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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기원을 찾는 방법

우리 한국인은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이 소박한 물음에 대한 답변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학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시원스레 규명돼 있지 못하다. 다만 여러가지 연구방법에 의해 어느 정도 옛모습이 밝혀지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한국인의 기원을 추구하고자 할 때 어떤 각도에서 이 문제를 파헤쳐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에 부딪치게 된다. 지난날의 전통적인 관례를 따르게 되면 사료에 나타나는 종족을 열거하는 것으로 서술을 끝마치게 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오늘날 역사학의 입장에서 사료를 다루고 이를 해석하는 작업은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문헌자료가 지니는 시간적인 제약때문에 민족의 기원문제를 문헌으로만 해결하기에는 역시 한계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문헌자료를 뛰어넘고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한없이 넓히는 영역으로는 고고학이 있으므로 우리는 당연히 이 분야의 도움을 얻어야만 문제의 핵심에 한발짝 더 접근하게 된다. 실제로 고고학은 문헌이전의 역사와 문화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시키고 또 그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자료들을 내놓게 되므로 문헌자료와 더불어 고고학의 활용은 가히 쌍벽을 이룬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또 있다. 고고학의 발굴을 통해서 우리는 인골의 잔해들을 수습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자료들은 체질인류학의 관점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받을 수가 있다. 선사시대의 인골이 완전하게 보존되는 경우에는 그 수가 증가하면 할수록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어 민족의 기원을 해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체질인류학은 당대의 인골뿐만 아니라 현대의의 측정치를 유추해서 그 당시의 자료와도 비교해볼 수가 있으므로 수치의 유사성과 상이성이 흥미있는 결과를 내놓게 된다. 끝으로 언어학의 도움을 받는 것도 민족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 여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민족과 비교를 하는 것은 우리나라 민족의 단위를 설정하는데 더욱 긴요함으로 끝없는 자료의 비교검토가 필요하다.

이러한 여러 분야의 결과가 종합적으로 마련될 때 우리가 바라는 민족의 기원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되지만 문제의 해결은 결국 역사학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빛이 보이게 된다.

지난날 우리나라 민족의 기원이나 민족의 단위를 어떻게 보아왔는지를 한번 일별해보는 것은 뒤에 가서 우리나라 민족의 기원, 형성을 언급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실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민족에 대해서 논한 것을 보면 극히 단편적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의 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일찌기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인들은 한국의 자연환경이 대륙과 해양으로 연접하였다는 점에서 대륙족과 해양족으로 구성되었다고 보기도 했다.
 

퉁구스족


퉁구스족 몽고족과의 관계

이 경우에는 문헌에 나타나는 몇개의 종족명을 예로 들었으나 설득력은 아주 약한 편이었다. 한말에 우리나라에 왔던 '헐버트'(Hulbett)는 우리의 삼한(三韓) 지명중에 보이는 다음절이 인도의 드라비다어(Dravidians)와 유사하다고 보고 이외에도 몇가지 예를 들면서 삼한의 주민을 소위 남방민족과 연결시켜보려고 하였다.

일찌기 '달레'(Dallet)도 조선어문법이 드라비다어와 유사하다고 비슷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민족이 중국족의 일족이 아니고 달단인(韃靼人)에서 분기된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문헌에 나오는 자료를 이용해서 한민족을 언급한 일본인으로는 '나가'(那珂通世)가 있다. 그는 북쪽의 맥(貊)과 남쪽의 한종(韓種)으로 우리나라 민족이 이루어졌다고 보았거니와 이것은 뒤에 '이마니시'(今西龍)도 같은 견해를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보다 문헌자료를 한층 심도있게 다룬 일본인으로는 '시라도리'(百鳥庫吉)의 논문만이 유일한 학구성을 띠었다고 볼 것이다. 그는 '삼국지'동이전에 나오는 7개의 어휘를 언어학으로 분석해서 예맥(濊貊)의 언어는 다량의 퉁구스어에 소량의 몽고어가 혼입돼 있다고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는 예맥족이 퉁구스족을 골자로 해서 몽고족이 가미된 잡종이라는 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도리야마'(鳥山喜一)도 한국족을 퉁구스족이라고 보면서도 몽고족의 혼입이 있으므로 순수한 퉁구스족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가 하면 '고야마'(小山榮三)는 한국인을 퉁구스족과 중국인의 혼혈인종으로 간주하였고 '이나바'(稻葉岩吉)는 한족(漢族) 및 동호계(東胡系)의 민족으로 파악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인의 퉁구스족설은 '白鳥'와 '鳥山' 등의 견해에서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한때 일선 동조론을 주장하였거니와 대륙침략으로 국세를 떨치게 되자 이제는 만주와 조선을 한데 묶는 만선사관으로 변화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민족을 북쪽의 민족들과 연결시킨 것은 모두가 직접, 간접으로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한국민족을 독립적인 민족단위로 인정하기 보다는 중국민족의 한 지파거나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따라서 준한족(準漢族)처럼 여기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이민을 많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깊게 고려한데서 나온 듯하다.

