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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드디스크 소형화 일등공신 거대자기저항

특별기획 노벨 물리학상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며 계산대에서 컴퓨터를 이용하는 광경을 볼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죠. 와, 정말 대단해. 저 사람이 내가 생각해낸 원리로 만든 기계를 이용하고 있잖아.”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킨 이론을 제안한 독일 윌리히 연구소의 페터 그륀베르크(68) 박사와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프랑스 남(南)파리대의 알베르 페르(69) 교수는 수상발표 직후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노벨상을 받은 업적이 이처럼 빨리 생활 속 기술로 자리 잡은 예가 흔치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명답이었다.

이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연구를 하다가 1988년 자기화(자기모멘트의 총합) 방향이 서로 다른 얇은 박막을 겹쳐 붙인 뒤 전류를 흘려주면 매우 큰 전기저항이 생기는 이른바 ‘거대자기저항’(GMR, Giant Magnetoresistance) 현상을 거의 동시에 발견했다. GMR은 컴퓨터에 탑재된 하드디스크가 디스크의 정보를 읽는 기본 원리다.

IBM은 이 현상을 응용해 자기장의 세기가 작아져도 데이터를 오류 없이 읽게 하는 하드디스크를 1997년 처음 개발했고 GMR 기술은 곧바로 업계의 표준기술로 자리 잡았다.
 

거대자기저항(GMR) 효과를 이용한 하드디스크 헤드. 2007 노벨물리학상은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킨 이론을 제안한  두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냉장고 크기 하드디스크에 MP3 한곡 저장?

컴퓨터 저장장치인 하드디스크는 자석처럼 자성을 띄는 물질(자성물질)이 만드는 자기장의 방향이나 세기를 이용해 데이터를 기록하고 읽는다. 정보를 처리하는데 자성물질을 이용할 수 있는 이유는 자성물질 내부 전자들의 스핀(자기모멘트) 배열에 따라 자기화의 방향이 달라지고 이를 ‘1’ 이나 ‘0’으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성물질을 이용해 만든 최초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는 IBM이 1956년에 개발한 자기테이프 방식의 ‘RAMAC305’다. 냉장고 2대 크기에 무게가 1톤에 이르지만 저장용량은 5Mb(메가바이트)에 불과했다. 오늘날 MP3 음악 파일 한 개 밖에 저장할 수 없는 용량이다.

1970년대 말 IBM은 얇은 박막 형태의 자성물질을 이용한 헤드(하드디스크에서 디스크에 기록된 자성물질의 자기화 방향을 감지해 정보를 읽어내는 장치)를 개발했고 점차 하드디스크의 정보저장 용량도 늘었다.

1Gb(기가바이트) 하드디스크가 등장한 때는 IBM이 1991년 ‘자기저항’(MR)효과를 하드디스크 헤드에 응용하면서부터다. 자기저항이란 예를 들어 니켈과 철로 이루어진 강자성체 합금에 자기장을 가하면서 전류를 흘려주면 자기장이 없을 때보다 전기저항이 커지는 현상으로 1850년대에 영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켈빈이 처음 발견했다.

자기장이 있을 때와 없을 때 강자성체 합금의 저항 차이는 약 2% 정도인데, IBM은 이를 자기정보를 읽는데 응용했다. 전류가 흐르는 헤드가 자성을 띠는 물질이 입혀진 디스크 위를 지나면 자기저항효과 때문에 헤드에 흐르는 전류가 감소한다. 만약 자성물질이 없는 부분을 지나면 전류가 다시 증가한다. 이 전류 차이를 ‘1’과 ‘0’으로 읽어내는 원리다.

MR 하드디스크 헤드 기술덕분에 1cm2 당 1Mb였던 하드디스크의 메모리 용량은 10Mb로 증가했다. 하지만 MR하드디스크의 ‘용량확장’은 GMR 하드디스크의 ‘용량폭발’의 서곡에 불과했다.
 

페터 그륀베르크, 알베르 페르



디스크의 자기 정보에 따라 전류 열고 닫아

MR이 강자성체 합금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페르 교수와 그륀베르크 박사가 처음 발견한 GMR은 철 같은 강자성체와 크롬 같은 반강자성체를 번갈아 붙인 박막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두 개의 강자성층을 그 자기화의 방향이 나란하도록 붙이고 전류를 흘려주면 전기저항이 작아지고 서로 반대방향이 되도록 붙이면 저항이 커진다. 이때 나타나는 저항의 변화는 MR의 수십배에 이르기 때문에 MR 앞에 ‘거대’(Giant)라는 단어를 덧붙여 ‘거대’자기저항이라 부른다.

자기장의 작은 변화에도 저항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은 그만큼 정밀한 하드디스크 헤드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원리를 이용해 만든 제품이 GMR 헤드다. GMR 헤드는 두 개의 강자성층 사이에 보통 금속층을 껴 넣은 ‘스핀밸브’ 구조를 사용한다. 헤드 안의 스핀밸브는 위쪽 강자성층은 자기화의 방향이 고정돼 있지만, 아래쪽 강자성층은 고정돼 있지 않아 디스크에 새겨진 자기정보에 따라 자기화의 방향이 달라진다.

