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면 누구나 편안하고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것 아닙니까?”
“옷에는 예의와 법도 그리고 계급이 있어야 하는 것일세.”
영화 ‘상의원’의 두 주인공 이공진(고수)과 조돌석(한석규)은 옷에 대해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는 조선 최고의 디자이너들이다.
상의원은 옷을 소재로 한 유일한 사극 영화다. 궁중의 옷을 만드는 기관인 상의원의 리더인 어침장 조돌석과 기생들의 옷을 만들다 상의원에 들어온 천재 디자이너 이공진의 경쟁과 갈등을 그린다. 격식을 중시하는 조돌석과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넘치는 이공진은 사사건건 갈등을 빚으면서도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며 왕과 왕비의 옷을 만든다.
장미 무늬 들어간 조선시대 옷감
옷을 소재로 하는 작품인 만큼 화려한 한복이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한복에 새겨진 다채로운 무늬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과연 조선시대에도 저런 옷감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심연옥 한국전통문화대 전통미술공예학과 교수는 “조선시대 옷감은 무늬가 단조롭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현대 기계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다채롭다”고 말했다.
가령 2002년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이응해 장군(1557~1624년)의 의복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임진왜란 전후에 이미 화려한 옷감이 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심 교수는 장미 무늬가 새겨진 이응해 장군의 옷감을 참고해 사극 드라마 ‘야경꾼 일지(2014)’에 출연한 배우 정일우 씨의 의상을 제작했다. 정 씨는 심 교수의 아들이기도 하다.
심 교수는 영화 ‘상의원’ 자문으로 참여한 전통 직조기술 분야의 석학이다. 당시 영화 제작진은 옷감을 짜는 직기(織機)를 복원해 영화 촬영에 활용하기 위해 심 교수를 찾았다. 중국만 해도 화려한 무늬를 새긴 옷감을 직조하는 전통 문직기(紋織機)가 많이 남아 있지만 국내에는 제대로 보존된 직기가 없다.
직기라고 하면 박물관에서 본 베틀을 떠올리기 쉽지만, 베틀로는 무늬를 새겨 넣을 수 없다. 씨줄과 날줄을 교차시켜 실로 직물의 조직을 짜는 것만 가능하다. 베틀보다 한 단계 복잡한 특수 직기인 문직기로만 무늬를 넣은 옷감을 만들 수 있다.
심 교수는 문직기가 남아 있지 않은 이유로 영조 시대 상의원의 쇠락을 꼽았다. 이전까지는 다양한 무늬의 직물로 왕실과 귀족들의 옷을 만들었지만, 영조(1694~1776년)가 집권 9년차에 귀족들의 사치를 막기 위해 문직기를 철폐하는 칙령을 내린 것이 발단이 됐다.
심 교수는 “연산군 때만 해도 다양한 무늬의 직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걸 장려하고 직조 공장을 만들어 운영했을 만큼 직조술이 발달했다”면서 “영조의 칙령 이후 문직기와 직조술은 명맥만 이어졌을 뿐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제작진은 영화에 문직기를 복원해 등장시키지 못했다. 옷감을 바느질해 옷을 만들거나 염색한 옷감을 바람에 말리는 장면으로 직조술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심 교수는 “직기를 복원하려면 연구에만 수년이 걸린다”며 “당시 문직기 복원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부족해 결국 영화에 등장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지원을 받은 심 교수팀은 4년간의 연구 끝에 영화가 개봉한 이듬해인 2015년 전통 문직기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영조가 문직기를 폐지한지 282년만이었다.
화본 이용해 무늬 넣어
문직기 복원에는 조선시대 백과사전 격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남아 있는 문직기 그림과 중국에 남아 있는 실물이 핵심적인 단서가 됐다. 박기찬 석사과정 연구원이 중국에 약 두 달 동안 머무르면서 문직기의 구조와 작동 원리 등을 배워왔다.
문직기는 전체를 나무로 만든 매우 복잡한 구조의 기계 장치다. 세로 방향으로 촘촘하고 길게 날실을 걸어둔 뒤 작업자가 ‘종광(綜絖)’이라는 기구를 이용해 순서대로 날실을 들어 올리거나 내리면서 그 사이에 씨실을 가로방향으로 집어넣는 방식으로 직조한다. 이때 무늬가 필요한 부위에는 무늬 전용 종광을 조작해 열린 날실 사이에 무늬용 실을 가로로 넣어주면 된다.
무늬를 넣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다. 높이가 4m에 이르는 문직기의 상부에는 사람이 올라가 앉는 화루(花樓)라는 자리가 있는데, 여기에 무늬를 담당하는 작업자가 앉아서 무늬 직조에 필요한 날실을 들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 아래에 있는 작업자는 올라간 날실에 맞춰 종광을 밟으면 된다.
