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2일, 전 세계의 ‘이벤트 호라이즌 망원경(EHT·Event Horizon Telescope)’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가올 데이터 처리, 영상화, 그리고 까다로운 검증 작업과 토론에 대한 걱정은 잠시 미루고, 그날은 관측을 무사히 마친 것에 만족하며 편안하게 쉬었을 것이다.
EHT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망원경의 자료가 모이는 데는 10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남극은 4월에 겨울에 들어서는데, 이때는 남극 망원경의 데이터를 옮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블랙홀의 강한 중력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현상이 포착됐을까? 과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아니면 일반상대성이론이 예상하지 못한 다른 무언가를 찾게 될까? 걱정 반, 기대 반인 밤이었다.
전 세계 전파망원경 9기 연결
EHT는 전 세계에 산재한 전파망원경을 연결해 지구 크기의 가상 망원경을 만들어 블랙홀의 영상을 포착하려는 국제 협력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가상 망원경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런 가상 망원경을 ‘초장거리 간섭계(Very Long Baseline Interferometry)’라고 한다.
ETH는 전 세계 전파망원경 9기를 연결한 것이다. 미국 하와이주에 있는 SMA와 JCMT, 그린란드에 위치한 GLT, 미국 애리조나주의 SMT, 멕시코 푸에블라주에 있는 LMT,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ALMA와 APEX, 남극의 SPT, 마지막으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IRAM 30m 등 9기가 서로 연결돼 있다.
EHT는 블랙홀 영상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로 우리 은하 중심부와 처녀자리 은하단 중심에 위치한 두 개의 초대형 블랙홀을 선정했다. EHT는 2000년 초부터 준비해 2017년 4월 초대형 블랙홀에 대한 첫 공식 관측을 수행했고, 이후 매년 3, 4월 중 2~3주 기간을 정해 국제 공동 관측을 수행하고 있다.
동아시아 국립천문학 연구기관연합인 동아시아 천문대(EAO),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헤이스텍 천문대와 하버드 스미스소니언연구소, 그리고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등 13개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한국천문연구원은 EAO 소속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블랙홀 주변 빛으로 그림자 관찰
블랙홀은 빛조차 탈출할 수 없어 ‘black hole(검은 구멍)’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런 블랙홀의 존재를 어떻게 영상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
블랙홀의 강한 중력은 사건의 지평선 바깥을 지나가는 빛도 휘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블랙홀 뒤편에 있는 밝은 천체나 블랙홀 주변에서 내뿜는 빛은 왜곡돼 블랙홀 주위를 휘감는다. 왜곡된 빛들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블랙홀을 비춰 블랙홀의 윤곽이 드러나게 한다. 이 윤곽이 곧 ‘블랙홀의 그림자’이며, 이것의 이미지(영상)를 얻는 것이 바로 EHT의 목표다.
21세기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모든 은하 중심에 태양의 100만 배 이상의 질량을 가진 블랙홀이 적어도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블랙홀을 초대형 블랙홀이라고 한다.
초대형 블랙홀 중 일부는 사건의 지평선을 조금 벗어난 바깥쪽에 매우 높은 온도의 밝은 테(강착원반)를 가지고 있거나, 자기장을 동반한 고에너지 플라스마를 빛의 속도와 가까운 속도로 방출(제트)하며 ‘싱크로트론 복사’라는 빛을 낸다.
초대형 블랙홀에서 두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제트는 강한 중력에 의한 왜곡과 블랙홀에 의한 가림, 상대론적 도플러 효과 등 블랙홀에 의해 만들어지는 효과가 없다면 단순하고 대칭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초대형 블랙홀 주변에서는 이러한 효과들이 결합해 기묘하게 왜곡된 그림자가 만들어질 것이다.
