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과학기술문명은 인간의 생존방식을 엄청나게 진보시킨 반면 적절한 제어능력을 상실해 인류문명 전체에 대한 위기상황을 초래했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과학자는 아인슈타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인슈타인이 그만큼 많이 이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아인슈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그의 학문이 난해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학문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숨길 수 없는 사실이겠으나, 설혹 그의 학문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해서 이러한 학문을 할 수 있었으며 또 이러한 학문을 통해서 그가 도달하게 된 경지가 무엇인가를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아인슈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룩한 학문과 함께 이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동시에 이를 통해 다시 다듬어진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학에서의 진정한 창의적 업적은 하나의 세계관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동시에 과학자가 지니는 세계관은 이러한 과학의 성과에 의해 한층 원숙한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기존관념에 도전했던 아인슈타인
이러한 점을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혁명적인 새 과학을 이룩한 아인슈타인의 업적이 무엇을 바탕으로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뉴턴에 의해 그 절대성이 천명되고 칸트에 의해 다시 그 철학적 정당성이 부여된 기존의 시간 공간개념을 과감히 수정하여 상대론적 시공개념을 제창하고, 이를 통해 종래에 철통같이 믿어졌던 고전역학을 새로운 형태의 상대론적 역학으로 바꾸어 놓은 그의 학문 바탕에는 자연의 심오한 조화와 우주의 보편적 질서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있으며, 이와 함께 기존의 관념들을 철저히 파헤쳐 그 불완전성을 과감히 노정시킨 날카로운 비판적 자세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신념과 자세는 물론 어떤 확고하고 투철한 세계관의 뒷받침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상 아인슈타인은 전문 학문에 대한 수련 못지않게 이러한 세계관의 구축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온 듯하다. 그가 젊은시절에 당시의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여러가지 독특한 행동양식으로 보여 온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는 일이다. 그는 아마도 매우 일찍부터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상을 추구해온 듯하며 이것에 맞지 않을 경우 그 어떤 권위를 지닌 가르침에도 굴복할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그가 어린 소년으로 국가와 교회의 권위에 대해 강력히 저항했던 것도 이들이 그가 설정해 놓은 세계관 속에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내용들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의 이러한 세계관은 자신의 학문적 경험이 깊어 갈수록 더욱 세련되어 갔으며 그 내용은 전문 분야 이외의 여러 관심사에 대한 그의 글과 발언을 통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과학과 사회 전반에 관해 많은 양의 글을 발표했으며, 그의 발언과 영향력은 과학이라는 통상적 테두리를 벗어나 철학과 윤리의 문제는 물론 심리학 언어학 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뻗어나가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 자신이 지닌 지적 신념, 즉 그 세계관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특히 만년의 학문이 오히려 경직되는 경향을 보였다는 지적도 있으나, 적어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학문적 성취를 그가 지녔던 세계관과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이해하려 해서도 안된다는 점이다.
과학이 말해주는 또하나의 메시지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점은 아인슈타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많은 창조적 과학자들이 그 학문의 바탕에 어떤 세계관적 전제를 깔고 있었으며 그들의 학문은 직접 간접으로 이러한 세계관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보른 슈뢰딩거 등 현대 양자역학의 기반을 이룬 과학자들의 경우 이러한 점들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과학자들에게 요구되는 이러한 세계관적 기반은 오직 창의적 과학을 이룩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와 같이 이러한 과학을 바탕으로 막강한 기술문명이 구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학자가 지녀야 할 세계관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층 더 절실한 의미를 띠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현대 과학기술 문명은 지금까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과학기술이라 불리는 인간의 기술적 행위 능력은 그 본래적 기능에 있어서 인간의 생존을 돕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다시 인간의 내적 욕구와 결합되어 지금까지는 가능하지 않았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 내고 이러한 수요는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새로운 욕구를 불러 일으킴으로써 욕구의 충족과 욕구의 창출 사이에 끊임없는 상승작용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효과적인 견제의 수단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전통적인 윤리관이나 가치이념들도 이러한 새로운 상황 앞에 그 힘을 잃거나 제어능력을 상실했으며 오직 각 개인의 본능과 각 개별 집단들의 집단 이기심에 맡겨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한 마디로 이러한 위기상황은 현대의 과학기술에 힘입어 인간의 행위능력이 엄청나게 커진데 비해 '적절한 행위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간의 판단기준, 즉 그 세계관 및 가치관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 이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프랑스의 저명한 과학자 모노(Jacques Monod)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과학이 맺어준 열매는 즐겨 따먹으려 하면서도 과학이 말해주는 메시지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즉 현대인은 과학이 전해준 엄청난 힘은 활용하면서도 과학이 말해주려 하는 지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밤중에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엄청난 속도로 차를 달리면서도 전조등이 비춰주는 창앞을 내다보려 하지 않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과학을 통해 얻게 된 힘과 과학이 보여주는 세계상은 사실상 동일한 원천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이 둘 사이에 반드시 조화가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그 한쪽만을 택하려 하는 데에 위험이 있는 것이다.
