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방송을 마치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온 시간은 새벽 1시. 나의 하루는 다른 직장인과 조금 다르다. 저녁 8시에 출근해서 하루 동안 쏟아진 사건을 짚어주는 종합뉴스를 진행하고, 자정뉴스와 스포츠뉴스를 끝내고 나면 퇴근은 늘 새벽이다. 어찌 보면 짧은 근무시간이지만 생방송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밀려오는 스트레스는 상상 그 이상이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코로나19) 사태로 전 국민이 뉴스에 예민한 요즘에는 긴장감이 배가 된다.
코로나19가 깨닫게 해준 것
나는 2011년 KBS 아나운서(안동방송국)를 거쳐 2013년부터 연합뉴스TV에서 뉴스를 진행하고 있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과학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과학 지식이 필요한 순간이 많다. 특히 코로나19처럼 큰 이슈가 있는 경우에는 뉴스의 대부분이 과학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동아와 같은 과학잡지를 좋아하고, 임산생명공학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인 것이 도움이 된다.
과학뉴스를 보도할 때는 일단 사용하는 용어 자체가 다르다. 코로나19 관련 뉴스를 소개할 때도 ‘비말’ ‘음압병실’ ‘에크모’ 등 대중에게 생소한 단어를 많이 쓴다.
지금은 코로나19 관련 뉴스들이 워낙 많이 보도돼 이런 전문용어들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코로나19 확산 초기에는 뉴스 내용이 어렵다며 시청자들의 전화가 오기도 했다. 그래서 이후에는 비말은 침방울이라든지, 에크모 앞에는 ‘인공심폐기 에크모’ 등으로 최대한 쉬운 용어로 대체하거나 설명을 덧붙이곤 한다.
과학 분야 전문가 대담을 진행할 때도 있는데, 연합뉴스TV에서는 이런 대담들이 모두 생방송으로 이뤄진다. 대담에 출연하는 전문가들은 특정 분야에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식을 시청자에게 쉽게 풀어내는 것은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진행자로서 전문가가 말한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경우 평소 책이나 과학동아에서 읽은 과학지식이 도움이 많이 된다. 알아듣는 만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환절기나 여름 장마철에는 기상 전문가와 전화 인터뷰나 대담을 한다. 가령 전문가가 ‘바람이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이동한다’는 식의 전문적인 표현을 쓰면 ‘뜨거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가진다’는 등 부연설명을 덧붙일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간단한 내용은 내가 직접 설명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2017년 포항 지진, 2019년 보잉737 추락사고 등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는 과학이 숨어있다. 아나운서로 뉴스를 10년 가까이 전하다 보니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특히 전문용어가 나오는 과학과 관련된 뉴스의 경우 시청자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앵커의 큰 임무 중 하나다.
영화 ‘플러버’에서 시작된 인연
내가 과학동아와 인연을 맺은 건 영화 ‘플러버’ 덕분이다. 1997년 12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부모님과 함께 플러버를 보러 갔다. 엄청난 탄성으로 중력의 법칙도 무시하는 초록색 물컹한 액체 플러버가 나오는 영화였다. 지금으로 치면 슬라임이나 액체괴물쯤 되려나. 자동차나 볼링공, 사람의 호주머니 등 어디든 플러버를 집어넣기만 하면 엄청난 속도로 공중에 날아다닐 수 있다.
플러버는 길지 않은 12년 인생에 만난 첫 ‘인생영화’였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플러버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를 써서 결국엔 얻어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플러버 장난감은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영화처럼 탱탱하지 않았다. 바닥에 튕기면 영화처럼 하늘까지 튀어 올라야 하는데, 실제로는 데구르르 굴러가곤 했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나는 플러버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무작정 과학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분자구조의 개념을 설명해주면서 플러버의 분자구조를 이해하면 장난감을 만들어주겠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분자구조의 비밀을 찾고자 교무실에 있는 백과사전과 과학잡지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이때 과학동아를 처음 접했다.
결국 어느 정도 탄성을 가진 플러버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발명가가 되겠노라며 이것저것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전국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발명대회에서 ‘김밥을 한 번에 같은 크기로 자르는 장비’로 상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사용해보니 김밥이 다 터지는 작은(?) 부작용이 있어 사용하지는 않았다.
플러버에서 시작된 과학동아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급 반장이던 나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수업자료를 가지러 교무실에 갔다. 어느 날 교무실에 가고 있는데 얼굴만 알고 지내던 3학년 물리 담당 오창섭 선생님이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발을 잘못 짚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어렸을 때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평소에도 다리를 절던 선생님이었다.
너무 놀라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가 선생님을 살폈는데 의식이 없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선생님을 업고 학교 근처 병원으로 뛰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도 없었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다른 선생님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선생님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선생님은 금방 회복해 학교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나를 아들처럼 대해주셨다. 나중에는 같이 목욕탕에 갈 만큼 친해졌다. 매달 과학동아를 선물로 주시기도 했다. 물리 선생님과 각별하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학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과학동아를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매번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곤 했는데, 항상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곤 했다. 나중에 아나운서가 되고 나서 선생님을 찾아뵈니 포장마차에 데리고 가서 소주 한 잔을 사주셨는데, 그때도 어김없이 액체의 표면장력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천생 물리 선생님이다.
아나운서 발성 연습도 목소리 원리부터
호기심이 많은 만큼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사실 처음부터 아나운서를 꿈꾼 건 아니었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려면 몸소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뮤지컬 무대를 세우는 작업도 해봤고, 크리스마스에 유치원 아이들 앞에 산타클로스로 나타나는가 하면, 여성 노인들을 위한 기저귀 포장도 해봤다. 그동안 했던 아르바이트만 150가지가 넘는다.
이렇게 실행력이 좋아진 데는 어렸을 때 과학동아와 같은 잡지를 많이 읽은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잡지에는 정말 다양한 주제의 글이 있다. 읽다 보면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겼는데, 이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던 것이 지금도 습관처럼 남아있다.
직접 고쳐보겠다고 분해해서 망가뜨린 컴퓨터와 전자기기가 몇 대인지 셀 수 없다. 고장 원인이 기계적인 결함인지 소프트웨어 문제인지 찾겠다며 고군분투했다. 나중에는 정말로 관심이 생겨 컴퓨터 프로그램언어까지 배웠다. 관심이 자연스럽게 학습으로 이어진 셈이다.
아나운서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한국전통문화원에서 고전 논어를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목소리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나운서 시험에 도전하려고 한동안 발성과 발음 연습을 했는데, 목소리가 나는 원리부터 접근했다. 발성도 알고 보면 과학이다. 그 덕분인지 준비한 지 8개월 만에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직접 아나운서 일을 해보니 시청자들에게 뉴스를 전하는 일이 보람차 벌써 10년 가까이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직업이 내 인생의 최종 정착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지금도 다양한 일에 도전하고 있다. 내 장기 중 하나인 목소리를 활용해 지식을 전하는 유튜브를 준비하고 있다.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지식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요점만 말하는 것을 기본 콘셉트로 잡았다.
최근에는 영상편집에도 관심이 생겨 영어교육을 하는 스타트업에서 영상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PD로도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뒤에도 내가 여전히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여전히 나는 꿈을 꾸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