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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SF 미래스케치 워크숍 연구실에서 시작된 상상, 기술의 방향을 묻다

 

“오늘의 과학소설은 내일의 과학 사실이 된다.” 
_아이작 아시모프
2025년 12월 6일, 용인 아모레퍼시픽 R&I 센터에서 열린 ‘SF 미래스케치 워크숍’은 이 문장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참가자들은 첨단 뷰티테크를 직접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다가올 내일을 이야기로 구체화했다. 이 워크숍이 던진 질문은 분명했다. 기술은 우리 삶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으며, 우리는 그 변화를 어떤 태도로 받아들일 것인가.

 



2025년 12월 6일, SF 미래스케치 워크숍 현장. 영감을 자극하는 공간에서 참가자들은 뷰티테크의 최전선을 마주하고, 그 기술이 만들어낼 미래를 치열하게 논의했다.

 

뷰티테크 연구소에서 마주한 ‘미래의 얼굴’

 

아모레퍼시픽 R&I 센터에서 열린 ‘SF 미래스케치 워크숍’에는 생명과학에 관심이 많은 중·고등학생부터 SF 작가와 작가 지망생, 뷰티테크 연구원까지 다양한 참여자들이 함께했다. 기술을 만드는 사람과 그 기술로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이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는 점이 이 워크숍의 가장 큰 특징이다.


워크숍은 연구소 랩투어로 시작됐다. 아모레퍼시픽 R&I 센터는 1954년 설립된 국내 가장 오래된 화장품 연구소로, 건물은 포르투갈 출신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설계했다. 곳곳에 최우람 작가의 조각 작품이 놓여 있었다. 연구자들에게 창의적 자극을 주기 위한 장치였다.


히스토리 공간에 들어서자 국내 1호 화장품 제조업 허가증 사본부터 최근 7년 연속 CES 혁신상을 수상한 제품까지, 연구소의 70년 역사가 차례로 전시돼 있었다. 전시된 1970년대 피부 진단기 사진 앞에서 전상훈 연구인프라운영랩장은 “피부를 측정해 맞춤 화장품을 추천한다는 개념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AI 앱으로 피부를 스캔하는 시대, 기술 발전이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 축 위에 놓여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실제 화장품의 제형 연구가 진행되는 랩은 여느 화학 연구실과 비슷했다. 벤치 선반에 다양한 재료들이 촘촘히 놓여 있었다. 하나 다른 특징이 있다면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었다. 매일같이 향기를 맡으며 연구하는 기분은 어떨까. “개인적으로는 무향 제품을 더 선호한다”는 전 랩장의 말에 주변에서 가볍게 웃음이 터졌다.


이어진 남진 뷰티테크랩장의 강연에서는 AI 기반 피부 진단, 3D 프린팅 마스크팩, 반도체·마이크로 진단칩, 나노버블 세척기 등 실제 개발 중이거나 상용화를 앞둔 기술들이 소개됐다. 기술 하나하나가 설명될 때마다 참가자들의 표정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상상’이라고 생각했던 기술들이 이미 연구실 안에서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다.

 

조별로 작성한 시놉시스 발표를 뷰티테크랩 연구원들이 함께 듣고, 그 안에서 연구 현장의 고민과 맞닿은 지점을 짚어냈다.

 

AMOREPACIFIC X 과학동아
▲박준아, 정윤원, 김경림
SF 미래스케치 워크숍은 랩투어와 강연을 거쳐, 조별 시놉시스를 제작하고, 이를 발표하는 세 단계로 구성됐다. 참가자들은 연구 현장에서 본 기술이 현실이 된 미래를 상상하며, 그 변화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미지와 이야기로 풀어냈다.

 

 

상상은 연구자를 만나 구체화된다

 

본격적인 SF 시놉시스 제작 시간, 참가자들은 조별로 흩어졌다. 연구소 투어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과 기술 키워드를 적은 포스트잇이 테이블 위에 빠르게 쌓였다. 연구원들은 각 조를 오가며 기술적 현실성을 보태는 역할을 맡았다.


유전자를 이용해 노화를 되돌리는 화장품부터 홍보용 메이크업 아티스트 로봇까지 아이디어는 다양했다. “유전자를 이용해 노화를 되돌리는 화장품을 몸에 주입하려면 어떤 기기를 써야 할까요?” 정의진 학생(여수웅천중 1)의 질문에 뷰티테크랩에서 미용기기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복문정 연구원은 “아주 얇은 주사, 마이크로니들을 쓸 수도 있고, 전류를 이용해 세포막에 작은 구멍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며 아이디어를 보탰다.