중앙아시아 전래설과 고아시아족설

여기서 우리는 '시로코고로프'(Shirokogoroff)의 입장을 잠시 볼 필요가 있다. 일찌기 그는 퉁구스족의 남방기원설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의 설은 뒤에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그의 저서 '북방퉁구스족의 사회조직'속에서 고아시아족에 관해서 언급을 하고 있다.

그가 한국민족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민족들의 지리적 분포를 작성한 것을 보면 한국민족을 기원전 3천년 전부터 고아시아족들의 분포지역으로 표기를 해놓고 있다. 이것은 한국민족이 기원전 3천년전부터 기원후 1천년까지도 고아시아족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지나날 우리나라 학자들은 대체로 일본일들의 견해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한국 민족이 퉁구스족이거나 퉁구스족의 일파라고 보았다. 한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한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왔다는 최남선의 설인데 그의 '불함문화론'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뒤에 조지훈도 위의 견해를 받아들여 한국민족의 독립적인 단위를 설정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한민족의 퉁구스족설은 워낙 널리 알려져 있어 충분한 비판없이 국민들 사이에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점에서 김정학의 견해는 다르다. 그도 한민족의 단위를 독립적인 계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우리 민족의 퉁구스족설을 비판하고 나섰다.

우리는 위에서 우리나라 민족을 어떻게 보아왔는가 하는 점에서 여러 의견을 간략하게 검토해보았다. 이러한 많은 의견 가운데서 한단계 더 올라가려고 하면 이중에서 다시 간추리고 비판하면서 정선을 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나라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왔다고 하는 설을 보면 근거가 되는 자료가 거의 없다. 한가지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체질인류학에서 말하는 단두형의 문제라고 보겠다.

우리 민족은 두개골의 형에서 볼 때 단두족에 속하며 이 분포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중앙아시아와 헝거리 등지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중앙아시아는 역사적으로나 또는 고고학적으로도 연결이 되지 않고 있어 우리 민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러한 견해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크게 풍미하였던 전파론의 영향에서 결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이야기한 한국민족의 고아시아족설도 다시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원래 시베리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는 고아시아족이라는 선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뒤에 오는 종족한테 밀려나 오늘날도 흑룡강 넘어 시베리아 등지에서 여전히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민족이 전적으로 고아시아족이라는 것은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오늘날 퉁구스족의 기원지로는 바이칼 지방을 지목하고 있고 동남쪽으로 오면서 고아시아족과 결합한 것이 퉁구스족인바 이 사실을 우리는 크게 주목해야 한다.

문헌으로 볼 때 숙신(肅愼) 읍루(挹婁) 말갈(靺鞨) 여진(女眞)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퉁구스족은 분명히 우리나라 민족과는 거리가 먼 존재임을 쉽게 간취할 수 있다.

