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트와이스 팬 사인회 갈 건데, 사인 받아오고 코사인도 부탁할까요?”
잠깐 사이에 이공계 출신인 기자마저도 ‘이과 망했으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공계 개그’가 난무했다. 세미나룸에 모인 학생들은 박장대소했다.
농담마저도 수학과 물리로 점철된, 수학과 물리 없이는 못 산다는 울산과학기술원(UNIST) 수학물리동아리 ‘엘리트 오브 엘리츠(EOE·Elite of Elites)’를 5월 9일 만났다.
“열방정식 풀려면 푸리에해석학 알아야”
EOE는 UNIST가 개교한 2009년 결성됐다. 개교 당시 UNIST에는 수학이나 물리 관련 학과가 없었다. 그래서 전공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모여 EOE를 꾸렸다.
EOE의 수학과 물리에 대한 사랑은 학부 개설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EOE 홍보부장이었던 이민지 씨(수리과학과 3학년)는 “수리과학과와 물리학과가 포함된 자연과학부는 2014년 개설됐다”며 “EOE의 활발한 활동이 학부 개설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EOE 부원의 전공은 매우 다양하다. 작년과 올해 EOE에 가입한 39명 가운데 수리과학과나 물리학과를 주전공으로 지망하는 학생은 12명.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UNIST는 1학년 때 학과를 따로 선택하지 않는 무학과로 운영하며, 2학년 때 주전공과 부전공을 선택한다). 기계공학과, 컴퓨터공학과, 전기전자공학과뿐만 아니라 산업디자인과, 경영공학과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활동하고 있다.
EOE의 특징은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두 분야를 동시에 다루는 학술동아리라는 점이다. KAIST ‘수학문제연구회’, 포스텍 ‘마르쿠스’, 이화여대 ‘SEM’ 등 수학으로 뭉친 동아리는 있지만 EOE처럼 수학과 물리를 동시에 섭렵하는 동아리는 국내 대학 중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EOE는 왜 수학과 물리학을 함께 다루는 걸까. 기자의 질문에 EOE 부원들은 오히려 수학과 물리학을 떼놓고 생각할 수 있느냐며 되물었다.
김은서 씨(기계공학과 4학년)는 “물리학은 수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며 “물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 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경돈 씨(수리과학과 4학년)는 “물리학에서 열방정식을 풀기 위해 조화해석학과 푸리에해석학, 편미분방정식이 발달했듯이 수학 이론은 물리학과 함께 발전해왔다”고 말했다.
이민지 씨는 수학 또한 물리학과 떼놓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수리과학과 전공과목인 동적시스템을 예로 들었다. 동적시스템은 물체의 움직임을 미분방정식으로 해석하는 과목이다.
그는 “동적시스템은 예시문제가 모두 물리학과 관련 있다”며 “수학과 물리는 따로 떼놓을 수 없는 한 몸과도 같은 관계”라고 말했다.
올해 EOE에 가입한 조홍준 씨(1학년)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입시 준비 외에는 수학이나 과학에 관한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다”며 “순수한 학술적 활동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수학과 물리를 모두 공부할 수 있는 EOE에 가입했다”고 말했다.
이민지 씨는 “수학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과 이을 수 있는 징검다리”라며 “수학을 공부하면서 ‘이걸 어디에 써야 하지’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EOE 부회장인 서지하 씨(물리학과 2학년)는 “원칙적으로는 부원을 모집할 때 수학부와 물리부를 따로 모집하지만, 실제로는 함께 활동한다”며 “수학과 물리학 사이에 접점이 많다 보니 서로의 분야에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리만가설, 열역학…한 학기에 스터디 9개 진행
EOE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스터디와 세미나, 그리고 외부 활동이다. 스터디는 선후배를 잇는 동아리의 근간이 되는 활동이다. 1학년을 대상으로 공부하고 싶은 주제를 받은 뒤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선배를 멘토로 이어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보통 한 학기에 9개의 스터디를 선정한다.
스터디 종류는 다양하다. 물리학도들을 위한 수학 스터디, 물리학 이슈에 관한 토론, 수리물리학에 관한 스터디 등 수학과 물리에 관련된 다양한 스터디가 개설된다. 강의에서 배울 수 없는 내용이나, 강의에서 짧게 언급될 뿐 깊게 다루지 않는 내용에 대한 스터디가 주를 이룬다.
