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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ture] 인류 최후의 날을 대비한다 재난 기계


지난해 12월 말 ‘사이언스’는 2016년 최고의 과학 사진 10장을 뽑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미국 플로리다국제대에 설치된 대형 송풍장치 와우는 그 중 하나였다. 송풍기 날개 길이가 사람의 키보다 큰 이 거대한 장치는 이른바 ‘재난 기계(Disaster Machine)’ 중 하나다. 재난 기계는 허리케인이나 지진 등 다양한 재난 상황을 인공적으로 재현해 실험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를 말한다.

2013년 완성된 와우는 12대의 대형 송풍기를 배열해, 1분 동안 최대 8만 1550m3 부피의 공기를 실험 물체에 퍼부을 수 있다. 길이 100m, 너비 64m인 표준 규격의 축구장 상공 약 12.7m 지점까지의 공기를 모두 모은 양이다.

세기로 따지면 허리케인 중 최고 강도인 5등급의 바람을 생성할 수 있는데, 2005년 8월 초속 70m 이상의 풍속을 기록하며 미국 뉴올리언스 일대를 물바다로 만든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5등급이었다. 실제 크기의 건축물놓고 허리케인이 불어 닥친 상황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 건물에 부착한 각종 센서 신호와 영상을 분석해서 연구할 수 있다.

와우를 운영하는 플로리다국제대 국제허리케인연구센터는 향후 건축물과 건축 재료를 만들 때, 대형풍동실험장치가 안전성을 평가하고 인증하는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자동차 충돌 시험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미국의 보험회사들이 연합해서 세운 세계 최대의 대형풍동실험 시설이 운영 중이다. 이 시설은 100대가 넘는 송풍기로 강력한 바람을 만들어낸다.

와우는 바람을 원하는 대로 ‘디자인’ 할 수 있다. 예컨대 대기권 아래에서 부는 바람은 도심지와 주거지역, 평지, 바다 등 지역이나 높이에 따라 속도가 다른데, 각 상황에 맞는 바람을 재현해야 제대로 실험할 수 있다.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는 12대의 송풍기에서 빨아들인 공기는 직사각형 모양의 터널을 지나면서 속도 차이가 상쇄돼 균일해진다. 또 바닥에 삼각뿔 모양 등 다양한 장애물을 설치해 실제 지상에 부는 난기류나 공기의 경계층에서 나타나는 비균질한 바람을 원하는 대로 생성한다.

기계로 허리케인을 만든다니, 한마디로 ‘와우’다! 한국엔 이런 재난 기계가 없을까. 이런 생각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사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있었다. 심지어 종류도 다양했다! 태풍과 지진, 쓰나미(지진해일) 등의 재난 상황을 재현할 수 있는 대형 연구 시설이 전국에 여러 곳 있었다. 그 중에서도 풍동과 지진 실험 장치는 세계 최대급의 규모를 자랑했다. 그 두 곳을 방문해 재난 기계의 위력과 쓰임새를 알아 봤다.

한국에도 있다! 태풍 만드는 기계
멋과 맛의 고장. 기차역에서 파는 비빔밥에서도 남다른 풍미가 느껴지는 전주시에는 대형풍동실험센터가 있다. 전북대에 설치된 2층 규모의 실험센터는 플로리다국제대의 시설과 달리 모든 시설이 실내에 들어가 있었다. 송풍기가 설치된 2층은 강력한 바람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모두 밀폐돼 있는데, 기자처럼 날씬한(?)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비좁은 문이 두 곳에 있었다.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지름이 2m에 달하는 거대한 송풍기 다섯 대가 나타났다. 기자를 안내한 이승호 전북대 대형풍동실험센터 책임연구원은 “잘못하면 빨려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송풍기를 가동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순간 아내와 아기 얼굴이 아른거리면서 덜컥 겁이 났다.

전북대 대형풍동실험센터의 실험 장치에는 ‘바람의 벽’ 같은 별칭은 없다. 와우와 비교했을 때 약 18%의 힘을 내는 이 장치는 실내에 설치된 풍동실험장치 중에서는 세계 5위 규모다. 와우에 비해 규모가 작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내 풍동과 야외 풍동은 실험 목적과 특징이 서로 다르다. 야외 풍동실험은 모형의 크기를 실제에 가깝게 키워서 실험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권순덕 센터장(토목공학과 교수)은 “과거 태풍 매미가 상륙했을 때 국가 전체의 교통표지판 중에서 약 3.2% 정도가 파손됐다”며 “이런 시설물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실물실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현재 전북대도 야외 풍동실험 시설을 지으려고 준비 중이다.

하지만 야외 풍동실험은 송풍기에서 나온 바람의 속도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급격하게 줄어드는 단점이 있다. 실내 풍동실험은 바람의 손실이 적은 반면 실제 건축물을 넣기엔 공간이 작기 때문에 크기를 줄여서 작은 모형으로 실험해야 한다.

재난 기계로 실험하는 이유, 신뢰성과 정확성
수십 분의 일로 크기를 줄인 모형을 실험했는데 그 실험결과가 실제와 동일하다고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이는 물리학 법칙에 따라 모형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마치 비례식을 푸는 것과 유사하다. 실험하려는 물체에 영향을 미치는 운동 방정식은, 모형의 구조와 운동 특성이 실제와 동일한 비율로 유지될 경우 결과 값도 같은 비율로 유지된다. 이를 ‘상사법칙(Similarity Law)’이라고 하는데, 수많은 실험으로 검증된 원리다.

