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박사학위 논문 공개를 계기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별을 올려다보며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생각해 보고, 우주를 이해해 보기를 희망합니다.”
호킹 박사는 자신의 논문을 공개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논문 제목이 ‘팽창하는 우주의 성질(Properties of Expanding Universes)’이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의 말대로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한때 논문을 공개한 웹사이트가 먹통이 됐다. 기자 역시 평소 그의 유명세가 아닌 연구 업적이 궁금했던 터라 논문을 내려받았다.
하지만 그의 논문은 무려 100페이지가 넘었고, 대학 시절 기자를 괴롭혔던 수많은 수학 기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악몽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 말해본다). 다행히 김항배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의 도움을 받아 호킹 박사의 연구를 살펴 볼 수 있었다. 기자가 논문을 다 읽지는 못 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빅뱅 우주론 지원사격
호킹 박사(논문을 출간했을 당시에는 박사가 아니었다!)의 논문을 읽으려면 우선 당시 우주를 연구하던 학자들 사이에서 어떤 논란이 있었는지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호킹이 박사학위 과정에서 연구하던 1960년대에는 빅뱅(Big Bang) 우주론과 정상상태(Steady State) 우주론이 경쟁하고 있던 상황에서 빅뱅 우주론을 지지하는 관측 증거가 나오면서 그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었다. 이 두 이론은 1940~50년대 팽팽하게 접전을 벌였다.
빅뱅 우주론은 우주가 대폭발에 의해 탄생해 지금까지 팽창해 왔다는 주장이다. 반면 정상상태 우주론은 우주가 시간에 따른 변화 없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가설이다. 빅뱅 우주론이 성립한다면 대폭발이 시작된 아주 작은 ‘공간’이 계속 팽창하면서 온도가 떨어지고, 약 3000K(절대온도)에 도달했을 때 빛(복사)이 물질과 분리돼 나온다. 이 빛은 현재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고, 물리학자들은 이를 우주배경복사라고 불렀다.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하면 우주 생성 초기 단계의 흔적을 확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러던 중 1964년 아노 펜지어스, 로버트 윌슨이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하면서 빅뱅 우주론은 승기를 잡는 분위기였다. 지금까지도 빅뱅 우주론과 이를 뒷받침하는 우주배경복사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호킹이 대학원에서 연구하던 당시에는 정상상태 우주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대표 격인 영국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은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빅뱅 우주론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사실 ‘빅뱅’이라는 이름도 호일이 1949년 BBC 라디오에 출연해 “이 이론은 우주의 모든 물질이 특정 시간에 단 한 번의 큰 폭발(big bang)로 형성됐다는 가설에 기반하고 있다”고 폄하한 데서 나왔다.
빅뱅 우주론의 지지자였던 호킹은 초록을 통해 논문에서 다룰 네 가지 주제를 언급했다. 첫 번째는 정상상태 우주론을 주장하는 진영이 내세운 우주모형의 문제점이다. 두 번째는 공간적으로 균일하게 팽창하는 우주에서 발생하는 ‘섭동’의 특징을 계산한 것이다. 세 번째는 팽창하는 우주에서 중력파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며, 네 번째는 가장 중요한 업적인 ‘특이점(singularity)’에 대한 증명이다.
여기서부터 난관이 시작된다. 이 네 가지 주제가 왜 중요할까. 전문가의 힘이 필요할 때다. 김 교수는 “호킹의 박사학위 논문은 빅뱅 우주론의 타당성을 이론적으로 더욱 견고하게 다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주 초기 중력파 설명하며 아인슈타인 ‘디스’
호킹은 논문에서 가장 먼저 정상상태 우주론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가 처음 쓴 논문을 정리한 것인데, 당시 학계의 거물이었던 호일의 이론을 논박한 화제작이었다.
정상상태 우주론은 우주에 끊임없이 에너지가 공급되면서 우주가 일정한 밀도를 유지하면서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변화 없이 균일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가설이다. 호일과 그의 제자 자이안트 날리카는 정상상태 우주론을 뒷받침하는 ‘중력 이론’을 발표했다.
