아부터 펼쳤다. 대형 서점에 가서 ‘스카이 앤 텔레스코프(Sky & Telescope)’ ‘아스트로노미(Astronomy)’ 같은 해외잡지를 사서 읽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천문학뿐만 아니라 로봇과 공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2000년을 앞두고 Y2K(컴퓨터의 2000년 연도 인식 오류)로 시끄럽던 즈음 인기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로봇 축구를 본 뒤부터일까. ‘과학상자’라는 장난감으로 어설프게 엔지니어 흉내를 내보기도 하고, 아카데미 사가 출시한 4석 라디오 키트를 수도 없이 뜯고 조립했다(대학원 시절 지도교수가 감탄한 납땜 실력은 이때 완성된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물리와 수학을 깊게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과학자라는 진로를 생각하게 됐다.


공학과 과학, 두 마리 토끼를 잡다


하지만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가 고민이었다. 이때도 역시 과학동아를 펼쳤다. 지난 호를 꺼내서 관련 기사를 읽기도 하고, 2005년에 정기구독 사은품으로 받은 책 ‘공학에 빠지면 세상을 얻는다’도 탐독했다. 동아사이언스가 서울대 공대와 함께 출간한 책이었는데, 전공별 연구 분야와 전망이 잘 정리돼 있어 대입 자기소개서를 쓸 때 도움이 됐다. 


2006년 나는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현재 전기·정보공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면서 이듬해 물리천문학부에서 천문학도 복수전공했다. 결국 전기공학과 천문학,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선택을 한 셈이다. 공대 건물과 자연대 건물 사이의 가파른 산길을 매일 오가는 일은 어려운 전공 수업을 두 배로 듣는 것만큼이나 고역이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졸업을 앞두고 나는 또 한 번 고민의 나날을 보냈다. 대학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어떤 진로로 가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그때 우연히 도서관에서 허블우주망원경에 대한 글을 읽게 됐다. 그 글에는 카메라에서 빛을 받아 이미지를 생성하는 센서인 전하결합소자(CCD·Charge-Coupled Device)의 발전에 천문학이 공헌했다는 이야기가 포함돼 있었다. 
‘이걸 하면 되겠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한 줄기 빛이 번쩍였다. 현대 천문학은 첨단 기술 덕분에 관측 능력과 컴퓨터 연산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며 발전하고 있다. 이 분야로 뛰어들면 공학적인 취미를 충족시키면서 과학 연구까지 해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가능하다면 외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공부를 하고 싶었다.

 

블랙홀 관측 기기를 직접 만들다


대학원 진학 준비는 다행히 순조로웠다. 2013년 4월에는 그해 가을 입학 합격 통지를 받은 미국 대학들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높이 솟은 선인장과 밤하늘이 아름다운 사막 동네, 애리조나주 투손에 위치한 애리조나대도 그중 하나였다. 


그곳에서 지도교수가 될 댄 머로니(Dan Marrone) 교수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에게 내 손으로 관측 기기를 만들고, 직접 만든 기기에서 얻은 자료로 천문학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자 부임한 지 2년 남짓 된 신임 교수였던 그는 내게 야심차게 준비 중인 사건지평선망원경(EHT·Event Horizon Telescope) 프로젝트 얘기를 꺼냈다. 마침 남극점망원경(SPT·South Pole Telescope)을 EHT에 참여시킬 연구비 제안서가 통과됐다며 말이다. 


EHT는 멀리 떨어진 망원경에서 동시에 받는 신호를 합성해서 지구 크기 정도의 망원경을 가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블랙홀을 직접 관측하는 초장기선 전파 간섭계 실험이다. SPT는 본래 우주배경복사 관측 실험용으로 제작됐기 때문에 블랙홀 관측에 활용하려면 누군가가 남극에 가서 SPT에 새로운 전파 수신기를 설치해야 했다. ‘남극점에 갈 수 있다니!’ ‘내 손으로 전파 관측 기기를 개발할 수 있다니!’ 나는 애써 흥분을 감추며 그의 학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2014년 12월, 나는 처음으로 남극점에 발을 디뎠다. 남극점에서의 첫 계절은 여러 가지로 인상 깊었다. 


특히 고등학생 시절 천문올림피아드 겨울학교에서 만나 친구가 됐던 강재환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과정 연구원을 남극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강 연구원은 남극점에서 진행 중인 바이셉(BICEP) 프로젝트에 참여해 우주배경복사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프로젝트가 우리 연구팀과 한 건물에서 진행돼 힘든 남극 생활에 여러 해 큰 의지가 됐다. 


남극점에서의 연구는 운 좋게 소기의 성과를 냈다. 2017년 SPT에 직접 개발한 EHT 전파 수신기를 성공적으로 설치했고, 이후 SPT가 관측한 자료는 블랙홀(M87*) 관측에서 다른 전 세계 망원경의 관측 자료를 보정하는 데 쓰였다. 우리 은하 중심에 있는 블랙홀 궁수자리 A*를 연구하는 데에도 SPT 자료가 쓰일 예정이다. 부품 디자인에서부터 가공, 시험과 프로그램 개발까지 내 손때가 묻지 않은 부분이 없는 수신기가 블랙홀 연구에 앞으로 더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해본다. 

 

주어진 일, 재밌는 공부를 꾸준히 


2019년 여름, 나는 애리조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공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블랙홀은 물론, 은하와 은하단 등으로 연구 주제를 넓히며 전파천문학과 관측 기기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남극점에 가고, 학위를 잘 마쳐 기쁘게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매 순간 주어진 일, 즐겁다고 생각하는 공부를 꾸준히 했을 뿐이고, 필요한 찰나에 도움을 주는 분들이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 


특히 뛰어난 연구자이자, 연구 외적으로도 배울 것이 많던 머로니 교수와 남극을 오가며 함께 연구한 6년은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처럼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지 지금도 스스로 묻곤 한다. 


과학동아를 읽는 독자들도 먼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 그리고 과학동아가 그런 독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있는 훌륭한 조력자가 돼주길 바란다. 오늘의 독자들이 수년 뒤 다시 ‘과학동아 키즈’였음을 자랑스럽게 말하며 그들의 독특한 경험을 나누는 날을 기대해 본다. 

 

2020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김준한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박사후연구원
  • 에디터

    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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