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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작지만 중요한 미세증거물

 

법과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프랑스의 에드몽 로카르는 많은 사람이 크고 잘 보이는 증거물에 집중한 것과 달리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증거물에 주목했다. 미세한 먼지와 흙, 금속 파편 등을 감정해 범인이 현장에 있었으며 피해자와 함께 있었음을 성공적으로 입증했다. 이는 현재 과학수사 분야에서 미세증거물이라는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검시 분야에서도 미세증거물은 두말할 필요 없이 매우 중요하다. 미세증거물은 상호 접촉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올해 1월에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자.

 

 

■ 2019. 01. 19  경북 성주 공장에서 사망자 발견


동장군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월 중순, 점심시간을 기다리며 뭘 먹을지 소소한 고민에 빠져 있을 즈음 경북 성주의 한 공장에서 변사 사건 신고가 들어왔다. 보통 공장이나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사망 사고는 대부분 안전사고다. 요즘은 공장 내부에도 폐쇄회로(CC)TV를 설치한 곳이 늘고 있어 사건 해결에 많은 도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공사 현장에서는 추락사가 많고, 공장에서는 깔리거나 끼이는 형태의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현장으로 이동하면서 그동안 경험했던 여러 형태의 안전사고들을 잠시 떠올렸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사건 현장이든 선입견은 갖지 않으려고 애쓴다.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히면 수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 현장은 공장 내 작업장이었다. 변사자 A 씨는 이미 병원으로 이송된 뒤였다. 사건이 발생한 공장은 철판을 가공해 트럭 적재함 등을 만드는 곳으로, 변사자가 누워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바닥에는 혈흔과 함께 그가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갑, 토시, 신발, 부러진 플라스틱 보호경 등이 확인됐다. 
그리고 지름 4인치(약 10cm)의 원형 디스크 날이 부착된 앵글그라인더가 있었다. 앵글그라인더는 장착하는 날의 종류에 따라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전동기구로, 보통 절단이나 연마, 광택 내기, 녹 제거 등에 많이 쓰인다. 현장에 있던 그라인더는 분당 최대 1만2000번 회전하는 제품이었다. 출입구 쪽에 CCTV가 있었지만, 변사자가 위치한 곳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출입구 쪽 CCTV만으로도 사고 당시 출입자는 확인할 수 있었다.
 

 

■ 2019. 01. 21.  목 졸렸지만 저항 흔적 없어

 

 

현장을 확인한 뒤 검시를 위해 병원에 도착했다. 변사자는 작업복과 넥워머를 착용하고 있었다. 용접 부위나 절단면 등 불규칙한 철제 표면을 연마할 때 생기는 불똥이나 파편, 먼지로부터 얼굴과 목을 보호하기 위해 작업자는 보통 넥워머나 스카프를 착용한다. 
변사자의 얼굴에는 심한 울혈이 발생했고, 눈두덩 부종, 눈꺼풀 이음막 점상 출혈, 턱 중앙과 오른쪽 부위의 표피 박탈, 코와 귀를 통한 출혈 등이 관찰됐다. 또한 목에 평행에 가까운 희미한 끈 자국이 남아 있었다. 끈에 의한 경부 압박성 질식사로 사인을 추정할 수 있었다. 
일단 확실한 건 의사는 아니었다. 현장에서 변사자가 발견된 장소 주변에 끈을 매달만한 기둥이나 구조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과 평행한 끈 자국으로 봤을 때는 교사나 자교사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자교사라면 목을 조를 때 썼던 끈이 목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최초 목격자였던 공장 직원은 “그라인더는 전원이 꺼진 상태였고 변사자의 목에 따로 끈이 묶여 있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교사밖에 없다. 교사의 경우 대부분 타살이다. 사고나 자교사의 발생 빈도는 매우 낮은 편인 데다가, 이번 사건의 경우 발견 당시 변사자의 목에 끈이 감겨 있지 않았으므로 해당 사항이 없다. 
정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 부검을 진행했다. 부검의는 끈에 의한 경부 압박 외에는 다른 질병이나 사망에 이를 만한 외상이 없다며 타살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아무리 현장과 검시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다른 타살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전에 경험했던 사건, 그리고 일반적인 교사에서 나타나는 울혈의 형태와 끈 자국을 분석한 자료 등을 볼 때, 일반적인 교사에서 흔히 동반하는 폭력에 의한 손상이나 손에 의한 목 졸림, 입막음 등 타살의 흔적이 변사자에겐 전혀 없었다. 모순이 생긴 것이다.
이를 풀기 위해 전국에서 발생한 교사 사례를 이 잡듯 뒤졌다. 그 결과 비슷한 사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2015년 3월 서울 중랑구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공사장에서 인부가 그라인더로 파이프를 절단하던 중 목에 두른 스카프가 디스크 날에 말려 들어가면서 목이 졸려 사망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그때처럼 이번 사건도 교사가 아니라 사고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변사자 근처에서 발견된 그라인더는 분당 1만2000회의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 이런 그라인더로 작업을 진행할 때, 양손으로 힘껏 잡지 않으면 회전력으로 인해 그라인더가 위로 튀어 오르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때 회전하는 날에 넥워머나 스카프 일부가 닿으면서 짧은 순간 감겨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목 부위 전체가 급격하게 조여지거나 날에 베여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특히 이런 경우에는 목이 전체적으로 졸리는 만큼 더욱 위험하다. 목 전체를 방사형으로 조여 양쪽의 경정맥과 기관 전체를 강하게 압박하기 때문이다. 특히 경정맥은 기도보다 적은 힘으로도 폐쇄할 수 있어 치명적이다. 
최초 목격자를 다시 불러 당시 상황에 대해 재차 물었다. 목격자는 “전원이 꺼진 그라인더가 목 근처에 있었다”며 “급히 응급처치 하느라 다른 건 자세히 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끈이 없었다던 진술에 대해서도 “끈이라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있는 그대로 진술했다”며 “넥워머는 생각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사고사의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 2019. 03. 12  미세증거물로 사고사 확인