강착원반 역시 열적 복사와 함께 싱크로트론 복사를 내기도 한다. 이 대칭적인 원반 모양의 테가 내는 빛도 초대형 블랙홀 주변에서는 블랙홀의 중력과 테가 가진 상대론적 속도 때문에 왜곡된 그림자를 보일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한 블랙홀을, 정확히 말하자면 블랙홀이 만든 그림자를, EHT는 실제로 관측하고자 하는 것이다.
초대형 블랙홀 Sgr A*와 M87 관측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은 ‘슈바르츠실트 반지름(Schwarzschild radius)’이라고도 한다. 이는 회전하지 않는 블랙홀의 중심에서 사건의 지평선까지의 거리다. 쉽게 말해 블랙홀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안에서는 빛도 탈출할 수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블랙홀의 질량과 정비례한다. 따라서 블랙홀의 질량이 클수록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바깥에 놓인 강착원반이나 제트의 규모 또한 커진다. 우리 은하 중심에 있는 태양 질량의 400만 배의 질량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초대형 블랙홀 ‘Sgr A*(궁수자리 A*)’와 처녀자리 A 은하 중심에 있는 태양의 50~70억 배에 이르는 엄청난 질량의 초대형 블랙홀 ‘M87(Vir A*라고도 부른다)’이 EHT의 주요 관측 대상이다.
이들이 이런 암호 같은 이름을 가진 이유는 전파천문학 초기에 전파를 내는 천체를 별자리에 따라 나눠 밝은 순서대로 알파벳을 붙였기 때문이다. 즉, ‘Sgr A’는 궁수자리에서 발견된 가장 밝은 전파 천체이며, ‘Vir A’는 처녀자리의 가장 밝은 전파 천체이다. ‘*(별표〮애스터리스크)’는 그 천체가 블랙홀로 추정된다는 표시다. 이 두 초대형 블랙홀은 그 주변에 밝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 구조를 규명하는 일이 EHT의 중요한 연구 주제다.
이 두 초대형 블랙홀은 EHT로 관측할 수 있을 만큼 블랙홀 그림자가 뚜렷하게 보일 것으로 예측된다. Sgr A*는 우리 은하 내에 있어서 가깝고, M87은 블랙홀의 질량이 매우 크기 때문에 EHT처럼 지구만한 크기의 전파망원경이면 블랙홀 그림자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두 블랙홀의 질량은 1000배 이상 차이가 나서 슈바르츠실트 반지름도 그만큼 차이가 나지만, 태양계에서 M87까지의 거리(약 16Mpc〮1Mpc는 빛이 326만 년 동안 가는 거리)는 우리 은하 중심에 있는 Sgr A*까지의 거리에 비해 약 2000배 멀어서 EHT가 보는 블랙홀 그림자의 겉보기 크기는 Sgr A* 쪽이 더 크다.
건반 빠진 피아노 연주곡 추론하듯 영상 얻어
앞에서 EHT를 지구만한 크기의 가상 망원경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EHT의 분해능은 지구만한 망원경의 분해능과 비슷하지만 그 성능은 지구 크기의 망원경(이 실제로 있다면)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진다. EHT에 참여한 망원경이 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미미하고, 망원경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망원경의 미미한 면적 때문에 EHT의 집광력은 지구 크기의 망원경과 비교할 수 없이 약하고, 그래서 Sgr A*와 M87 같은 밝은 구조를 가진 블랙홀로 관측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망원경 사이의 거리가 촘촘하지 않은 현실은 관측 대상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는 데 제약이 된다.
그러나 다행히 현대의 영상화 기술은 이런 제약 속에서도 관측한 데이터를 믿을 만한 영상으로 복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EHT 프로젝트에서 관측 결과 영상화를 담당하는 케이티 바우만 미국 하버드대 박사후연구원은 이를 건반이 빠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에 비유했다. 건반이 빠진 피아노로 연주하더라도 어떤 곡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EHT 관측으로도 천체의 영상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파망원경 9기로 데이터를 수집하는 원리는 다소 복잡하다. 가능한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관측에 참여하는 망원경 중 두 기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한다고 하면, ‘망원경 수×(망원경 수-1)/2’개의 선을 만들어낸다. 이를 ‘기선(baseline)’이라고 한다.