최경돈 씨는 “수리논리학의 한 분야인 모델 이론*을 스터디한 적이 있다”며 “상대적으로 비주류 분야도 스터디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9개 학술 스터디 외에 수학사나 물리학사를 연구하는 스터디, 수학과 물리를 다른 학문과 융합하는 스터디도 있다. 김은서 씨는 “기계공학과에서 사용하는 물리와 수학을 공부하는 스터디를 한 적이 있다”며 “학과의 특성상 물리와 수학을 쓸 일이 많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최경돈 씨는 “맛집 탐방 같은 친목을 위한 스터디도 자주 열리는 편”이라며 “스터디는 동아리 안에 있는 작은 동아리”라고 설명했다.
세미나는 학기 중 진행한 스터디 활동을 다른 부원과 공유하는 시간이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열리며, 스터디 팀들이 돌아가며 연구 활동을 발표한다.
서지하 씨는 “매주 수학 스터디와 물리 스터디를 하나씩 선정해 세미나에서 발표한다”며 “수학과 물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다루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오후 8시 UNIST의 한 강의실에서 열린 EOE 정기 세미나를 찾았다. 이날 주제는 리만 가설과 열역학이었다. 리만 가설은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이 세운 가설로 현재까지도 완벽하게 증명되지 않은 정수론 최고의 난제로 꼽힌다. 열역학은 에너지와 열의 관계를 다루는 물리학의 주요 분야다.
리만 가설을 담당한 팀은 리만 가설의 등장 배경과 중요성, 그리고 현재 어디까지 해결됐는지 발표했다. 열역학 팀은 열역학적인 엔트로피(무질서도)의 정의부터 통계적 엔트로피, 정보 엔트로피 등 엔트로피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설명하고, 엔트로피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여러 현상을 발표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졌다. 동아리 선배인 정세진 씨(생명과학과 석박사통합과정)가 “엔트로피에 대한 식을 풀 때, 증명 과정에 비약이 있는 것 아니냐”고 질문하자 방세훈 씨(환경공학과 2학년)가 “조건을 만족하면 결과가 로그로 나오면서 식이 성립된다”고 받아쳤다. 그 순간만큼은 EOE 세미나는 작은 동아리 세미나가 아니라 하나의 학술대회였다.
‘토론이 습관’인 EOE의 분위기는 취재 중에도 드러났다. 한 부원이 ‘푸앵카레 원판*’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이를 시작으로 약 10분간 수학, 물리학, 천문학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당연히 취재는 중단됐다. 서지하 씨는 “일상마저 수학과 물리가 지배하는 진정한 ‘덕후’들이 모인 곳이 EOE”라며 웃었다.
신입생 위해 시험 기간에 공개강의
EOE는 외부 활동을 통해 수학과 물리학 공부의 즐거움도 알리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공개강의다. 공개강의는 일종의 재능 기부 형태로 진행된다. 최경돈 씨는 “미적분학과 일반물리학을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1학년을 위해 시험 기간에 공개강의를 연다”며 “부원 중에서 강사를 선발해 수업을 진행하는데, 신입생들에게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EOE는 응용선형대수학이나 미분방정식 등 전공을 다루는 공개강의도 가끔 연다.
UNIST가 진행하는 고등학생 연구 활동 지원 사업인 ‘클럽 투 클럽’과 교육부가 주관하는 대학생 교육 기부 프로그램인 ‘쏙쏙캠프’ 등에도 참여해 과학도를 꿈꾸는 학생들과 지식을 나누는 활동도 하고 있다. 다른 대학의 수학동아리와 교류도 한다.
김은서 씨는 “수학과 물리는 함께 공부하면 그 즐거움이 배가 되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며 “앞으로 활발하게 활동해 UNIST, 나아가 모두에게 수학과 물리가 주는 특별한 즐거움을 전달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 모델이론
대수학이나 집합론에서 수리논리학적 도구를 이용해 수학적 구조를 연구하는 분야
* 푸앵카레 원판
쌍곡공간을 원판에 투영한 것으로 쌍곡기하학에서 쓰이는 모형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