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의 시작은 헌법, 민법, 형법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3월 29일 오후 6시 45분, 서울 중구 동국대 만해관의 한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있는 학생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말투나 복장에서 예사롭지 않은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날은 국내 최초로 대학원 정식 전공으로 개설된 ‘탐정법무전공’의 세 번째 수업 시간. 올해 탐정법무전공 입학생은 28명으로, 탐정법무전공이 속한 법무대학원 전체 입학생의 절반이 넘는다. 강동욱 동국대 탐정법무전공 교수는 “15명 내외가 지원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34명이 지원해 예상을 크게 웃돌았다”고 말했다.
탐정법무전공 1기 입학생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가장 ‘흔한’ 직업은 경찰관이다. 전직, 현직 경찰관만 10여명이다. 법무사, 변호사, 경비업체 대표도 있다. 강 교수는 “직업의 특성상 새로운 수사 기법이나 정보 탐색방법을 배우러 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OECD 37개 회원국 중 韓만 제도권 바깥에
우리나라는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보원, 탐정과 같은 단어를 일절 사용할 수 없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중 탐정을 제도권 바깥에 둔 곳은 우리나라뿐이다.
2005년 17대 국회부터 ‘민간조사 관련 법안’이 현재까지 총 9차례 발의됐지만, 번번히 폐기됐다. 사생활 침해 우려와 불법 정보 수집 가능성 등의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탐정 관할 여부를 놓고 경찰과 검찰의 ‘기싸움’도 있었다.
그런데 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공인탐정제도 도입 추진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공인탐정에 대한 논의가 다시 대두됐다. 지난해 7월 13일 이완영 자유한국당 의원이 ‘공인탐정 및 공인탐정업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해, 현재 소위에 계류중이다.
김광호 대한공인탐정연구원 사무총장은 “공인탐정은 세계적인 추세”라며 “올해 법안이 통과될 경우 이르면 내년에 공인탐정 면허 취득이나 자격심사가 필요한 만큼 탐정법무전공처럼 전문 교육 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은 현재 탐정법무전공에서 개설한 ‘탐정체계론’을 가르치고 있다.
일부 법학자들은 탐정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공인탐정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탐정 업무가 불법인 우리나라에서 사설탐정은 곧 흥신소다. 흥신소 자체도 불법이지만, 흥신소 직원들이 정보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법 행위들 때문에 탐정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다.
강 교수는 “국내에서 탐정이 공인된 직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고,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탐정법무전공도 이런 취지에서 개설했다”고 말했다.
미국.영국은 허가제, 일본은 신고제로 운영
탐정이 공인된 직업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정부의 엄격한 관리와 자격 심사가 필요하다. 실제로 가장 많은 탐정을 배출하는 ‘탐정 선진국’인 미국과 호주, 영국 등은 탐정 ‘허가제’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은 알래스카 주, 미시시피 주 등 7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탐정 면허를 취득하도록 하고 있다. 대다수의 주에서는 사법 관련 학사 학위나 수사 경력을 수년 이상 갖춰야 탐정으로 인정한다.
영국은 공공기관인 안보산업기관(SIA)이 자격증을 발급·관리하고 있다. SIA가 인증한 교육 기관에서 교육 과정을 수료하면 자격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특별한 자격 없이 신고만 하면 되는 ‘신고제’로 운영하다가 2001년과 2003년 각각 허가제로 변경했다. 현재 일본만 예외적으로 신고제를 고수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대한민간조사협회가 2001년부터 ‘민간조사(PIA)자격’을 인증하고 있다. 이는 ‘PC 정비사’ ‘패션 스타일리스트’ 등과 동일한 민간자격증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다. 동국대가 개설한 탐정법무전공을 이수하면 민간조사자격이 주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민간조사학개론’ ‘범죄학 및 범죄심리학’ ‘법학개론’ ‘민간조사관계법’ ‘민간조사실무’ 등 5개 과목에서 모두 60점 이상 받아야 한다.
김 사무총장은 “탐정은 자신의 조사 업무가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며 “공인탐정법이 통과되면 헌법, 민법, 형법 등 법률적인 지식이 더욱 많이 요구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수합병 등 전문 분야 보유
현실에서의 탐정은 살인 현장과 마약 거래 현장을 덮치는 영국 드라마 ‘셜록’이나 일본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과는 전혀 다르다. 김 사무총장은 “현장에 나가서 자료를 수집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료 조사를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일이 더 많다”고 말했다.
탐정도 전문 분야가 있다. 미국, 영국 등에서는 기업의 인수합병(M&A), 보험 사기, 교통 사고, 실종 사건 등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탐정들이 있다. 사건에 따라 요구되는 능력은 조금씩 다르다.
교통사고 전문 탐정은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하는 능력과 차에 가해진 충격, 환자의 상처 부위 등의 현장 정보를 이용해 물리학적인 계산을 하고 이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논리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수준의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수합병 전문 탐정의 경우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상대 회사의 기업 규모나 재정 상태 등 고급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때문에 미국의 경우 탐정은 고소득 직업으로도 꼽힌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에 따르면 탐정의 평균 연봉은 2016년 기준 6만1600달러(약 6585만 원)다. 미국 정규직 평균 연봉인 4만9630달러(약 5305만 원)와 비교해 20% 가량 높다.
대형 로펌처럼 대형 탐정회사도 있다. 미국의 ‘핑커톤(Pinkerton National Detective Agency)’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을 경호했던 앨런 핑커톤(위 사진)이 1850년 설립한 회사로, 직원 5000여 명에 연간 매출 약 2673억 원에 이르는 대기업이다.
김 사무총장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제 잡지인) ‘포춘’에 이름을 올리는 대기업들은 대부분 핑커톤과 같은 탐정회사와 협력 관계”라며 “탐정회사는 사내 감사 업무나 각종 소송을 사내 변호사와 함께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국내에서도 탐정이 공인화되면 핑커톤과 같은 대형 탐정회사, 로펌 등에 취직할 수 있고, 개인 사무실도 차릴 수도 있다”며 일반 회사에서 사내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처럼 사내 탐정을 고용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 졸업생들의 취업경로는 다양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