각 기선은 그 길이에 해당하는 분해능을 가지고, 관측하는 천체에 그만한 크기의 구조가 있는지 확인하는 일종의 체(필터) 역할을 한다. 지구 곳곳에 위치한 망원경을 연결하면 다양한 길이의 기선을 얻게 되므로 천체로부터 오는 빛을 촘촘한 정도가 다른 여러 종류의 체로 걸러서 천체가 어느 정도 크기의 빛 덩어리들이 모인 것인지 파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푸리에 변환’이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 기선별 정보를 공간정보(즉 영상)로 복원하면 원하는 영상을 얻는다. 오늘날 디지털 신호 변환의 기본이 된 이 기술에는 전파간섭계를 개발한 천문학자들의 선구적인 노력이 담겨 있다.
망원경이 사물을 구별하는 능력을 분해능이라고 하는데, 분해능은 망원경의 크기에 비례하고, 관측하는 빛의 파장에 반비례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과 비교해 전파 대역에서 동일한 분해능을 얻으려면 망원경의 크기가 광학망원경에 비해 수천 배 이상 커야 한다. 그렇다면 블랙홀을 굳이 전파 대역에서 관측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빛의 파동성을 활용한 간섭계 기술로 지구만한 크기의 가상 망원경을 만드는 일이 전파대역에서만 가능해서다. 자외선이나 가시광선과 같이 상대적으로 짧은 파장의 빛을 사용해 관측하는 간섭계는 망원경끼리 100m만 떨어져도 영상을 얻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런 차이 때문에 파장이 훨씬 긴 전파대역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높은 분해능을 얻을 수 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초대형 블랙홀 주변에서 싱크로트론 복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싱크로트론 복사는 전파 대역에서 압도적으로 밝게 관측되기 때문에, 블랙홀 주변을 관측하기에는 전파망원경이 적합하다.
4월 초, 사건의 지평선 영상 공개
EHT가 이 프로젝트의 적절한 이름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내부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다. 구성 초기에는 물론 현재까지 EHT와 ‘블랙홀캠(Black Hole Cam)’이라는 이름이 연구자들 사이에서 혼용되고 있다.
필자는 EHT가 과학적으로는 더 적당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블랙홀을 ‘직관’하는 것은 아니고 사건의 지평선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측하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들은 EHT의 관측 성능을 개선해 정지한 블랙홀(슈바르츠실트 블랙홀)과 회전하는 블랙홀(커 블랙홀)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의 영상을 포착하고자 하는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이 두 블랙홀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할 관측이 가능하게 된다면 이는 초대형 블랙홀의 성장 과정, 더 나아가 은하와 은하단의 성장 과정, 그리고 그들로 구성된 우주의 이해에 커다란 진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 4월 초 국제천문연맹(IAU) 100주년을 맞아 ETH는 두 개의 초대형 블랙홀을 관측해 얻은 영상을 최초로 공개할 예정이다. 지난 1년 간 까다로운 자료 처리와 분석을 거쳤고, 현재는 이를 정리하는 최종 단계에 있다.
한국천문연구원은 EHT의 주요 망원경인 JCMT와 GLT의 관측, 그리고 자료 처리 및 분석 작업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또 한국천문연구원의 한국우주전파관측망은 EHT 관측을 보완하는 저주파수 VLBI 관측으로 핵심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한국천문연구원은 서울대 천문대와 함께 2020년부터 자체 전파망원경으로 EHT 프로젝트에 참여할 계획도 갖고 있다. 블랙홀의 비밀을 벗기는 세기의 연구에 한국 천문학계가 기여했다는 점에서 더없는 자긍심을 느낀다.
손봉원
한국천문연구원 전파천문본부 책임연구원으로 이벤트 호라이즌 망원경(EHT) 한국 책임자를 맡고 있다. 과학기술연합대학원(UST) 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bwsohn@kas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