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지만 필자가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다녀온 지도 11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우주 비행을 했던 우주인들의 경험을 듣다 보면 꽤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느껴진다.
일단 2008년 필자가 ISS에 갔을 당시엔 ‘큐폴라’라는 거대한 창이 없었다. 또 지상과 쌍방향 통신이 안 돼서 ISS에서는 지상의 영상을 볼 수 없었다. e메일만 겨우 보낼 뿐 인터넷을 실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ISS에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실시간으로 사진이나 글을 올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심지어는 인터넷을 이용해서 화상통화도 한다. 과거 우주인들이 항상 종이에 적힌 매뉴얼을 들고 다녔던 것과 달리, 요즘 우주인들은 태블릿PC나 컴퓨터로 실험 매뉴얼을 확인한다.
10년의 차이도 이렇게 큰데, 수십 년 전 우주정거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루마니아 출신으로 옛 소련 시절인 1981년 우주 비행을 한 두미트루 도린 프루나리우 박사는 이런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멋진 선생님이었다.
러시아도 미국도 아닌, 루마니아 출신
프루나리우 박사를 처음 만난 건 우주 비행을 마친 이듬해인 2009년 우주탐험가협회(ASE) 연례총회에서였다. 처음에는 ASE 임원진인 그가, 심지어 러시아어도 영어도 유창한 그가, 러시아 우주인도 미국 우주인도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다. 과거 1970년대에는 옛 소련이 주최한 인터코스모스(Interkosmos)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꽤 많은 옛 소련 관련국의 우주인들이 우주 비행을 했다는 선배 우주인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터코스모스 프로그램에 가입한 국가들은 우주인 선발 과정에서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다. 1968년 가입한 루마니아의 경우 공군이 선발 과정 및 훈련과 관련된 국내 지원을 담당했고, 루마니아 국립 우주 활동 위원회는 우주정거장에서 수행할 과학 실험을 담당했다(1970년대 소련은 ‘살류트(Salyut)’ 우주정거장을 운용하고 있었다).
프루나리우 박사는 자신이 우주인이 된 과정을 설명할 때 항상 “루마니아에서 우주인 후보를 선발할 당시 나는 참 운 좋게 딱 맞는 시간, 딱 맞는 자리에 있었다(in the right place at the right time)”고 말하곤 했다.
그가 한국의 과학고와 유사한 루마니아 브라소브 지역의 물리수학고를 졸업했고, 루마니아 공군 장교로 복무했다는 기록을 본 나로서는 조금 의아한 말이었다. 그 정도면 우주인을 어느 정도 꿈꾸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1977년 루마니아에서 우주인 후보 선발을 시작했을 때 프루나리우 박사는 군복무 중이었다. 직업으로서의 군인이 아니라 한국과 같은 의무복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군인들만을 대상으로 우주인 공모가 이뤄졌고, 프루나리우 박사가 속한 부대가 그 시작이었다.
그가 ‘과학고’를 졸업한 것도 우연이 컸다. 루마니아의 고등학교는 평준화 체계였고, 그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일반고로 진학했다. 그런데 졸업할 무렵 고등학교가 과학고로 전환됐다. 현재 물리수학고는 국립정보대학이 됐다. 그는 “어릴 때부터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다”며 “고등학교 시절 좋은 물리, 수학 선생님을 만나 과학에 관심을 키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항공우주공학 분야로 진학하게 됐다”고 말했다.
30년 전에는 비행기 낙하 훈련도
프루나리우 박사는 1978년부터 3년 동안 유리가가린우주인훈련센터(GCTC)에서 우주인 훈련을 받았다. 그때 나이는 25세. 그는 “마치 대학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며 “본래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발견하는 것을 좋아해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했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그는 마지막 테스트에서 최고점수(5점)를 받았다. 대학으로 치면 수석 졸업을 한 셈이다.
그에게 당시 GCTC 훈련이 어땠는지 자세히 물었다. 우주 환경, 소유스 우주선과 로켓, 우주 비행 이론, 러시아어 등을 배우는 훈련은 그때도 있었다고. 그런데 당시에는 훈련생 모두가 무려 한 달 동안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L-39 알바트로스)에서 낙하하는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훈련 기간도 지금보다 좀 더 길었다. 내가 ISS에서 9일간 체류하는 11일간의 우주 비행을 위해 1년 정도의 훈련을 받았던 반면, 그는 살류트 우주정거장에 8일간 체류하는 우주 비행을 위해 3년가량 훈련을 받았다. 비행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은 탓이려니 했는데,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행에는 ‘운’이 따라야 했다.
그는 1981년 5월, 러시아 베테랑 우주인인 레오니드 포포프와 소유스 40호를 타고 살류트-6 우주정거장에 다녀왔다. 사실 그와 비행할 사람은 러시아 출신 우주인 이브게니 크루노브였다. 하지만 그가 개인적인 이유로 우주인 훈련을 그만두면서 프루나리우 박사의 비행도 늦춰졌다. 비행 시뮬레이터로 훈련하면서 몇 개월을 보냈고 훈련 기간이 길어졌다.
