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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한국 우주인 도전기 한국형 SF소설 ‘중력’

2006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우주인 선발 공고가 있었다. 10대 학생부터 중년의 대기업 사장, 생물학 연구원까지 우주를 꿈꾸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선발에 지원했다. 
TV에서는 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강조했지만, 현실은 고달프고 힘든 상황이었다. 지원자들은 생업이 걸린 현실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도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려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SF소설 ‘중력’은 당시 이런 선발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취재했던 작가가 13년에 걸쳐 새롭게 쓴 우주인 도전기다. 희박한 확률을 뚫고 우주인이 될 자는 과연 누구일까. 


한국에서 영화 장르를 분류할 때 ‘SF/판타지’는 ‘액션/스릴러’ ‘로맨스/멜로’처럼 한 쌍으로 처리되곤 한다. 말하자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영화 ‘스타워즈’와 ‘반지의 제왕’ ‘인터스텔라’ ‘해리포터’를 비슷한 장르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과학이 미신적·주술적 세계를 탈(脫)신비화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음을 고려하면, 판타지와 SF(science fiction)는 비슷한 장르이기는커녕 서로 ‘상극’의 장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판타지는 왕좌에서 쫓겨난 타르가르옌 가문의 공주가 용을 타고 불을 뿜으며 어둠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같은 것이고, SF는 호박(琥珀)에서 쥐라기에 멸종한 공룡의 DNA를 추출해 복제 공룡 테마파크를 만드는 이야기(영화 ‘쥬라기 공원’) 같은 것이다.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만 따지면, 판타지와 SF는 사실 혼동의 여지가 없다. 

 

▲ 대표적인 SF영화들의 포스터. SF는 판타지와 달리 과학적 근거가 바탕이 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SF와 판타지가 비슷한 장르로 인식된다. 똑같이 비현실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과학이 판타지인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SF/판타지’가 비슷한 장르로 인식되는 이유는 아마도 과학적 근거의 유무와 상관없이 한국인에게 두 장르가 모두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 서로 소통할 수 있을까?’(영화 ‘콘택트’) ‘로봇과 인간의 사랑은 가능할까?’(영화 ‘바이센테니얼 맨’) ‘더 이상 인간이 살 수 없게 오염된 지구를 떠나 인류는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을까?’(영화 ‘인터스텔라’) 같은 SF의 질문은 적어도 한국에서 한국인이 답할 만한 문제는 아니다. 


우주인과 소통을 하거나, 우주 침략자에 맞서 싸우거나, 로봇과 사랑하는 등의 이야기는 ‘지구 연합’의 중심,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을 배경으로 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비현실적이고 어색해진다. 외계인을 납치해 물파스로 고문해 지구를 구하려 하는 병구의 이야기(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SF라기보다는 코미디에 가깝다. 


이렇듯 한국인에게 현실적이지 않은 SF의 질문들은 ‘호빗 프로도는 악의 세력의 저항과 유혹을 뚫고 사우론의 절대반지를 파괴할 수 있을까?’(영화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의 비현실적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게 다가온다. 


물리적 중력 vs. 사회적 중력 


권기태 작가의 SF소설 ‘중력’은 한국 최초로 국제우주정거장에서 과학 실험을 수행할 우주인을 선발하는 과정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2006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주관한 한국인 최초 우주인 배출 사업을 모티프로 삼고 있지만, 주인공 이진우와 그의 경쟁자 김태우, 정우성, 김유진 등은 고산, 이소연 같은 실존인물과는 거리가 있는, 작가가 창작한 인물이다. 


신문기자 출신인 권 작가는 방대한 양의 취재 자료와 13년 동안의 창작과 거듭된 개고 과정을 통해 우주인 배출 사업의 전모, 한국 대전에서 러시아 유리 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센터를 오가며 진행된 우주인 후보 훈련 과정, 그리고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탑승자 교체의 진상 등을 유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문장으로 되살려낸다. 


이렇듯 ‘중력’은 과학자와 과학의 관점에서 우주인 선발과 훈련 과정을 다룬, 부인할 수 없는 SF소설이다. 하지만 ‘중력’은 할리우드 SF와는 전혀 다른 장르인 것처럼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 ‘그래비티’와 비교하면, 왜 이 소설을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한국형 SF’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지 명확해진다. 


