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서울 공평동 현장에서 총통 여러 점이 발견됐습니다!”
지난 6월 1일, 느지막한 오후에 전화 한 통이 울렸다. ‘국보급 발견’의 시작이었다. 총통은 시작에 불과했다. 총통 아래에선 다양한 모양의 금속 유물들이 나왔고, 금속 유물 옆에 붙어 있던 도기 항아리의 파편이 툭 떨어지며 작은 공깃돌 같은 것들이 흘러나왔다. 흙더미를 씻어내자 익숙한, 그래서 더 놀라운 모습이 나타났다. 한글이었다.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1600여 점이 출토됐다. 금속유물은 독창적인 천문시계 ‘일성정시의’와 자동 물시계의 부품으로 밝혀졌다.
유물이 발견된 곳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정식 명칭은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나’ 지역(공평15·16지구)’이다. 청계천이 흐르는 종로 일대에 좁은 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선시대 주거, 상업지역인 ‘피맛골’에 해당한다. 20세기 중후반까지 빈대떡, 생선구이 등을 파는 먹자골목으로 성행했다. 그러나 점차 피맛골을 찾는 발길이 줄어들었고 서울시는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추진했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4대문 안에서 공사를 하기 위해선 반드시 문화재 조사를 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 이번 조사도 이 규정을 근거로 이뤄졌다.
유물은 지표면 3m 아래에서 출토됐다. 이번 발굴지를 포함한 청계천변은 지난 600년 동안 제방 건설, 하천 준설, 도로 보수, 임진왜란 등 전란 이후 재건을 거치면서 조선 전기부터 꾸준히 지표면이 상승했다. 4~5m 아래 조선 초기의 건물터가 있고 그 위에 16세기, 17세기, 18세기, 이런 식으로 현대까지 흔적이 차곡차곡 쌓였다.
수도문물연구원은 지표면에서부터 발굴을 시작해 켜켜이 쌓여 있는 일제강점기~구한말, 19세기, 18세기, 17세기 조사를 마치고 16세기층을 조사하고 있었다. 서울 청진동과 공평동 등 주변 발굴조사 사례를 보면 16세기 문화재의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다. 17~20세기에는 새로 건물을 지을 때 기존 건물의 기초를 파괴하거나 재활용해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16세기에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도성이 황폐화됐다. 이를 재건하면서 16세기층을 덮고 그 위에 새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16세기 문화재의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이라고 추측한다.
공평15·16지구에서도 16세기층의 보존 상태가 가장 좋았다. 600여 년 전의 옛길과 도시계획을 알려주는 배수로, 건물터가 발굴됐고 전시관에 이전해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전을 위해 16세기 건물터를 자세하게 조사하던 중 2칸 정도의 창고 건물 바닥에서 유물이 쏟아진 것이다.
흙먼지를 털어내자 정체가 밝혀지다
현장 연구원에게 총통 여러 점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음이 다급해졌는데, 이어 금속유물, 금속활자까지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라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금속활자는 왕실에서 주로 제작하고 관리했기 때문에 발견되는 경우가 드물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원들도 모두 흥분 상태였다.
유물을 수습하기 전에 총통이 우연히 묻힌 것인지, 누군가 일부러 묻은 것인지 확인했다. 후자였다. 총통이 출토된 곳은 주변의 흙과 색이 조금 달랐다. 누군가 어떠한 이유로 손수 묻어 놓은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현장은 보안 시설이 취약하기 때문에 유물들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금속활자가 가득 담긴 항아리 통째로 연구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연구원들에겐 유물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반드시 셋 이상 함께 움직이도록 지시했다. 유물을 다룰 때 일어날 수 있는 실수나 분실, 도난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연구원으로 옮겨온 뒤 유물을 세척하자 원래의 모습이 나타났다. 금속활자에 새겨진 한글의 모습이 또렷이 드러났다. 한 금속 유물은 둥그런 원형 고리에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천체관측기구인 듯했으나 확실치는 않았다. 전문가들에게 유물의 정체에 관해 자문을 받았다.
금속활자 역사를 새로 쓸 유물
출토된 금속 1600여 점은 서지학을 전공한 6명의 학자에게 자문을 받았다. 꽤 많은 수라고 생각했는데, 책 한 권을 찍기에 충분한 수는 아니라는 답을 받았다. 책 한 권을 만들려면 수만~수십 만 개의 활자를 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활자에는 다른 의의가 있었다. 이전까지 확인할 수 없었던 ‘동국정운식 표기’가 반영된 활자와, 조선 활자의 꽃이라고 불리는 ‘갑인자’로 추정되는 금속활자였다. 갑인자는 세종 때인 1434년 제작된 금속활자로 서체가 유려하고 깔끔하다. 1450년 무렵에 만들어진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앞서 만들어졌다. 여러 과학자들이 갑인자 제작에 참여했다고 전해지지만 그동안 실제 활자가 발견된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조선시대 금속활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455년에 제작된 ‘을해자’였다. 만약 이번에 발굴된 금속활자가 최종적으로 갑인자로 밝혀지면 동서양 금속활자 역사를 바꿀 충분한 증거자료가 된다.
