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70억 명이 넘는 인구가 있고, 이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일란성쌍둥이처럼 거의 똑같은 얼굴도 있지만, 이들조차도 점의 개수나 위치 등 서로를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을 최소 한 가지는 갖고 있기 마련이다.
사람의 뇌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 약 70ms(밀리초·1ms는 1000분의 1초) 걸린다. 이렇게 찰나의 순간에 뇌는 어떻게 상대방의 얼굴을 기억하고 인지하며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걸까.
이 질문은 우리의 신경계와 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시각신경계는 얼굴 형태에서 특정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한다. 이 정보는 뇌 신경망 회로에 저장되고 인지, 판단 등 뇌의 다양한 작업에 활용된다. 뇌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과정을 자세히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너의 눈, 코, 입’이 가장 중요
1960년대만 하더라도 뇌의 얼굴 인식 과정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당시 과학자들은 안구의 움직임을 추적해 사람의 시선이 상대방을 볼 때 어느 부분부터 보는지 연구했다. 1967년 러시아 생리학자인 알프레드 야부스는 아이트래커(시선 추적) 장비를 이용해 연구한 결과 사람이 얼굴을 볼때 시선이 양쪽 눈과 입을 이어주는 삼각형 부위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2014년 이스라엘 텔아비브대와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신경과학자들이 훨씬 정교한 아이트래커를 이용해 진행한 실험에서도 확인됐다(doi:10.1167/14.7.6). 이로써 뇌가 얼굴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눈과 입 모양에 대한 시각적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얼굴의 위아래가 바뀌도록 180도 회전시키면 뇌는 눈코입을 인지하지 못하고 착시를 일으킨다. 가장 유명한 연구 중 하나가 ‘대처 착시’ 실험이다. 1980년 피터 톰슨 영국 요크대 심리학과 교수는 당시 마거릿 대처 총리의 얼굴 사진으로 실험을 했다. 대처 총리 얼굴의 위아래가 바뀌도록 사진을 180도 회전시킨 뒤 눈과 입 부분만 원래 방향으로 뒀다.
그러자 실험참가자들은 이 사진이 대처 총리 얼굴임을 인지했지만, 눈과 입의 방향이 사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사진을 다시 똑바로 돌려놓고서야 눈과 입이 위아래가 바뀌었음을 인지했다(doi:10.1068/p090483). 즉, 뇌는 얼굴을 볼 때 눈코입 하나하나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형태를 인지하지만, 얼굴이 뒤집혀 있을 때는 눈과 입 등 각 부위를 인지하지 못해 착시가 일어난다. 이는 평소 뒤집힌 얼굴을 볼 기회가 별로 없는 만큼 뇌가 이런 상황에 훈련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2015년 제시카 토버트 벨기에 루뱅대 신경과학및정신생리학과 박사의 연구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됐다. 사람을 비롯해 영장류가 얼굴을 인식하는 원리는 동일하다. 토버트 교수팀은 히말라야원숭이에게 눈과 입이 얼굴과 반대 방향으로 배치된 사진을 보여준 뒤 얼굴의 특징이나 조합을 인지하는 뇌 영역의 신경세포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했다.
그 결과 정상적인 얼굴에서는 눈의 방향이 정상일 때와 뒤집혔을 때 뇌가 반응하는 패턴이 현저히 다르게 나타났지만, 얼굴 자체를 뒤집자 눈의 방향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톰슨 교수의 주장대로 얼굴이 뒤집힌 경우에는 눈의 방향을 인지하는 뇌의 민감도가 확연히 떨어진다는 사실 이 신경세포의 활동에서도 드러난 셈이다(doi:10.1523/JNEUROSCI.0446-15.2015).
얼굴을 인식할 때 뇌에서는 선조외피질(extrastriate cortex) 영역에 있는 특정 신경세포들이 활성화된다. 이 부위를 ‘방추상얼굴영역(FFA·Fusiform Face Area)’이라고 부른다. 이 부위의 존재는 1997년 fMRI 촬영으로 처음 확인됐다.
하지만 이 부위에 있는 신경세포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원리로 얼굴을 구분해내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뇌에서 얼굴을 인식하는 ‘얼굴 인식 세포’가 얼굴을 인식하거나 기억하는 자세한 과정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다만 뇌 과학자들은 이미 밝혀진 시각신경시스템의 구조를 토대로 뇌의 얼굴 인식 원리를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다. 우선 눈 앞에 있는 얼굴을 보면서 형성된 시각정보는 ‘초기 시각 신경망’을 거쳐 대뇌피질의 후두엽에 있는 ‘일차 시각 피질(V1·primary visual cortex)’로 전달된다.
‘대처 착시’ 실험
마거릿 대처 총리의 사진을 위아래가 바뀌도록 뒤집었다(➊).
이 상태에서 눈과 입을 원래 방향으로 돌려놓자 대부분은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➋).
얼굴의 위아래를 원래대로 돌리자 눈과 입의 방향이 어색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➌).
사람과 원숭이, 고릴라 등 영장류는 얼굴을 인식하는 원리가 비슷하다.