옆 조에서는 ‘살아 있는 세포막 마스크’라는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극도로 얇은 마스크를 얼굴에 붙이면, 뇌에서 생각한 대로 RNA 기반 설계가 작동해 실시간으로 표정, 피부색, 메이크업 등 얼굴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가상 메이크업을 전문으로 하는 고명진 연구원은 “초박막 LED 필름으로 얼굴 전체의 메이크업을 표현하는 미래 기술은 저희 연구원들도 상상해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토론은 2시간 넘게 이어졌다. 제목, 세계관, 캐릭터, 기획 의도, 줄거리까지 짧은 시간에 모두 완성해야 했지만, 어느 조에서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저희 조는 아름다움 수치가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계에서, 이유도 모른 채 점수가 급락한 주인공이 그 근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상상해 봤습니다.” 고등학생 참가자 서율하 양은 투어와 강연에서 인상 깊게 본 피부 수치화 기술과 AI 평가 기술을 정교하게 녹여 ‘아름다운 신세계’라는 제목의 시놉시스를 발표했다. 


SF 평론가인 이지용 단국대 인문사회융합연구사업단 교수는 “아주 능숙한 SF 구성”이라며 “기술이 획일성에서 맞춤화로 변화해 온 흐름을 보여준 오늘 강연 내용을 반대 방향에서 풀어내며 훌륭한 사고 실험을 해냈다”고 평했다. 박원석 아모레퍼시픽 R&I 선행뷰티연구소장은 “아름다움의 다양성과 인간다움의 기준을 생각하게 해주는 점이 인상깊다”며 “기업에서도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를 강조하는 만큼, 오늘 발표는 앞으로 기술이 어떤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잘 보여줬다”고 말했다.

 

12월 13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SF 미래스케치 워크숍 현장. 김형준 차세대반도체연구소 소장이 첫 순서로 기술의 최전선을 소개하고 있다.

 

차세대반도체, 기술 그 이후를 상상하다

 

일주일 뒤인 12월 13일, SF 미래스케치 워크숍은 ‘차세대반도체’를 주제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같은 형식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랩투어 장소는 반도체기술연구단 연구실. 뉴로모픽 칩이 탑재된 자동차 시뮬레이터가 화면 속 도로를 달리자, 책상 위 실제 핸들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안전운전하는 사람의 운전 스타일을 학습한 것 같죠?” 김재욱 선임연구원의 말처럼 인간 운전자의 성향을 학습한 자율주행 시스템은 복잡한 도로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주행을 보여줬다.


김 선임연구원은 2024년 CES에서 선보였던 뉴로모픽 칩 ‘퍼스트클래스(FirstClass)’를 이날 참가자들 앞에서 직접 시연했다. 뉴로모픽 칩은 인간 두뇌 신경망의 동작 원리를 모사한 차세대반도체다. 기존 컴퓨터 중앙처리장치가 순차적으로 계산을 수행하는 구조라면, 뉴로모픽 칩은 수많은 뉴런이 병렬적으로 작동하는 두뇌처럼 움직인다. 이런 차이는 에너지 효율로 확인된다. 2016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에서 알파고는 바둑 한 판에 약 1메가와트(MW)의 전력을 사용한 반면, 이세돌 9단의 뇌가 소비하는 에너지는 약 20W에 불과했다.


랩투어는 반도체 제작 현장으로 이어졌다. KIST 청정연구동, 김형준 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 소장의 안내를 받아 약 1m2 크기의 유리창 너머로 연구실을 들여다봤다. 안에는 분자선 에피택시(MBE) 장비가 있었다. “우주 공간에 가까운” 초고진공 환경에서 박막을 증착하는 이 장비는 한 대 가격만 수십억 원에 달한다.


김 소장은 이곳에서 제작된 반도체로 초거대 연산 반도체(RPU) 연구를 하고 있다. RPU는 기존 컴퓨팅으로는 풀기도 어렵고 에너지 소비도 많은 초거대 조합 최적화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의 컴퓨팅이다. 신약 개발이나 기후 예측처럼 경우의 수가 폭발하는 문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기술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KIST 반도체기술연구단 연구실에서 김재욱 선임연구원이 뉴로모픽 칩 ‘퍼스트클래스’를 기반으로, 인간 운전자의 운전 성향을 학습한 자율주행 시스템을 시연하고 있다.

 

기술은 이야기로 바뀌고, 질문이 된다

 

랩투어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다시 조별 테이블로 모였다. 뉴로모픽 칩과 RPU가 열어놓을 미래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시간이었다.


뉴로모픽 칩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한 조는 상상을 ‘소방복’으로 확장했다. “베테랑 소방관의 행동을 학습한 소방복을 신참이 입고, 베테랑의 능력을 그대로 발휘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평소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다는 대학생 서승우 씨의 질문에 기술 자문 멘토로 함께한 김 선임연구원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며 “영화 해리포터의 투명망토처럼, 의지를 지닌 사물이 등장할 수 있다”고 답했다.