구석기시대의 한국민족 형성은 속단

우리나라 민족은 위에서 본 퉁구스족과는 문헌으로 보거나 역사에 비견해도 결코 동일시 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한국민족을 퉁구스족과 연결시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

일찍부터 중국의 문헌에는 우리 민족이 동이족의 범위에 들고 있고 구체적인 족명으로는 예(濊) 맥(貊) 한(韓)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문헌에 따라 한민족을 예맥한(濊貊韓)으로 보는 것은 옳은 일이다·그러면 문헌 이전의 주민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에는 40~50만년 전에 해당하는 전기 구석기시대가 있었고 또 유적과 유물들이 있다. 그리고 10만년 전의 중기구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3~4만년 전의 후기구석기문화의 유적, 유물도 있다. 이들 유적 가운데서 희귀한 예가 되기는 하지만 인골의 잔흔도 있다.

이것은 위의 각 시대에 각기 이 땅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뜻이 된다. 때때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때마다 한국민족의 형성이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려는 견해가 있으나 이것은 속단이라고 볼 것이다.

한국민족의 기원이나 형성을 구석기시대에서 구하려 한다면 상당한 자료의 증가가 필요하고, 결정적인 역사의 계기성을 오늘의 한민족과 연결시켜야 하는 난제가 있으므로 끊임없는 주의가 요망된다. 구석기시대라는 장구한 기간은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변화에 충분한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4~5천년 전부터 이 땅에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토기가 등장하는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의 유적들은 주로 강변이나 해안에서 발견되고 있고 지역적으로도 제한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의 바로 한강변인 암사동 같은 곳이 좋은 예증이 된다. 이들의 주거지가 강변이나 해안에 있다는 것은 경제적인 생활의 기반이 어로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도 지역에 따라 특수한 토기가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 시베리아 지역의 토기문화와 상통하고 있다. 더 멀리는 핀랜드지역과 아주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 땅에 신석기문화를 남긴 주민들은 누구일까 하는 의문에 부딪친다. 소련의 저명한 고고학자'오크라드니코프'(Okladnikov)는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담당자는 고아시아족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이 의견에 동의를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고자 한다.

원래 고아시아족은 선주민으로 넓게 동북의 대륙지역에 퍼져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이러한 주민들과의 연관속에서 비슷한 문화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석기시대의 문화는 중국의 문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상이한 문화이다.

신석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를 결합한 예맥한(濊貊韓)이 우리 민족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문화는 토기문화에 변화가 오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는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토기는 신석기시대의 토기와는 달리 토질이나 외양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더러는 유사성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차이점이 나타난다. 토기의 밑이 편편한 이러한 형식은 송화강(松花江)지역 남쪽과 만주지역 등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연대가 조금 더 내려오면 요령지역(搖寧地域)등과도 밀접한 문화의 관련이 나타난다. 무문토기(無文土器)의 유적이 이제는 주로 구릉지역이나 야산에서 보이고 있어 경제생활도 전시대와는 크게 차이가 나고 있다.

묘제(墓制)에서도 지석묘 석관묘 적석총 등의 전혀 새로운 문화가 일어나고 있다. 청동기문화의 꽃이라고 하는 비파형단검(琵琶形短劍)이 요령지방과 한반도에서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게 된다. 이 주민들은 농경을 하기 때문에 정착생활을 영위하기 시작 하였으며 분명히 이 문화의 여러 요소는 먼저 시대와 큰 차이가 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문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거의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우리는 무문토기를 사용하는 넓은 의미의 청동기시대 주민들이 중국의 사서에 등장하는 예맥한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얼마되지 않은 신석기시대의 유문토기인(有文土器人)들을 흡수, 병합하면서 무문토기와 청동기문화를 이 땅에 남기게 되었다. 이 문화가 일본의 구주(九州)지역 등지로 주민과 함께 건너가 일본의 청동기문화인 야요이(弥生)문화를 이루는 뼈대를 구성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족이 체질인류학적으로 단두형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백인들은 물론 장두형으로 우리와는 아주 다르다. 그런데 두개골이 많이 남아있는 일본 야요이문화의 주민들의 두형이 단두형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갔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무문토기, 청동기를 사용한 주민부터는 그 이후 철기문화와 역사시대로 연결이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민족의 형성에 근간이 되는 주민이었음을 알게 됐다.

퉁구스족이 고아시아족을 융합하면서 이루어졌듯이 한국민족도 신석기시대의 주민과 문화를 흡수, 병합하면서 독립적인 예맥한으로 발전, 하나의 독자적인 민족단위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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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김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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