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사람도 길을 따라 흐르는 법이오.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가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이 말이오.”
9월 추석 연휴에 개봉하는 영화 ‘명당’에서 주인공 박재상(조승우)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명당은 풍수지리를 소재로 한 영화로, 왕을 배출할 수 있는 천하 명당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을 다룬다.
흔히 풍수라고 하면 영화에서처럼 ‘땅이 운명을 바꾼다’는 식의 미신에 가까운 전통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이런 요소를 배제한 풍수의 본 모습은 생각보다 과학적이며 실용적이다. 오늘날 환경공학적인 요소들이 풍수지리에 녹아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가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박재상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사람이 살거나 이동하기 좋게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숲은 풍해와 수해 막는 인공숲
풍수지리의 환경공학적인 성격은 실제 조상들이 어울려 살았던 전국 도처의 마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에는 개서어나무 마을숲이 있다. 마을숲은 조상들이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을 말하는데, 행정리 마을숲에는 흥미로운 유래가 전해 내려온다.
약 190년 전 이 마을이 자리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승려가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마을 사람에게 넌지시 “동네 북쪽이 허술하니 나무를 심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건넸다. 당시 마을에는 해마다 화재와 수해가 발생하고 전염병이 도는 등 재난이 끊이지 않았던 터라 마을 사람들은 승려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마을 북쪽의 작은 하천 두 개가 만나는 자리에 숲을 가꿨다. 그 뒤 마을은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
이 마을숲을 현대의 환경공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풍해와 수해를 예방하는 방풍림(防風林)과 방수림(防水林)이다. 보통의 전통마을은 겨울철에 따뜻한 햇볕을 받기 위해 남쪽을 향해 산을 등지고 있는데, 이 마을은 북쪽을 향해 들어서 있다. 겨울철에 찬 북서계절풍을 바로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을 북쪽에 조성한 이 마을숲이 마을로 불어 닥치는 매서운 찬바람을 병풍처럼 막아준다. 뿐만 아니라 센 바람 때문에 생기는 화재도 막아준다.
여름철에는 몬순 기후에 의해 생기는 집중 호우(장마) 때문에 하천이 자주 범람해 마을에 수해를 입혔는데, 이 또한 마을숲이 물의 범람을 막아줘 수해가 줄어들었다. 수해가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수해로 인한 전염병도 사라진다.
이와 같은 마을숲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숲을 거쳐 동네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동구숲이 마을숲이다. 마을숲은 대체로 풍수라는 전통 지리 지식 때문에 생겨났다. 나무를 심으라고 조언한 승려는 오늘날로 치면 환경공학 혹은 지리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풍수는 한자말 그대로, 바람(風)과 물(水)로 생기는 자연재해를 방비하는 전통 지혜다. 자연환경과 수자원 보호, 토지 이용에 대한 조상들의 경험적인 지식체계였던 셈이다.
풍수는 ‘환경’의 옛 말
‘Environment’는 ‘환경’이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예전에는 없다가 근대에 생겨난 말이다. 환경의 사전적 뜻은 ‘생물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자연적·사회적 조건이나 상황’을 말한다. 근대 이전에 오늘날의 환경과 동일한 뜻으로 사용된 단어는 무엇일까. ‘산수’ 또는 ‘산천’ 등의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였지만, 실제로는 ‘풍수’도 환경과 같은 뜻으로 흔히 쓰였다.
옛 어른들이 어떤 마을을 보고 ‘풍수가 좋다’고 하면, 이는 그 마을의 ‘자연환경이 좋다’는 말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마을의 풍수를 본다’는 말은 ‘마을의 환경을 평가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승려나 유학자 등 풍수 지식을 공부한 지식인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이 마을은 풍수에 결점이 있으니 동구에 숲을 심는 게 좋겠다’고 하면 ‘마을 입지의 지형 조건과 미기후적인 환경 관리를 위해 숲을 조성하라’는 환경전문가의 조언이다. 조상들은 일반적으로 풍수라는 말을 마을의 자연환경 조건을 아우르는 뜻으로 사용했다.
흔히 쓰이는 ‘명당(明堂)’이라는 말도 풍수에서 나온 것이다. 명당은 살기에 좋은 장소와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이를 환경공학적으로 바꾸면 최적의 자연환경 조건을 갖춘 곳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풍수는 삶터의 자연환경을 이해하고 평가·관리하는 사회공동체의 지식으로, 오늘날 환경이라는 용어의 쓰임새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보면 풍수는 산수 등과 함께 환경이라는 말 이전에 쓰인 원형적인 용어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판 지리정보시스템, 대동여지도
“지도가 필요한 백성들이 언제든지 쓰게 할 일념으로 만든 지도입니다.”