한편 중학생 참가자들로만 구성된 한 조는 보안 기술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RPU부터 블록체인, 양자 기술까지 서로 다른 방식의 기술이 보안에 쓰이는 상황을 설정해 어떤 기술이 창이 되고, 어떤 기술이 방패가 될 수 있을까를 따져보는 스토리였다. 


“국가마다 선택한 보안 기술이 달라서, 그 경쟁이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박성하 학생(오륜중 1학년)의 질문에 RPU 전문가인 김 소장은 “가능성은 있다”며 “특정 기술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각 기술은 서로 다른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고, 실제로 세계 여러 나라와 기업들이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흩어져 있던 아이디어들은 연구자의 기술 자문을 거치며 현실성을 갖춘 이야기로 다듬어졌다. 완성한 시놉시스를 발표하는 시간, 이선우 학생(제주 귀일중 3학년)은 RPU와 뉴로모픽 컴퓨터가 상용화된 세계관에서, 목 부상으로 은퇴한 천재 F1 레이서가 자신의 레이싱 스타일을 학습한 뉴로모픽 칩 레이싱 카로 다시 트랙에 서는 이야기를 상상했다. 주인공에게 맞서는 라이벌 팀은 허가되지 않은 RPU 기반 AI 시스템으로, 뉴로모픽 칩이 구현하는 ‘인간적인 주행’과 우승을 겨룬다.


이 교수는 “스포츠처럼 신체를 극한까지 사용하는 영역을 새로운 기술로 다시 상상한 점이 흥미롭다”고 짚었다. 특히 부상으로 더 이상 레이스에 나설 수 없는 주인공의 등장과 그에 대한 대안 제시는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도 맞닿아 있는 소재”라고 덧붙였다. 


김 소장은 “RPU와 뉴로모픽 자동차의 대결이라는 설정은 두 기술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라며, “기술적 디테일이 더 녹아들면 이야기가 한층 단단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시놉시스가 공유됐다. 어떤 조는 기술의 성공을, 어떤 조는 실패 이후의 세계를 상상했다. 상온 초전도 기반 뉴로모픽 임플란트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기술 의존이 끊긴 이후 인간의 자립을 묻는 ‘자립의 온도 310K’가 있었고, 차세대반도체 기반의 기후 예측이 공공 안전이 아닌 부동산 가격 조작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회를 그린 ‘기후 매매’는 “한국에서만 나올 법한 SF”라는 웃음을 자아냈다. ‘니르바나 두기’라는 작품은 저전력 차세대반도체가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세계 ‘니르바나’가 사실은, AI 서버 폭증으로 지구가 과열된 이후 ‘인간이 가지 못한 길’을 계산해 만든 시뮬레이션이라는 설정을 담았다.


이 교수는 “인간 멸종 이후를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는 상상은 SF에서 많이 등장하는 지점”이라며,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공진화하는 존재로 그린 점이 인상적”이라고 평했다. 김 선임연구원은 “저전력 차세대반도체가 실패한 미래를 상상해 준 덕분에, 연구자로서 오히려 더 경계해야 할 지점을 돌아보게 됐다”며, “강력한 기술일수록 사회 전체 차원의 억제와 통제가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잘 담긴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KIST 과학기술연구원 X 과학동아
▲박종빈, 서승우
▲이영혜
▲김경림, 민이안, 이영미
KIST와 함께한 SF 미래스케치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그려낸 미래의 모습. 뉴로모픽 칩과 RPU가 상용화된 세계를 배경으로, 차세대반도체 기술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를 시각화했다. 왼쪽부터 베테랑 소방관의 능력을 학습한 소방복, 인간 레이서의 주행 스타일을 반영한 레이스 카, 저전력 반도체가 적용된 미래 도시.<

 

연구와 상상이 만났을 때 남은 것

 

기술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기술이 바꿔놓을 미래를 직접 살아갈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술의 쓰임과 방향을 함께 고민했다는 점에서 두 번의 워크숍은 결과물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아모레퍼시픽에서는 아름다움을 어디까지 기술로 정의할 수 있는지, 그 기준은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지를 묻는 이야기들이 이어졌고, KIST에서는 효율과 성능을 넘어 기술이 어떤 선택을 유도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중심에 놓였다.


김 소장은 “팩트로만 다루던 연구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는지를 확인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연구실 안에서 출발한 기술이 이야기라는 형식을 만나자, 개발자들 역시 스스로의 연구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됐다는 뜻이다.


두 현장은 서로 다른 기술을 다뤘지만, 질문은 자연스럽게 하나로 수렴됐다. 이 기술이 가능해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하기로 선택할 것인가. SF 미래스케치 워크숍은 그 질문을 연구실 밖으로 끌어내는 작은 실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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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혜
  • 사진

    남윤중
  • 디자인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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