 

이제부터는 사고사라는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그라인더와 넥워머다. 만약 가설이 사실이라면 그라인더와 넥워머에 서로에 대한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사람이나 물체가 서로 접촉하면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물체나 사람에게 있던 섬유나 모발, 기타 작은 파편 등이 서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접촉한 물체나 사람끼리 서로에게 미세한 흔적을 남기는 것을 ‘로카르의 교환법칙’이라고 한다. 미세증거물을 다루는 기본원칙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증거물을 개별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가 유일해 증거물만으로도 범인이나 범행 도구를 특정할 수 있는 개별 증거물은 의외로 많지 않다. 단면이 일치하는 조각이나 지문, 공구흔, 총기에서 발사된 탄환 정도가 개별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현장에서 발견되는 증거물은 대부분 증거물만으로는 범행을 단정할 수 없는 군집증거물이다. 예를 들어 절도 현장의 깨진 유리창에서 검은색 섬유를 발견했다고 하자. 만약 체포된 용의자가 검은 셔츠를 입었고, 그 셔츠의 섬유가 입구에서 발견한 것과 동일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용의자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 용의자의 셔츠 말고도 검은색 옷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접촉이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용의자의 옷에서 깨진 유리창에서 떨어져 나온 유리 파편이 발견됐다면 용의자를 범인으로 특정할 수 있다. 
현장에서 발견된 그라인더와 변사자가 착용한 넥워머에 대한 감정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했다. 그 결과 그라인더의 디스크 날에서 변사자의 넥워머와 동일한 종류의 미세 섬유가 관찰됐다. 
또한 넥워머에서도 날의 연마 성분과 날에 의해 발생한 미세한 흔적이 확인됐다. 양쪽에서 모두 접촉을 확인할 증거가 발견됐으므로 이 둘은 확실히 접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디스크에 넥워머가 감겼다는 것이다. 
수집된 증거를 통해 사망 과정을 추론했다. 아마도 작업 중 그라인더가 튀면서 넥워머가 급격히 그라인더의 디스크에 말려 들어갔을 것이다. 넥워머가 목 전체를 강하게 조였고, 이에 당황한 변사자는 쓰러졌을 것이다. 가까스로 그라인더의 스위치는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경부의 기도와 혈관이 막히면서 발생한 저산소증으로 의식을 잃고 사망한 것이다. 
이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과 함께 현장 검증을 시행해 이런 사고가 실제로 발생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로써 사건은 타살이 아닌 사고사, 즉 사고에 의해 발생한 교사로 최종 결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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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김대열 경북지방경찰청 검사조사관
  • 신용수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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