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강남의 한 대형 백화점에서는 이색적인 바자회가 열렸다. 국내 유명 디자이너 10인의 여성복이 출품된 이 바자회의 목적은 '불우이웃돕기' 등의 자선사업 성격이 아닌 '초중고교 과학기자재 보내기'운동의 기금을 마련하자는 것.
지난4월 노태우 대통령이 과학기자클럽과의 간담회에서 "실험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과학기자재의 보충이 절실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이래 교육부 과기처 등 관계부처와 과학기술진흥재단, 몇개 언론기관들이 동분서주해 이끌어낸 '초중고교과학기자재 보내기 운동'은 그간 방송을 통한 관계전문가들의 긴급토론회와 공개모금을 시작으로 신문·방송광고, 유관기관 협조요청 등 다차원적인 방법으로 국민대중의 지지를 호소해왔다.
운동이 시작된 지 만 한달이 채 못되는 지난 8월12일까지의 모금액은 13억5천7백여만원. 1천만원 이상을 기탁한 특별회원 46단체를 비롯해 독지가 1만1천4백55명이 크고 작은 성금을 보내왔다. 이만큼의 성과도 쉽사리 얻어진 것은 아니지만 올해 12월까지 1백억원 모금을 목표로 하고있는 운동본부로선 목표달성을 낙관할 수만은 없어 애타는 심정이다.
학교 과학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실험실습과 현장교육이 활성화돼야한다는 주장은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명백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실험교육강화라는 '이상'(理想) '예산부족'등을 이유로 번번히 뒷전으로 밀려야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의 '과학기자재보내기운동'은 바로 이런 현실때문에 그 의미가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비록 목표로 한 모금액을 다 채우지 못한다해도 과학교육현장의 열악성을 국민 앞에 드러내고 주지시킴으로써 교육세의 납세자이자 학부모인 국민들 그리고 정부가 과학교육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적든 많든 십시일반으로 모인 성금을 효과적으로 쓰는 일 역시 중요한 과제다. 적재적소에 성금을 나누는 일 자체가 바로 우리 과학교육행정의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은 돈이라도 효과적으로, 국민에게 신뢰를 주는 방향에서 집행하려면 먼저 걸림돌이 될만한 몇가지 사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은 과학기자재를 사주는 것만으로 실험교육의 여건이 모두 갖추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열의를 가진 과학교사들의 과학반특별활동이나 방학을 이용한 과학캠프조차도 학부모와 동료교사들로부터 '입시에 방해되는 쓸데없는 짓' 정도로 치부되는 교육 현실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애써 마련한 과학기구들도 먼지만 뒤집어 쓴 채 녹슬 수밖에 없다.
과학교과 운영 내적인 문제는 더 많다. 90년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국민학교의 경우 48개학급이 겨우 실험실 1개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전체의 79%를 차지한다. 중고등학교의 경우도 그 비율은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덩치 큰 아이들은 걸어다니기조차 비좁을 정도의 교실에서 아이들과 승강이를 벌이며 화기성물질이나 독극물을 다뤄야하는 실험을 진행하자면 "마치 전투를 치르는 것 같다"는 것이 교사들의 고충담이다. 과학실 하나를 만들려면 과학기자재 1, 2점의 수십, 수백배에 달하는 투자가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실험을 할 수 있는 안정된 공간의 확보는 장기적으로 꼭 풀어야 할 숙제다.
교사역량의 제고도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의 자연계열을 졸업해도 많은 실험을 책과 강의로 대신하기 때문에 막상 교단에 섰을 때의 지도능력은 곧잘 한계에 부딪친다. 따라서 초중고등학교의 과학기자재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과학교육을 전공하는 미래 교사들의 실험실습교육도 간과할 수 없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실험기구자체의 개발도 요구된다. 국내의 과학기구제작사들이 거의 영세기업수준을 면치 못해 그 생산품들도 내구성이나 기능성이 외국산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 과학교사들의 중론이다. 질 좋은 기구를 만들 수 있도록 공개경쟁을 유도하고 지원하는 것과 함께 우리 실험교육실정에 맞는 기구를 연구·개발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런저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1백억원은 결코 충분한 돈이 아니다. 기금을 '손쉽게 공정히' 집행하자면 각 학교별로 일정액씩을 골고루 나누어 줄수도 있다. 그러나 1백억원이 걷혀도 1개교당 1백만원이 채 못 돌아가는 돈으로는 고작 학교별로 현미경 2, 3개를 살 수 있을 뿐이다.
과학기술진흥재단 등 '과학기자재보내기 운동'의 주최측은 모금이 끝나는 12월에 과기처 교육부 전문연구진과 주최측이 망라되는 기금운영특별위를 구성해 집행의 구체안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모금이 끝난 상태에서의 기금운영 구상은 자칫 졸속처리를 낳을 수도 있다. 과학교육현장을 아는 전문인들이 지금부터라도 과학기자재를 제대로 나누는 일뿐 아니라 과학기자재가 제대로 쓰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대국적인 구상을 세워나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