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는 가장 많은 화합물을 만들 수 있는 원소다. 미국화학회가 운영하는 ‘CAS(Chemical Abstracts Service) 등록 번호’에 등재된 화합물 중 탄소 화합물이 대략 90%에 이른다. 그런 탄소는 많은 역할을 맡고 있다. 생명, 문명, 별빛, 이 모든 곳에 탄소가 필요하다. 물론 화석연료와 합성소재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도 심각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탄소를 포기하는 ‘탈(脫)탄소’와 ‘저(低)탄소’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지혜롭게 활용하는 ‘탄소 문화’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탄소는 생명의 원소다.
생명체에 필요한 많은 물질이 탄소로 이뤄진 사슬과 고리로 만들어져 있다"
다양한 화합물 만드는 천의 얼굴
원자번호 6번인 탄소(C)는 주기율표에서 14족에 속하는 원소로, 인류가 자연에서 그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아낸 원소 중 하나다. 석탄이나 숯 등 오랫동안 인류가 사용해온 화석연료는 모두 탄소 덩어리다.
거의 모든 언어에서 탄소를 일컫는 단어는 석탄(石炭·돌덩어리 탄소)에서 유래했다. 한자어 탄소(炭素)는 말 그대로 ‘석탄의 원소’라는 뜻이며, 영어 단어 ‘carbon’ 또한 석탄을 뜻하는 라틴어 ‘carbo’에서 나왔다. 18세기 말에는 다이아몬드와 흑연도 순수한 탄소 덩어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탄소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원소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처음 밝혀낸 인물은 프랑스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였다. 1787년 자신의 저서 ‘화학 명명법(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을 통해 ‘세상은 탄소와 산소, 수소, 황, 인 등 55종의 원소로 이뤄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0여 년간 서양을 지배한 ‘4원소설(만물이 물, 불, 공기, 흙의 네 가지 원소로 이뤄져 있다는 내용의 가설)’을 정면으로 거부한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물론 라부아지에의 주장이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제시한 원소에는 ‘빛’과 ‘칼로릭’(열의 원소) 등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의 과학적 정체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분명하게 밝혀졌다.
탄소의 화학적 다양성은 4개의 *원자가전자에서 비롯된다. 탄소 화합물에서 탄소의 산화 상태가 매우 다양한 것도 원자가전자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산화수로만 살펴봐도 이산화탄소(CO₂)의 +4에서 메탄(CH₄)의 –4까지 모두 가능하다.
또한 탄소는 *혼성오비탈을 통해 다양한 공유결합을 만들 수 있다. 탄소는 사면체의 꼭짓점을 향하는 4개의 단일결합을 만드는 sp3부터 이중결합의 sp2, 삼중결합의 sp까지 다양한 혼성오비탈을 만들 수 있다. 덕분에 탄소 화합물의 기하학적 구조 또한 매우 다양하다.
게다가 지름이 1.4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정도인 탄소 원자는 다양한 화합물을 만들기에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다. 원자가 너무 크면 결합이 느슨해지고, 너무 작으면 결합에 필요한 공간이 부족해진다. 이 때문에 탄소 원자는 다른 탄소 원자들과 함께 고리(ring)나 사슬(chain) 구조의 결합을 다양하게 형성할 수 있다.
실제로 생명의 물질이라고 알려진 모든 유기화합물은 탄소로 이뤄진 사슬과 고리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탄소에 수소, 질소, 산소, 인, 황 등 다양한 원소가 더해지면 유기화합물의 다양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금속 원소와 결합한 다양한 유기금속화합물의 생물학적 기능을 다루는 생무기화학이라는 분야도 있다.
탄수화물, 단백질 구성…생명의 원소
탄소는 생명의 원소다. 모든 생명체의 세포는 예외 없이 탄소 화합물로 구성돼있다. 미토콘드리아나 리보솜 같은 세포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생명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 또한 탄소 화합물을 통해서 공급된다. 대표적으로 탄수화물인 포도당이 그 역할을 한다. 탄수화물은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태양의 빛에너지를 저장해놓은 것이다.
생명 현상에 필요한 생리작용을 정교하게 조절하는 단백질 또한 탄소의 화합물이다.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에서도 탄소는 핵심이다. DNA의 뼈대뿐만 아니라 정보를 담는 4종류의 염기인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 또한 모두 탄소 화합물이다.