위에 앉은 작업자는 ‘화본(花本)’이라는 일종의 옷감 무늬 설계도를 이용해 순서에 맞게 실을 들어 올려 줄 수 있다. 화본은 반복해서 넣을 무늬의 기본 단위를 성글게 엮어 넣은 것으로, 작업자는 화본에서 순서대로 들어 올려야 하는 날실을 확인할 수 있다. 통사(通絲)로 불리는 화본의 날실은 아래쪽의 실제 날실과 연결돼 있어서 작업 순서에 맞게 잡아당기면 아래에 있는 날실도 덩달아 위로 뜬다.
박 연구원은 “화본이 무늬 기억 장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손쉽게 반복적으로 무늬를 짤 수 있다”며 “현대의 기계식 장치보다 짜 넣을 수 있는 무늬의 종류도 많고 하나의 직물에 넣을 수 있는 패턴도 훨씬 다양하다”고 말했다.
X선 형광분석으로 고려와 조선 금실 복원
심 교수팀은 문직기와 더불어 명맥이 끊겼던 금사(금실·金絲)를 복원한 뒤 이를 이용해 무늬를 직조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특히 금사를 이용한 무늬 옷감 복원에는 현미경과 X선 형광분석기 등 과학적인 기법을 총동원했다.
금사는 왕실과 귀족들의 옷감에 무늬를 만들어 넣던 금실이다. 금사 역시 영조 때부터 한동안 명맥이 끊어져 있었지만 심 교수팀이 복원에 성공하면서 금사가 들어간 수많은 출토 복식을 재현할 길이 열렸다.
심 교수팀은 국내에 소장된 고려, 조선시대 의복 중 금사의 형태와 색상이 뚜렷한 유물 37건과 중국, 일본의 유물 31건을 분석했다. 심 교수팀은 X선 형광분석기를 이용해서 금사의 성분을 알아냈다. X선 형광 분석기는 시료에 X선을 쪼였을 때 시료를 구성하는 원자의 종류에 따라 방출되는 X선의 파장이 다르다는 점을 이용해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의 종류를 분석하는 장치다.
분석 결과 고려와 조선의 금사는 얇은 닥종이 위에 금을 입힌 것이며, 중국은 뽕나무와 대나무를 이용한 상피지와 죽지, 그리고 일본은 산닥나무 계통의 안피지 위에 금을 입힌 것으로 드러났다. 또 고려와 조선의 금사는 아교풀을 이용해서 붙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금사 복원에도 참여한 박 연구원은 “국내 장인에게 닥종이 제작을 의뢰해 그 위에 금박을 입히고 0.3mm 폭으로 얇게 잘라서 금사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심 교수팀은 복원된 금사를 이용해 고려시대 유물 한 점과 조선시대 유물 두 점을 재현했다. 특히 고려 말인 1346년에 제작된 남색원앙문직금능(藍色鴛鴦紋織金綾)은 함께 복원한 문직기를 이용해서 재현했다. 이 직물은 남색 바탕에 금으로 원앙 무늬를 직조해 넣은 것이다. 연구팀은 현미경으로 직물을 확대해 금사를 직조한 방식을 알아낸 뒤 복원한 문직기를 이용해 재현했다.
심 교수는 “그간 고려나 조선시대 옷을 재현하려고 해도 옷감은 동대문시장 등에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는 옷감부터 당시 기술로 재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섬유공학자이자 스승인 고(故) 민길자 교수와 제자들까지 약 30년에 걸친 연구 끝에 전통 직물 복원이라는 꿈을 이뤘다”고 덧붙였다.
● 최영준 기자의 순전히 과학적인 영화평 - 상의원
'상의원’에는 별 세 개를 드리겠습니다. 다채롭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주인공 박신혜 씨)뿐 아니라 스토리도 나름 탄탄합니다. 게다가 연기 잘 하기로 이름난 한석규, 고수 두 배우의 열연도 볼 만합니다. 진지한 이미지가 강한 고수가 날라리 천재 디자이너로 변신한 모습도 무척 신선합니다.
과학적인 요소가 부각되지 않는 점은 제 입장에서는 조금 아쉽네요. 그래도 기사를 읽고 영화를 본 독자들은 조상들이 얼마나 과학적인 방법으로 아름다운 옷감을 짰는지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명맥이 끊어진 전통 무늬 옷감과 금사 제작 기법을 되살리기 위해 30년 동안 한 우물을 판 학자들의 노력도 기억해 주세요.
최근에는 금실을 엮어 옷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전자기기를 옷감과 함께 직조하는 웨어러블 전자기기 기술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핫’한 연구 주제입니다. 전도성 섬유를 옷감과 함께 직조해 태양전지로 활용하거나, 머리카락 굵기의 섬유 센서 등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리바이스와 구글이 협업해서 만든 ‘커뮤터 트러커 재킷’은 전도성 섬유를 이용해 옷의 원단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전자기기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