2015년 벨기에 과학자들은 원숭이에게 눈과 입이 얼굴과 반대 방향으로 배치된 사진을 보여준 뒤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해 대처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차 시각 피질에 있는 신경세포들은 시각 정보에서 매우 단순한 요소만 인지한다. 이를테면 눈과 입의 부분적인 윤곽선이나 색깔, 질감 등이다. 이런 시각정보들은 다음 단계인 ‘이차 시각 피질(V2)’로 전달되고, 이후 상위신경망으로 옮겨진다. 이렇게 시각정보들이 한 단계씩 이동할 때마다 점점 복잡한 정보의 조합을 감지하는 세포들이 관여하고 뇌는 얼굴을 인식하게 된다.
현재로써는 각 단계에서 시각정보가 어떤 형태로 처리되는지, 또 이들 단계마다 어떤 정보가 이용되는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시각정보가 상위 단계로 전달될수록 뇌는 점점 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인지하고(이 사람이 누구인지, 누구와 닮았는지), 추상적인 정보(표정이 어떤지)까지 생성한다.
‘제니퍼 애니스톤 세포’는 없다
그간 뇌 과학자들은 얼굴 인식 세포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계에서는 ‘세포 하나가 얼굴 하나를 구분한다’는 학설을 가장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세포가 ‘제니퍼 애니스톤 세포’다. 미국의 유명 시트콤 ‘프렌즈’에 출연하며 스타덤에 오른 할리우드 배우 제니퍼 애니스톤의 이름을 땄다.
2005년 6월 과학학술지 ‘네이처’에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신경과학자들은 fMRI로 살아있는 사람의 뇌에서 중앙 측두엽(medial temporal lobe)을 관찰했다. 이 부위에서 뇌 세포 반응을 조사한 결과 특정한 사람의 얼굴을 볼 때에만 반응하는 세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연구팀은 유명인, 물건, 장소 등을 볼 때 선택적으로 반응을 나타내는 세포들을 찾아냈다. 특히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할리 베리나 애니스톤의 얼굴 사진을 볼 때 반응하는 신경세포가 존재했다. 마침내 뇌에서 특정 인물의 얼굴을 기억하고 구별해내는 역할을 담당하는 세포를 찾은 것이다.
연구팀은 얼굴 인식 세포가 얼굴 사진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시킨 얼굴 스케치나 심지어 그 배우의 이름을 적어놓은 사진에도 반응한다는 사실도 추가로 알아냈다. 이로써 연구팀은 단일 세포가 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재미있게도 이 세포의 경우 애니스톤의 다양한 얼굴 사진에는 반응을 보였지만, 당시 막 이혼했던 배우 브래드 피트와 함께 찍은 사진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니퍼 애니스톤 세포만으로 얼굴 인식 세포의 기능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A를 인식하는 얼굴 인식 세포가 망가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잘 알아보면서 A만 못 알아볼까? 낯선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난 경우에는 어떨까. 새로운 얼굴에 대한 인식 세포가 생성되기 전인데, 이들은 어떻게 구별하는 걸까.
올해 7월 도리스 차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생물학및생명공학부 교수팀은 하나의 세포가 하나의 얼굴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 인식 세포 200여 개가 얼굴이나 표정에 따라 활성화되는 패턴이 다르고 이를 통해 얼굴을 인식한다는 열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셀’에 발표했다(doi:10.1016/j.cell.2017.05.011). 제니퍼 애니스톤 세포는 결국 여러 얼굴 인식 세포 활동의 조합인 제니퍼 애니스톤 ‘패턴’의 일부였던 셈이다.
얼굴 인식 기능도 학습으로 발전
지금도 뇌 과학자들은 얼굴 인식 과정을 밝혀내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 9월 국제학술지 ‘네이처 신경과학’에는 얼굴 인식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발표됐다. 여기서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은 얼굴을 인지하고 구별하는 기능은 뇌의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학습된다고 주장했다(doi:10.1038/nn.4635).
얼굴을 인식하는 방추상얼굴영역이 형성 되려면 다양한 얼굴을 시각적으로 계속 학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는 시각적인 기능 자체는 정상일지라도 뇌에서 얼굴 인식에 관여하는 영역은 발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갓난아기는 처음에는 엄마와 아빠 얼굴을 구별하지 못하다가 계속 얼굴을 마주하며 시각적인 학습을 통해 엄마인지 아빠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된 뒤에도 새로운 사람을 계속 만나면서 뇌의 얼굴 인식 능력은 계속 발달한다. 결국 얼굴 인식 기능은 뇌의 다른 기능과 마찬가지로 학습을 거쳐 여러 신경세포들이 함께 작용해 일어나는 기억 활동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얼굴 인식은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능이다. 방추상얼굴영역이 손상되면 친숙한 사람의 얼굴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안면실인증(prosopagnosia)’을 앓을 수 있다. 전 세계 인구의 약 2%가 안면실인증으로 대인관계 기피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뇌의 다양한 기능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얼굴 인식 기능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며, 이런 연구는 우리 뇌의 신비로운 기능을 한층 깊게 이해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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