하드디스크의 헤드가 특정한 자기장 방향을 갖는 자성물질 위를 지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디스크 위의 자성물질이 만드는 자기장 방향에 따라 GMR 헤드의 아래쪽 강자성층의 자기화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이때 두 강자성층의 자기화가 같은 방향이 되면 GMR 효과 때문에 박막의 저항이 작아져 박막을 흐르는 전류에 대해 밸브를 열어 놓은 상태가 되고, 두 강자성층의 자기화 방향이 서로 반대가 되면 저항이 커져 밸브를 잠근 상태가 된다.

즉 GMR 헤드는 위아래 강자성층의 자기장 방향이 디스크에 입혀진 자성물질의 자기화 방향에 따라 오르내리는 전류값을 읽어 디지털 정보로 변환한다. 스핀밸브를 이용한 하드디스크 헤드 기술 덕분에 1cm2 당 메모리 용량이 약 100Mb로 높아졌으며 현재는 그의 100배 수준인 10Gb에 이르렀다.
 

GMR 효과를 이용한 하드디스크 헤드^GMR 하드디스크의 헤드는 두 개의 강자성층 사이에 금속층을 껴 넣은 구 조다. 위쪽 강자성층은 자기화의 방향 이 고정돼 있는 반면, 아래쪽 강자성 층은 디스크에 입혀진 자성물질의 자 기화 방향에 따라 자기화의 방향이 달 라진다.



유니버설 메모리를 향해
 

지난 여름 저장용량이 1Tb(테라바이트, 1Tb=1000Gb)인 개인컴퓨터용 하드디스크가 출시됐다.


GMR 효과는 하드디스크의 기억용량을 크게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최근 하드디스크가 아예 필요치 않은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개발하는 원리로도 이용되고 있다.

하드디스크는 정보를 읽어 들이거나 쓰기 위해 디스크가 회전하고 헤드가 움직이는 기계적인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전자의 움직임만을 이용해 정보를 읽고 쓰는 메모리인 RAM에 비해 속도가 수십배 느리다. 하지만 RAM은 전원이 끊기면 정보가 모두 지워지는 단점이 있다.

과학자들은 RAM의 고속기록재생속도와 하드디스크의 큰 기억용량을 모두 가진 ‘유니버설 메모리’를 개발하고 있다. 유니버설 메모리의 후보 중 가장 유력한 것은 MRAM(Magnetic RAM)이다.

MRAM은 GMR에 바탕을 둔 ‘터널링 자기저항’ 효과를 응용했다. 터널링 자기저항효과는 스핀밸브구조에서 두 개의 강자성층 사이에 있는 금속층 대신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층을 끼워 넣은 구조에서 나타난다. 한쪽 강자성체에 있는 전자가 양자역학적 현상인 터널링으로 절연층을 통과해 다른 쪽 강자성체로 이동할 때 나타나는 자기저항 효과를 이용해 정보를 쓰고 읽는다.

현재 모토로라와 IBM 같은 기업에서는 수십Mb 용량의 MRAM 시제품을 제작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수년 내에 실용화될 수 있다고 예측한다. 페르 교수와 그륀베르크 박사에게 노벨상이라는 거대한 선물을 안긴 GMR이 인류에게는 얼마나 더 큰 선물을 안겨줄지 기대된다.
 

자성물질을 이용한 최초의 하드디스크인 IBM의 RAMAC305. 저장용량이 5Mb에 불과했다.



노벨 물리학상의 숨은 공로자

이번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발표를 가장 아쉬워할 사람은 누굴까? 전문가들은 단연 미국 IBM 알마덴 연구소의 스튜어트 파킨 박사를 꼽는다. 파킨 박사는 1997년 거대자기저항효과를 응용해 ‘스핀밸브’구조를 만들고 이를 하드디스크의 헤드에 응용해 세계 최초로 GMR 하드디스크를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파킨 박사는 올해 수상 업적인 GMR 효과가 학계 및 산업계에서 주목받도록 했으며 GMR 효과의 발견자인 알베르 페르 교수와 페터 그륀베르크 박사가 노벨상을 수상하도록 도운 숨은 공로자다.

파킨 박사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 칼리지의 물리 및 이론물리학과에서 학사와 석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IBM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파킨 박사는 현재 차세대 메모리인 MRAM 개발을 주도하며 새로운 컴퓨터 시대를 이끄는 과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스튜어트 파킨 박사는 거대자기저항 효과를 응용해 세계 최초로 GMR 하드디스크를 만들었따.



*강자성체
스스로 자석이 되는 물질. 강자성체 안에 있는 전자들의 스핀이 모두 한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늘어서 자석의 성질을 나타낸다.

*반강자성체
이웃한 전자들의 스핀이 번갈아 반대방향으로 배열된 물질. 크롬이나 망간이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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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재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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