예컨대 1km 길이의 교량을 설계한 뒤 1m로 길이를 줄인 모형으로 풍동실험을 한다고 가정하자. 우선 기하학적인 모양을 똑같이 만든다. 상사법칙에 따라, 비율을 줄였을 때 모형이 가져야 하는 질량과 교량 각 부위의 진동 주기 등을 계산해 만든다. 실험할 때 부는 바람도 상사법칙에 따라 속도를 줄여 준다. 예컨대 실제 다리에 부는 바람이 초속 70m라면, 100분의 1로 줄인 모형에서는 100분의 1에 제곱근을 취한 값(10분의 1, 즉 초속7m)을 바람의 속도로 설정한다.

실험할 때는 모형에 힘을 측정하는 센서를 설치하고 레이저를 쏴서 움직인 정도를 측정하는데, 모형이 바람에 의해 1cm 움직였다면 실제 다리는 1m를 움직였다고 해석한다. 전북대 대형풍동실험센터의 송풍기 다섯 대가 낼 수 있는 최고 풍속은 초속 31m지만 상사법칙에 따라 변환하면 100분의 1 크기의 모형에서는 무려 초속 310m의 바람이 된다. 자연계에는 이런 바람이 없기 때문에(화성에는 있을까 모르겠다) 최고 풍속으로 실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 컴퓨터 성능이 좋아지면서 많은 실험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풍동실험은 아직까지 컴퓨터가 정복하지 못한 영역이다. 자연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난류를 재현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많지만 완벽하지 않은 상황이다. 유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을 아직까지 완벽히 풀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계에서는 이 방정식을 ‘밀레니엄 문제’로 지정해 놓고 푸는 사람에게 100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어놓았을 정도다. 권 센터장은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가 아직까지는 실제 설계에 적용할 만큼 잘 맞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계산 시간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도시를 대상으로 유체역학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한 번 돌리는 데 2주가 걸린 경우도 있을 정도다.

전북대 대형풍동실험센터는 2009년 완공된 이후 현재까지 건물과 교량 등을 설계할 때 바람에 대한 안전성을 검증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시청 신청사와 국립생태원, 이순신대교 등이 설계 과정에서 이곳을 거쳤다.
‘빙글빙글’ 돌려 지진 충격 흉내 내
지진을 재현하는 재난 기계는 과학기술 연구 기관이 밀집해 있는 대전광역시에 있다. 한국수자원공사
K-water융합연구원에서 2014년부터 운영 중인 원심모형시험기다.

첫인상은 의외였다. 지진이라고 하면 땅을 흔들어 줘야 할 것 같은데, 8m에 달하는 거대한 팔이 고속으로 빙글빙글 회전하는 기계였기 때문이다(왼쪽 사진). 팔끝에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 바구니 같은 물체가 매달려 있는데, 거기에 실험 모형과 측정 장치들을 넣고 장치를 돌린다. 김기영 K-water융합연구원 기반시설연구소 시설안전연구팀장은 “질량이 8t인 실험 장치를 탑재하면 중력의 100배까지 강한 힘을 줄 수 있다”며, “한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가 운영 중인 원심모형시험기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 장치는 우주비행사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강력한 중력가속도를 견디는 훈련을 시켜 주는 기계와 매우 유사하다. 비행사들에게 강한 중력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실제 건축물 크기의 수십, 수백분의 1에 불과한 모형에 실제와 같은 힘을 만들어 준다. 예컨대 10m깊이에 묻힌 구조물이 받는 압력을 1m 깊이에 넣은 모형에 동일하게 주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실험을 한 뒤, 센서의 측정값과 카메라가 포착한 변화를 상사법칙에 따라 환산하면 실제 10m 깊이에 묻힌 구조물의 변화를 추정할 수 있다.

지진 실험은 시험기를 회전시켜 강한 중력을 만든 상황에서 모형이 들어 있는 장치를 흔드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예를 들어 20초 동안 일어나는 지진의 경우, 중력을 10배 높인 상황에서는 10분의 1인 2초만 흔들면 현실에서 20초간 지진이 일어난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 흔드는 가속도는 현실 상황보다 10배 키워 준다. 이런 방식으로 규모 9.0 이상의 대지진까지 재현할 수 있다.

컴퓨터로 찾지 못하는 문제 찾아줘
박동순 K-water융합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실험 시간이 단축돼 장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자연 현상을 재현할 때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점토층 지반에 압력을 가해 단단하게 다지는 압밀실험의 경우, 중력을 100배로 높여주면 1시간 만에 14개월(1만 시간) 동안 일어나는 변화를 측정할 수 있다.

이 실험의 장점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밝힐 수 없는 문제까지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2005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경우, 도시가 해수면 높이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내린 비의 양이 제방을 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비의 양과 운하의 제방 조건 등을 모두 입력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했을 때도 도시에는 큰 피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원심모형실험 결과 원인이 밝혀졌다. 제방에 박아 놓은 콘크리트 벽이 물의 압력에 의해 기울어지면서 틈이 생겼고, 그 사이로 물이 빠르게 침투하면서 제방 건너편으로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김남룡 K-water융합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할 때 설정한 조건이 문제였다”며 “제방과 제방에 박아 놓은 콘크리트 벽이 일체가 돼서 움직일 거라 가정하고 실험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조건을 바꿔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 원심모형실험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K-water의 원심모형시험기의 경우 주로 댐 같은 구조물을 모형으로 만들어 내진성능 등을 실험하는 데 쓰고 있다. 2016년에는 K-water가 운영 중인 필리핀 마닐라 지역의 댐 내진보강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산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거대한 규모에 매력을 느껴 취재를 시작했지만, 재난 기계들은 우리 삶과 동떨어진, 그저 기술력을 뽐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재해에 맞서 삶의 공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재난 기계의 보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2017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최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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