지구상의 생명은 서로 탄소를 재활용하면서 살아간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몸의 질량은 18~19%가 탄소로 이뤄져 있다. 산소(65%)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질량을 차지한다. 우리가 섭취하는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은 다른 생물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애써 만들어놓은 탄소 화합물들이다. 생물 종의 다양성과 생태계의 보전이 중요한 것도 인류의 생존에 탄소를 비롯한 원소의 재활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탄소는 우주에서 138억 년간 진행 중인 항성의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부산물이다. 태양보다 훨씬 더 큰 항성이 수명을 다하고 죽는 초신성 폭발에서 일어나는 핵융합을 통해 탄소를 비롯한 무거운 원소들이 만들어진다. 특수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만큼 우주 전체에서 탄소가 차지하는 양은 그리 많지 않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중 탄소의 비중은 고작 0.46%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귀한 탄소가 모여 인간과 같은 생명을 만들어낸 건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탄소는 항성에서 발생하는 핵융합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핵심 촉매이기도 하다. 사실 4개의 수소가 동시에 충돌해 헬륨 원자로 융합되는 일은 확률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의 핵물리학자 한스 베테는 ‘피지컬 리뷰’ 1939년 3월 1일자에 발표한 논문에서 항성에서 일어나는 핵융합이 탄소와 질소를 매개체로 하는 연쇄반응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doi: 10.1103/PhysRev.55.434 밤하늘의 별들도 1억 도가 넘는 열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불사조’인 탄소가 있어야만 빛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베테는 이 이론을 밝혀낸 공로로 196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불, 석탄, 석유까지…문명의 원소
탄소는 문명의 원소이기도 하다. 50만 년 전 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전까지 인류의 삶은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식물이 만들어낸 탄수화물인 셀룰로오스로 이뤄진 장작과 낙엽을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생활은 다른 동물과 명백히 달라졌다. 불을 이용해 어둠을 밝히고 추위를 극복하며 맹수를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건 불을 사용해 음식을 익혀 먹게 됐다는 점이다. 불에 음식을 익히면서 미생물에 의한 감염도 피할 수 있었고, 소화에 소비하던 에너지를 뇌 활동에 쓸 수 있게 됐다. 불을 이용해서 음식을 익혀 먹었기 때문에 인간의 뇌가 지금처럼 커질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문명의 시작은 불, 그리고 이를 만들어낸 탄소가 연 셈이다.
이후 탄소의 역할은 산업혁명에서 정점을 찍었다. 탄소 덩어리인 석탄을 본격적으로 연료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생산성은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맹독성인 일산화탄소 배출을 최소화한 보일러의 개발은 산업혁명의 핵심이었다. 또 19세기 말부터는 액체 상태의 화석연료인 석유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내연기관을 탑재한 자동차가 일상생활에 자리 잡았고, 이는 교통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석유는 인류에게 플라스틱, 합성섬유, 비닐 등 새로운 고분자 소재도 제공했다. 탄소 사슬로 이뤄진 고분자는 목재와 천연섬유를 빠르게 대체했다. 다양한 탄소 고분자가 개발되면서 1980년대부터는 플라스틱의 수요가 목재를 넘어서게 됐다. 오늘날 우리가 풍요롭고 안전하고 평등한 삶을 누리게 된 데는 탄소의 공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인류가 탄소 연료와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삶의 질을 개선하고 상당한 면적의 숲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 과다 배출과 마구 버린 플라스틱 등 합성소재가 환경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하지만 탄소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절대 아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지나치게 낮아져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막 등 건조지역의 기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이산화탄소와 더불어 온실가스 중 하나인 수증기가 부족한 건조지역의 기후는 생명체가 살아가기에는 가혹한 환경이다.
식물의 광합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산화탄소가 지나치게 줄어들면 숲과 농사에 심각한 어려움이 발생한다. 맹목적인 저탄소, 탈탄소는 오히려 인류 문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앞으로 탄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식량, 에너지, 공학, 의학 등 미래 산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는 나노과학의 핵심은 *풀러렌과 *그래핀 등 탄소 화합물을 이용한 나노화학이다. 화학물질의 생산과 소비는 물론 폐기 과정까지 고려한 ‘녹색 화학’의 꿈 또한 탄소 없이는 이룩할 수 없다. 우리가 활용하고 있는 식량과 소재의 대부분이 탄소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기물로 이뤄진 생명현상의 비밀을 밝혀내는 생명과학도 탄소와 무관할 수 없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화학 연구 중에서 탄소와 관계없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앞으로도 탄소가 인류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이덕환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에서 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낸 뒤 서강대 화학과 교수로 부임해 34년간 재직하며 국내 과학커뮤니케이션 분야를 개척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비롯한 다수의 과학 교양서를 번역했고, ‘이덕환의 과학세상’ 등을 저술했다. 2008년에는 과학기술훈장 웅비장을 받았다. duckhwan@sogang.ac.kr
*용어정리
원자가전자(valence electron)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 중 최외곽 전자껍질에 들어있는 전자. 다른 원자와의 화학결합을 가능하게 만든다.
산화수(oxidation number)
화학결합을 형성하는 원자의 산화 상태를 나타내는 수. 결합을 형성하는 원소의 전기음성도에 따라 결정된다. 전기음성도가 큰 원자는 음의 산화수를, 작은 원자는 양의 산화수를 갖는다.
혼성오비탈(hybrid orbital)
공유결합을 형성하는 원자의 원자가전자가 들어있는 오비탈들의 선형결합(수학적 ‘혼성’)으로 분자의 기하학적 구조를 설명하는 화학결합 이론.
풀러렌(fullerene)
탄소 원자가 구, 타원체, 원기둥 등의 형태로 배치된 동소체. 1985년 개발된 축구공 모양의 동소체(C60)가 가장 유명하다.
그래핀(graphene)
탄소 원자가 벌집 모양의 6각형으로 연결된 평면 구조의 물질로 단일 원자층을 이루고 있다. 안드레 가임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흑연에서 그래핀을 떼어내는 방법을 개발해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