‘그래비티’는 우주에서 임무 수행 중 사고를 당해 우주 미아가 된 주인공이 중력이 있는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사투를 그린 이야기이다.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 외톨이가 된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 중력이 있는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린 딸을 잃고 삶의 의지를 잃었던 샌드라 불럭이 이와 같은 우주에서의 모험을 통해 삶의 의지를 회복한다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지만, ‘그래비티’에서 중력은 기본적으로 지구 중심으로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인 물리적 중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권 작가의 소설 ‘중력’에서 우주로 가고자 하는 주인공 이진우의 꿈과는 반대 방향인, 땅과 지구 중심으로 그를 끌어당기는 힘은 단지 물리적 중력만은 아니었다. 생태보호연구원의 선임연구원인 이진우는 우주에서 다양한 과학실험을 하고 싶다는 과학자로서의 욕망만 있는 단순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우주를 동경했으나 열 살 때 뇌종양으로 생을 마감한 여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그의 직장은 민영화를 앞두고 있었고, 그는 팀장과의 갈등으로 사직 압력을 받았다.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용인의 작은 아파트는 대출금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어린 두 딸과 번번이 사업에 실패하고 초라하게 늙어가는 아버지가 있었다. 설령 그가 우주인으로 선발돼 국제우주정거장에서 한동안 생활한다 하더라도, 물리적 중력보다 더 강력한 ‘사회적 중력’이 그를 지구 중심으로 끌어당길 것이었다. 


우주인 후보 4인에 뽑히면 1년 동안 휴직해야 했고, 탑승과 백업 우주인인 최종 2인에 선발되면 우주 임무를 마친 뒤 우주산업연구원에서 의무적으로 2년을 더 복무해야 했다. 우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선발 경쟁을 통과해야 함은 물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와 같은 사회관계의 실타래도 깔끔히 풀어내야 했다.  


또 다른 우주인 후보 김태우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전기공학연구원에서 일하다가 우주인이 되고 싶어 미국으로 유학 가 항공공학으로 전공마저 바꾼 ‘우주 덕후’였다. 언젠가 한국에서도 우주인을 선발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우주인 선발 공고가 나기 전부터 우주인 선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지식을 쌓고, 체력을 기르는 등 준비된 우주인 후보였다. 그런 김태우도 우주인 후보 2인에 포함되면 우주인의 꿈을 포기하든, 7년 안에 학위를 받아야 하는 박사과정을 그만두든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문제로 고민했다.  


이처럼 ‘중력’에서는 후보자들이 우주인이 되기 위한 육체적·지식적 경쟁보다는 직장, 가족, 진로에 대한 걱정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허비한다. ‘중력’과 같은 한국형 SF와 비교할 때 과학과 과학적 고민만 존재하는 ‘그래비티’와 같은 할리우드 SF는 물리적 중력과 사회적 중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판타지인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이진우를 끌어당기는 중력은

지구 중심 방향으로 작용하는 물리적 중력만은 아니었다"

 

 

▲ 할리우드 SF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 다른 해외 SF영화와 마찬가지로 과학과 과학적 고민을 주로 다루고 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 


가장 성공한 SF 콘텐츠로 꼽히는 ‘스타트렉’은 1966년 미국 NBC에서 방영된 오리지널 시리즈를 시작으로 지금껏 반세기 이상 거듭 시즌을 갱신해 왔다. 지난 4월 방영을 종료한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시즌2를 포함해 TV 시리즈,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제작된 에피소드가 무려 1000여 편에 이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지상파와 케이블을 통해 몇 차례 방영됐으나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필자는 그 이유가 ‘스타트렉’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도입부로 등장하는 다음 문구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주, 최후의 개척지(frontier). 우주선 엔터프라이즈호는 항해한다. 이들의 거듭된 임무는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새로운 생명과 문명을 발견하고,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where no one has gone before)으로 대담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대담하게 나아가는 엔터프라이즈호의 항해에 열광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대체로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에 목숨의 위험까지 감수해가며 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하며, 또한 그런 것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한국인들은 누구나 가본 곳, 예컨대 파리의 에펠탑이나 베이징의 자금성 같은 곳에 자신도 한번 가보는 것을 더 갈망한다. 


소설 ‘중력’의 우주인 후보들은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되기 위해 경쟁하지만, 한국 최초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보다 앞서 이미 수백 명의 지구인들이 우주에 다녀왔다. ‘중력’에서 작가가 밝히고 있듯, 우주에 다녀왔기 때문에 기억될 이름이라면 세계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사실상 유일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이제 우주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도, 그렇다고 누구나 가본 곳도 아니다. 그만큼 모두가 매력을 가질 만한 공간은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2006년 우주인 배출 사업에 지원한 사람들은 3만7000여 명에 달했고, 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주인이 되고 싶은 강렬하고 진지한 꿈을 지니고 있었다. 


2006년 그들의 도전은 왜 소중했으며, 왜 그것이 마지막 도전이 돼서는 안 되는 것일까? 소설 ‘중력’은 어쩌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토론을 한국 사회에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 전봉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글쓰기와 문학 그리고 과학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등 다수의 책을 펴냈다.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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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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