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나의 카메라 속 남극이야기

추위와 싸우고 펭귄과 친구 되고

빙산 사냥에 나서다


거대한 빙산 앞에 서면 그 위압감에 숨이 멎을 것 같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언제 어느 순간 무너져내릴지 모른다.


조바심이 났다. 분명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빙산이 있었는데 고무보트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했다. 멀리 보이는 빙산은 온몸에 햇빛을 받고 있지만 남극에서는 기상변화가 심해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다. 빙산에 도착했을 때도 여전히 저 햇살이 빙산을 비춰주고 있으리라 기대했다가 좋은 풍경을 놓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빙산을 한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거대한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숨이 멎을 정도다. 빙산이 자아내는 위압감에 익숙해진 뒤에는 그 아름다움에 다시 한번 놀란다. 다가가고 싶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반드시 멈춰야 한다. 믿음직한 위용과 순수한 자태 뒤에 숨겨진 악마의 발톱은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을 집어 삼킬 수 있다. 한껏 폭발의 숨을 머금고 기다리는 맹수처럼 말이다.

남극 세종기지가 있는 맥스웰만. 바다에서 대륙 쪽으로 깊게 파인 지형 덕분에 이곳에 빙산이 들어오면 며칠 동안 갇혀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이때를 노려 빙산의 오묘한 모양을 멀리서 카메라로 찍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가 갑자기 잔잔해졌고 해가 쨍하니 비췄다. 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재빨리 카메라를 들고 빙산 사냥에 나섰다. 언제 날씨가 변덕을 부릴지 모르니 조바심이 날 수밖에….


남극 세종기지에서는 연구조사를 나가거나 물자를 운송할 때 조디악이라는 고무보트를 주로 이용한다.


때론 휴식을, 때론 힘을 북돋아준 카메라


한낮인데도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남극의 풍경은 몹시 생경하다. 차갑게 얼어붙은 빙원 위로 쟁반구름이 보인다.


어릴 적부터 카메라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카메라나 사진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없었지만 카메라를 잡으면 이상하게 잡념이 사라졌다. 카메라를 통해 보는 세상, 그리고 나와 세상 가운데에 있는 카메라. 카메라는 내가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줬다. 몹시 지쳐있을 때는 내 앞을 살며시 가려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줬다. 나는 카메라 뒤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남극에서도 카메라는 나와 동행했다. 그러나 낯선 풍경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영하 수십 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맞닥뜨리며 처참히 무너졌다. 잠시만 밖에 있어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위해 낀 두꺼운 장갑도 장애물이었다. 추위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외부촬영을 활발히 하게 된 뒤에도 늘 조심해야 했다. 얼어붙은 카메라를 들고 실내로 갑자기 들어오면 렌즈에 뿌연 김이 낀다. 이때 렌즈를 카메라 본체에서 분리하면 김이 본체 안까지 서리며 먼지가 달라붙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디지털카메라의 배터리는 영하의 기온에서 쉽게 방전된다. 따라서 남극에서 촬영을 나갈 때는 반드시 여분의 배터리를 챙겨야 한다. 배터리 때문에 눈앞에서 근사한 풍경을 놓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남극의 햇빛도 복병이다. 흔히 극지방은 태양의 고도가 낮아 햇빛의 양도 적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맑은 여름 남극에 쏟아지는 햇빛의 양은 한국의 피서철 바다와 맞먹는다. 더구나 하얀 얼음과 눈, 바다는 햇빛을 고스란히 반사시켜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추위와 햇빛을 상대로 겁없이 덤볐지만 남극에서 사진을 찍는데 익숙해지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겨울철에는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와 해상무전기가 탑재돼있는 설상차를 타고 이동한다. 가끔은 눈구덩이에 빠지는 예상치 못한 사고도 생긴다.


장난꾸러기 펭귄과 비행의 달인 스쿠아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어떻게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까. 전망 좋은 자리를 좋아하는 펭귄들이 고원 위에 모여 있다.


남극에 오기 전까지 펭귄이 봄에 새끼를 낳으려고 뭍으로 올라오는지 몰랐다. 그리고 억센 돌로 둥지를 트는지도 몰랐다. 펭귄을 찍으러 쫓아다니며 그 녀석에 대해 하나둘 알게 됐다. 펭귄은 생김새부터 하는 행동까지 모두 귀여웠다. 사진을 찍고 있는 내 어깨를 툭 치고 도망가는 대담한 녀석도 있었다.

폭풍설이 휘몰아치는 날에도 추운 바다에서 힘겹게 먹이사냥을 하는 펭귄을 보면서 저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동물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펭귄은 원래 바닷새였다. 하지만 머나먼 선조 중 누군가가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고 창공을 날던 날개는 물을 휘젓는 지느러미로 변했다. 오랫동안 추위와 싸우며 몸도 통통해졌다. 왜 하필 얼어붙은 땅에 정착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남들이 오지 않는 땅의 주인이 돼 당당하게 살아가는 펭귄의 모습에 생각을 바꿨다.

남극을 얘기할 때 스쿠아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남극에 한번이라도 다녀왔다면 스쿠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스쿠아는 남극에 사는 도둑갈매기로 생태계의 상위포식자다. 하지만 펭귄처럼 귀엽지도 않고 해표나 고래처럼 몸집이 크지도 않아 별 관심을 받지 못한다. 스쿠아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생물을 무조건 쫓아내려 한다. 처음에는 넋 놓고 기지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스쿠아의 공격을 받고 오싹해지기도 했다. 그들의 육탄공격을 막을 방법은 거의 없다. 하지만 태풍에 버금가는 바람을 가르며 비행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스쿠아는 바람을 즐길 줄 아는 새다.


장난꾸러기 펭귄과 비행의 달인 스쿠아 그리고 해표


남극을 사진에 담고, 마음에 품고


남극을 사진에 담고, 마음에 품고


내가 남극에 간 까닭은 의사로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의 생활과 자연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 남극행을 결심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의사로서의 역할이 미흡하다면 사진 때문, 사진이 부실하다면 의사이기 때문이라는 변명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했다. 내가 의사로 남극에 갔건 사진을 찍으러 갔건 그 배경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손끝이 아리도록 매서운 추위와 푸르른 햇살을 마주할 때면 남극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조디악을 타고 아르헨티나기지를 방문하던 길, 펭귄마을을 지나는데 뜻밖의 장관이 펼쳐졌다. 눈덮인 빙원 위로 우뚝 솟은 봉우리 하나가 마치 그림 같다. 조디악을 타고 아르헨티나기지를 방문하던 길, 펭귄마을을 지나는데 뜻밖의 장관이 펼쳐졌다. 눈덮인 빙원 위로 우뚝 솟은 봉우리 하나가 마치 그림 같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7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홍종원 월동대원

🎓️ 진로 추천

  • 지구과학
  • 환경학·환경공학
  • 해양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