그는 38년이나 지난 발사 전날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50년 넘게 전해져온 러시아 소유스 우주선 발사 전통인 영화 감상 시간을 갖고(‘사막의 하얀 태양’이라는 오래된 러시아 영화로, 나도 봤지만 너무 긴장해서인지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비행할 소유스 우주선을 점검하고 우주복을 확인했다.
그는 특히 비행 중에 일어날 수도 있는 사고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로 당시에는 지금보다 안전사고가 많았다. 가령 1967년 우주 궤도에 오른 최초의 소유스 우주선인 소유스 1호는 귀환 시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아 탑승한 러시아 우주인 블라디미르 카마로프가 목숨을 잃었다. 또 1971년 소유스 11호는 전 세계 최초로 살류트 우주정거장에 도킹하는 기록을 세웠지만, 귀환 중 감압 사고로 탑승한 러시아 우주인 3명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통계적으로는 지금까지 비행한 전 세계 우주인의 4.5%가 우주 비행 중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행한 우주인 수는 훨씬 적고 사고는 더 많았던 당시에는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지금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살류트-6 안에서 옛 소련 출신의 동료 우주인 빅토르 사비니크(오른쪽)와 함께 촬영한 사진. 살류트-6는 오늘날 국제우주정거장(ISS) 모듈 1개와 비슷한 크기로 매우 협소했다.
▲ 루마니아의 첫 우주인으로서 언론 인터뷰 중인 프루나리우 박사(오른쪽).
그 밖에 우주정거장에서의 시차 얘기도 흥미로웠다. 그는 살류트-6 우주정거장에서 단 한 번도 시차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발사 전 카자흐스탄에서도 소유스 우주선에서도, 살류트 우주정거장에서도 러시아 모스크바의 시간에 맞춰 생활했기 때문이다.
현재 우주인들이 체류하는 ISS는 GMT, 즉 그리니치 표준시를 따르고 있다. ISS가 하루에 16번 전 세계의 상공을 차례로 지나며 도는 데다가, 16개국이 함께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경우, 훈련을 받는 동안 GCTC에서는 러시아 모스크바 시간으로 지냈지만, 이후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비행을 준비하는 2~3주 동안에는 모스크바보다 2시간 빠른 현지 시간에 적응하며 며칠간 시차를 느꼈다. 그런 다음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를 떠나 ISS에 도착한 이틀 뒤부터는 다시 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춰 생활했다. 우주로 오는 과정에서 총 2번의 시차 적응이 있었던 셈이다.
그에 반해 프루나리우 박사는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비행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모스크바 시간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는 “덕분에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같은 시간에 기상할 수 있었다”며 “우주의 무중력 환경이 신체에 무리를 주는데, 생체리듬까지 바꿔야 하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고 설명했다.
1 1977~1982년 운영된 옛 소련의 우주정거장 살류트-6. 프루나리우 박사가 탄 소유스 40호는 살류트-6과 도킹한 마지막 우주선이었다.
2 프루나리우 박사는 루마니아우주청장, 우주탐험가협회(ASE) 임원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사진은 여성 우주인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패널로 참석한 모습.
3 소유스 40호 임무의 미션 패치. 옛 소련과 루마니아가 협력했다.
“소중한 지구를 모두 함께 보호했으면”
우주탐험가협회의 창립 멤버인 프루나리우 박사는 협회 설립이 어떻게 진행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1985년 프랑스의 세르네이 지역에 전 세계 우주인들이 모인 것이 협회의 시작이었다. 당시엔 미국 우주인과 러시아 우주인이 대부분이라 통역이 있어야만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이 신기했다.
그는 1981년 우주 비행 이후에도 국제 우주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루마니아우주청장을 역임했고, 2011년부터 3년 동안은 우주탐험가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그동안 협회의 임원은 대부분 미국인이나 러시아인이었는데, 루마니아 우주인으로서 활약하는 모습이 멋지고 또 본받고 싶다.
2010~2012년 그는 유엔의 ‘외기권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위원회(COPUOS)’ 의장직을 수행했다. 미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리더십으로 유엔 외기권사무국(UN-OOSA)과 우주탐험가협회 회원들을 잇는 역할을 해냈다.
이렇게 이미 대단한 일을 해낸 그에게도 남은 꿈이 있을까. 그에게 물었다.
“그럼요, 꿈이 있죠! 전 세계가 평화롭게 서로 이해하고 함께 협력해서 소중한 우리의 지구를 보호하고 인류에게 더 좋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 내 꿈입니다.”
진정한 우주의 평화를 꿈꾸는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이소연
2008년 소유스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다녀온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전 세계적으로는 475번째, 여성으로서는 49번째로 우주에 다녀왔다. KAIST에서 기계공학 학사 및 석사학위를 마치고, 동대학 바이오시스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공학도 출신이다. 현재는 미국 실리콘밸리 우주 관련 스타트업 로프트 오비탈(Loft Orbital)에서 전략기획 및 국제협력 담당으로, 미국 워싱턴대 공대에서 자문위원 및 겸직교수로 일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우주인으로서 열정과 사명감을 갖고 우주산업 시대에 맞춰 과학 대중화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mcax1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