2016년 추석에 개봉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주인공 김정호(차승원)는 권력 다툼의 수단으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노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산자(古山子)는 김정호의 호다.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 서민과 지배계층 모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풍수 사상이 투영된 한국 고지도의 대표작이다.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는 16만분의 1 축척의 목판본 지도다. 실제 1만6000km를 1cm로 축소해 표시했다는 뜻이다. 특히 산맥에 대한 풍수적인 인식과 산줄기 체계에 대한 지리 정보를 집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지도가 완성되면서 국토의 산수 체계가 한 눈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영화에서 김정호는 지도에서 거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가령 기존 지도에 따르면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직선거리 90리(약 35.3km)로 파악되지만 실제로는 오르내림이 심한 산악 지형이어서 더 멀다. 기존 지도 정보를 토대로 여정에 나섰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할 때 10리마다 점을 찍어 지도를 보는 사람이 거리를 가늠할 수 있게 했다. 또 ‘산악투영도법’을 적용해 주요 산의 모양이나 크기를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분수계(分水界)와 하천 유역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산악투영도법은 산세의 험하고 평탄함을 굵기로 반영해 산줄기를 그리는 방법을 말한다.
이는 오늘날 지리정보시스템(GIS)을 연상케 한다. 지리정보시스템은 지도뿐 아니라 인구, 이동량, 통화량 등 공간과 관련된 모든 생활 정보를 디지털화 한 빅데이터 시스템이다. 이를 활용해 국토 공간을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 역시 단순히 지리 정보만이 아닌 각 지역별 군사, 교통, 행정 관련 시설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지리정보시스템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풍수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산줄기와 물줄기가 마치 인체의 뼈대와 핏줄을 연상시킨다. 실제 김정호는 “산등성이는 땅의 근육과 뼈이고, 물줄기는 땅의 혈맥”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지도에서는 개별 산을 점이나 평면으로 나타내지만, 대동여지도에서는 산과 산을 이어 산줄기라는 선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백두산부터 땅끝마을까지 국토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산맥 시스템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산줄기를 나타내는 선의 폭을 달리해 산맥 시스템을 나타냈다. 국토의 동맥이라 할 수 있는 백두대간은 가장 굵은 선으로 나타냈고, 정맥과 지맥은 가는 선으로 차등해 표현했다. 이 같은 산줄기 인식은 풍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풍수에서 산줄기는 마치 나무처럼 몸체와 줄기가 있고 잔가지도 있다고 본다. 백두대간에서 ‘대간(大幹)’ 즉 ‘큰 줄기’라는 말도 풍수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전도에서 산줄기를 표시하는 전통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이회의 ‘팔도도(1402년)’,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1463년)’, 그리고 정상기의 ‘동국지도(18세기)’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지도들은 모두 필사본이고, 대동여지도에 비교하면 자세하지 않은 소축척 지도다. 김정호는 이러한 전통적인 산수 지도의 제작 기법을 계승·발전시키고, 목판으로 인쇄해 누구나 종이에 찍어서 가질 수 있게 대중화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오늘날의 내비게이션처럼 말이다.
● 최영준 기자의 순전히 과학적인 영화평 - 명당&고산자,대동여지도
일단 ‘명당’은 개봉 예정작이라 패스! ‘고산자, 대동여지도’에는 별 세 개를 드리겠습니다. 일단 첫 장면에서부터 ‘과학 덕후’들의 기대감을 자아냅니다. 왕의 행차에 실시간으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리고차’라는 수레가 등장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과학적인 내용이 많지 않아 아쉽습니다.
기사를 읽고 영화를 보면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산줄기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영화에는 김정호가 전국 방방곡곡을 두 발로 돌아다니며 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역사학자들은 김정호가 국가와 민간에서 기존에 만들어 놓은 다양한 종류의 지도를 참고하고, 일부 지역은 직접 방문해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가 조선시대 최첨단 지리정보시스템이었다면, 그 기술은 현재 어디까지 발전했을까요. 지금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해 불과 수십 cm의 오차로 실시간 위치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목적지까지 최단거리를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은 현대인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