사실상 현대과학은 우주와 인간에 대해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들을 진지하게 받아 들여 그 속에서 하나의 의미를 되새겨볼 경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귀중한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우주 속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어떠한 위치에 놓인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고 오직 본능에만 따라 행동하거나 무비판적으로 기존의 가치관념에만 매여 행동할 경우 엄청난 위험을 저지를 수 있다.
무한한 우주와 유한한 생명체
그렇다면 과학이 말해주는 세계상은 무엇이며 이것을 엮어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메시지란 무엇인가. 이는 물론 앞으로 우리 모두 함께 찾아 보아야 할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겠으나,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들을 중심으로 그 중요한 면모만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로 현대과학은 우주의 엄청난 시간적 공간적 규모와 그 안에 성립되는 엄격하고 조화로운 자연질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세계에 비해 너무도 방대하고 장엄한 것이어서 설혹 우리가 이 안에 새겨진 의미를 손쉽게 포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속에 함부로 침해하지 못할 어떤 위엄이 있으며 또 그 질서와의 조화 속에서 살아가야 하리라고 하는 당위적 의식을 감지하게 된다.
둘째로 현대과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지구상의 신비로운 각종 현상들의 발생 및 성장과정들을 먼 과거까지 추적하여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이들 사이의 미묘한 상호의존적 존재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인간뿐아니라 사회와 인류, 그리고 전체 생태계 등 보다 고차적인 생명의 단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유한한 개인의 삶에 지나치게 연연할 것이 아니라 전체로 이어진 커다란 삶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차적인 가치의식을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 한 세대가 살고 있는 기간이 전체 생태계의 역사 안에서 보면 얼마나 짧은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지구 생명의 역사를 35억년으로 잡을 때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세대라는 것은 그 1억분의 1에 불과하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유한한 부존자원이 앞으로 다시 수십억 혹은 수백억년 이어질 생태계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극히 유용하게 활용할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이러한 자원의 대부분을 고갈시킨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인식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바로 우리 세대가 생명의 역사 위에 하나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 결정적 세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수십억년만에 처음으로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역사를 지닌 어떠한 존재인가를 비로소 파악하게 되었을 뿐아니라 이 생태계의 운명을 의식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존재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현대 과학이 말해주는 이러한 점들은 물론 과학자들 뿐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지성인들이 현대 문명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함께 받아 들이고 실천해 나가야 할 내용들이겠으나, 특히 오늘의 과학자는 누구보다도 앞서서 이러한 세계관을 확고히 갖추고 그 연구 작업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학이 말해주는 메시지에 대해 과학자 자신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마치 자신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을 스스로 믿지 않겠다는 태도만큼이나 우스꽝스런 일일 뿐 아니라 과학기술 문명을 통해 인류를 멸망시키는 일에 스스로 자청해 나서겠다는 자세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또한 자기 자신이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활동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세계관을 현대인의 의식 속에 확고히 심어줌으로써 인류의 과학기술문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새 임무가 부여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학문이전에 뚜렷한 세계관 지녀야
한편 현대 과학이 말해주는 이러한 세계관이 완전한 것이 아니며 또 이를 통해 현대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리라고 쉽사리 낙관해서도 안된다. 과학자의 작업이라는 것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합당한 새 세계관을 마련하는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상 새로운 세계관과 이에 맞는 새 가치관을 마련하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시기에 있어서도 꾸준히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며, 특히 그 시대의 기술적 행위능력과 비교하여 지속적인 균형과 조화가 유지되도록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분된 여러 연구분야에서 새로운 결과들이 쏟아져 나오며 이에 맞추어 기술적 행위능력이 급속도로 신장되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균형과 조화를 유지해 나가기가 매우 어려워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작업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이르러 과학이 기술과 제휴하여 과학기술 형성에 중요한 몫을 하게 됨에 따라 과학 본연의 기능, 즉 자연과 인간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이해를 도모한다는 기능이 망각되는 경향마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이야 말로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문명속에서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며, 현대 과학이 밝혀낸 지식을 동원하여 우주와 인간의 차 모습이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찾아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를 창출해내는 작업이 이 시대에 요청되는 가장 긴요한 과제임을 앞으로 과학자가 되려는 젊은 세대들은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는 좁은 의미의 과학 학습에만 몰두함으로써 저절로 이루어지는 간단한 일들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젊은 시절의 아인슈타인이 보여준 바와 같이 확고한 권위를 지닌 기존의 모든 사회적 통념과 질서들에 대한 투철한 비판정신과 함께 창의적 새 과업을 수행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깊고 넓은 학문적 소양을 쌓아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이러한 자세와 준비를 갖출 때 오늘의 과학자는 학문 그 자체에서의 창의적 성과 뿐 아니라 현대 문명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상황에서 인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낼 막중한 소임을 담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