다음 자문은 정체가 궁금했던 눈금이 새겨진 둥그런 원형 고리였다. 혼천의나 간의와 같은 천체관측기구라 추측해 혼천의를 복원했던 이용삼 충북대 명예교수에게 자문을 맡겼다. 우리의 예상이 틀렸다. 천체관측기구가 아닌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였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해(日)와 별(星)에 따라 일정한 시간(定時)을 보는 천체 기기(儀)다.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며 하루를 100등분 한 100각법을 사용한다. 1653년 효종 4년에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이 도입됐기 때문에 그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전까지 출토된 일성정시의는 중종 시기(1506~1544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2점이 전부였다. 이것들은 고리가 하나뿐인데, 이번에 발견된 것은 고리가 3개다. 고리가 3개인 일성정시의는 세종 때 4점이 제작된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에 적힌 일성정시의와 크기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그 4점 중 하나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설렌 모습으로 한 시간 넘게 일성정시의의 사용법을 설명하던 이용삼 교수의 모습이 아직도 인상깊게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풀어야 할 미스터리가 남아 있었다. 구멍이 뚫린 동판과 컵모양의 유물은 기자간담회 3일 전까지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유물에 적힌 ‘一箭(일전)’의 화살 전(箭)과 구멍이 뚫린 형태를 단서로 신기전과 같이 화살을 쏘는 무기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
실마리는 조선 전기 장영실이 제작한 물시계 ‘흠경각 옥루’를 복원한 국립중앙과학관 윤용현 과장과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연구센터 김상혁 책임연구원과 민병희 센터장 덕분에 풀렸다. 전(箭)은 화살이라는 뜻 외에도 물시계 눈금을 가리킬 때도 쓰인다. 우리가 발굴한 유물은 물시계의 본체와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장치를 연결해주는 ‘주전’이었다. 주전은 지금까지 문헌 기록으로만 존재했고, 발견된 것은 이번이 최초다.
‘세종실록’에는 김돈의 ‘보루각기’를 인용해 절기에 따라 주전을 교체해 사용했다고 적혀 있다. 이 중 ‘일전’은 동지 첫날부터 대한 후 2일까지, 소한 전 4일부터 동지 전일까지 사용됐던 것이다. 절기에 따라 주전의 구멍 간격이 달라진다.
물시계에서 주전이 최초로 제작된 것은 세종 16년(1434년)이나 이 시기에는 2치 5푼(약 5cm) 너비의 주전을 사용했다. 이번에 발굴된 주전은 너비가 약 11cm로 중종 31년(1536년) 새로 제작된 자격루의 주전이거나 세종 20년(1438년) 제작된 흠경각 옥루의 것으로 추정됐다.
이밖에도 ‘만력무자년’(1588년)이 새겨진 소승자총통 7점과 ‘계미년’(1583년 추정)이 새겨진 승자총통 1점, 1535년 동종 1점 등이 출토됐다.
앞으로는 유물이 그곳에 있던 이유 밝혀낼 것
이번 조사로 조선 과학의 전성기로 여겨지는 세종 시대의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유물의 정체가 어느 정도 밝혀진 지금, 연구자들의 의문은 유물이 묻힌 이유로 옮겨갔다.
발굴조사에서 얻은 단서는 금속 유물이 출토된 층이 16세기라는 점과 금속 유물들이 잘게 잘려 있었다는 점이다. 옛날에는 별다른 보안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값비싼 재료를 감춰두기 위해 묻어둔 다음 필요할 때 빼서 사용하기도 했다. 단서를 종합하면 이 지역에 터를 잡은 16세기 누군가가 금속 유물을 재활용하기 위해 잘게 잘라 묻어뒀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되찾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가능성일 뿐 결코 단언할 수 없다.
유물이 출토된 건물이 관아처럼 규모가 크거나 번듯하지도 않고, 문헌에도 이 일대에 관이나 궁궐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귀중한 금속 활자와 과학 유물이 이 지역에 오게 된 연유가 더 궁금해진다. 현재는 조사지에서 거리가 가까운 탑골공원에 있던 원각사나 이 일대에 철물전이 있었던 기록으로부터 새로운 단서를 추적하고 있다.
필자가 속해 있고 이번 공평15·16지구 발굴을 주도한 수도문물연구원은 국가 조사기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비영리재단법인 연구소다. 유물의 정체가 하나씩 확인될 때마다 우리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혹여 분실을 하거나 보존처리를 하며 유물을 훼손하게 될까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문화재청에 긴급 보존을 요청했고 현재는 모든 유물이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로 안전하게 이전돼 보존처리와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금속활자 유물을 대상으로 활자를 분석하고 제작기법을 추정하며 먹물 시료 분석, 방사성탄소측정 등을 통해 연대를 측정하고 인쇄본과 비교하는 연구를 할 예정이다. 일성정시의와 주전은 과학적 원리를 규명하고 제작 연대를 파악해 복원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유물 분석과 연구는 아마 몇십 년 간 이어질 것이다. 조선 최고 과학기술의 일부가 600년 시간을 버텨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시대 최고의 학자들이 다시 머리를 맞대 밝혀낼 유물의 비밀을 기대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