하지만 호킹은 그 이론을 계산했을 때 질량과 관성질량이 모두 음(-)인 물체가 생긴다는 점을 지적했다. 관성질량은 물체에 힘을 가했을 때 생기는 가속도의 특성을 규정하는 상수를 말하는데, 물체마다 고유한 값을 가진다. 물질과 반대되는 특성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반물질(antimatter)조차도 관성질량은 양(+)의 값을 갖기 때문에 현재의 우주를 설명하는 모형에 위배된다. 호일 1패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주제는 팽창하는 우주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그 의미를 밝힌 것이다(60여 페이지에 걸쳐 정말 어마어마한 수식이 등장해 읽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호킹이 주목한 것은 팽창하는 우주에서 나타나는 섭동이라는 크고 작은 변화였는데, 이전에도 그에 대해 분석한 학자들이 있었지만 물리적으로 명확한 의미를 끌어내지는 못했었다. 호킹은 계산 결과 작은 수준의 섭동으로는 우주에서 은하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중력파와 관련해서는, 아인슈타인과 빌렘 드 지터가 제안한 팽창하는 우주 모형에 대해서 “(이들의 모형에서는) 우주에서 중력파가 발생할 경우 우주가 다시 수축해서 특이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아인슈타인을 ‘디스’했다. 아인슈타인과 드 지터의 우주 모형 역시 팽창하는 우주 모형이지만, 빅뱅 우주론에서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우주를 복사가 없고 물질만 있는 특수한 상태로 설명하는 가설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력파는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이 관측한 중력파와는 성격이 다르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의 업적은 블랙홀이나 중성자별 같은 천체들이 병합되면서 방출하는 중력파를 측정한 것이고, 호킹이 연구한 중력파는 빅뱅을 비롯한 우주 초기 급팽창 시기에 방출된 중력파를 말한다. 2014년 미국 하버드-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센터가 찾았다고 발표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며 한바탕 해프닝이 있었던 그 중력파다.
빅뱅 우주론은 현재의 우주를 잘 설명할 뿐 아니라 관측 증거들도 있지만,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우주 초기 중력파는 이를테면 빅뱅 우주론의 ‘미싱링크(잃어버린 연결 고리)’ 중 하나인 셈인데, 현재까지도 과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찾고 있다. 김 교수는 “우주 초기 중력파를 발견한다면 당연히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빅뱅 우주론을 더욱 공고하게 다지는 증거가 된다.
‘특이점 정리’가 하이라이트
호킹 논문의 하이라이트는 정상상태 우주론자들이 주장하는 빅뱅 우주론의 약점을 멋지게 방어한 마지막 부분이다. 이런 걸 두고 ‘대미를 장식한다’는 표현을 쓰나보다. 호일을 비롯한 정상상태 우주론파 학자들은 특이점으로부터 우주가 시작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공격해 왔는데, 호킹은 특이점이 생기는 현상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우주 팽창을 주장하는 빅뱅 우주론에서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물질의 밀도가 높아진다. 일반상대성이론을 토대로 계산하면 우주는 에너지와 물질의 밀도가 무한대인 특이점으로 수렴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물리학에서는 에너지 밀도와 온도가 무한대인 영역은 다룰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서 우주가 출발했다는 빅뱅 우주론의 결론은 정상상태 우주론 지지자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럼 호킹이 이 문제까지 해결했을까. 김 교수는 “이 문제는 아직까지도 빅뱅 우주론이 풀지 못하는 숙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호킹은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제안한 설명을 발전시켜서 이런 특이점이 나오는 것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결과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특이점이라는 현상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걸 밝힌 것이다. 이를 ‘특이점 정리’라고 부른다.
호킹이 24세에 발표한 이 졸업논문은 이후 그의 연구에도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호킹이 이 논문 하나로 물리학계에서 스타덤에 오른 건 아니었다. 특이점 정리에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빅뱅 우주론과 마찬가지로 특이점 문제가 발생하는 블랙홀에 주목한다.
결국 블랙홀에 존재하는 특이점 역시 충분히 생길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밝혀 또 한 번의 중요한 업적을 성취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블랙홀이 물질을 빨아들이기만 할 뿐 아니라 방출하기도 한다는 ‘호킹 복사’를 밝혀내는 등 블랙홀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이때가 32세였다. 빅뱅 우주론과 특이점에서부터 하나 둘 꼬리를 물고 이어진 연구로 학문적인 입지를 다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