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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예언력은 어느 정도?

남북통일에서 우주개척까지

SF작품들에는 늘 미래의 연도가 설정돼 있다. 작가들은 무한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발휘해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미래의 사회상을 적중시키곤 한다. SF의 세계에서 등장하는 '예언'을 통해 미래에 우리 모습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상상해보자.

이 글을 쓰기 시작할 즈음, 정확히 말해서 1997년 8월 29일에 우연히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행되는 어느 일간지를 보게 되었다. 연예면에서 별도의 박스기사 하나가 눈길을 끌었는데, 그것은 ‘오늘’이 ‘심판의 날’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기사에서 ‘심판의 날’(Judgement Day)은 바로 SF영화 ‘터미네이터 2’의 부제를 일컫는 것이었다. 물론 심판의 날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이 영화는 1997년 8월 29일에 전면 핵전쟁이 발발해 순식간에 수십억의 사람들이 몰살당한다는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5년 전 발표된 이 영화의 예측은 다행스럽게도 맞아떨어지지 않았지만, 사실 이와 같이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예언한 소설이나 영화는 이제껏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표돼왔다. 그리고 그런 예측들이 터무니 없는 과장이나 기우라고 무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현실은 SF보다 더 허구적이다

‘미래 소설’은 전통적으로 SF의 가장 주된 갈래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SF작가들의 임무는 ‘정확한 미래 예측’이 아니다. 예언은 예언가나 점쟁이들의 몫일 뿐, 어디까지나 SF작가들은 현실에 대한 발언의 한 방법으로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미래 예측은 적중 가능성보다 개연성 있는 모든 가능성의 모색에 있기 때문에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매우 광범위한 상황의 스펙트럼을 그려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유념해야 할 변수가 있다. ‘현실은 허구보다 더 허구적이다’라는 흥미로운 통념이다. 때때로 현실은 SF작가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도 짐작할 수 없을만큼 놀랍고 믿어지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미국의 SF작가 카드(O.S. Card)는 언젠가 어느 작품집의 서문에서, 만약 어떤 SF작가가 1차 대전이 끝난 뒤 패전국 독일에서 한 사나이가 나타나 순식간에 독재자가 된 뒤, 전 세계를 거대한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심지어는 가스실을 설치해 수백만명의 유태인을 집단 학살한다는 내용의 소설을 썼다면 거의 출판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내용이라서 아무도 상대를 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드는 인류 역사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 예측 불허(또는 광기)의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비슷한 예를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온 교포들이 서울역과 덕수궁 돌담길에 죽 늘어앉아 좌판을 벌이고, 멀쩡한 대낮에 백화점 건물이 무너지고, 한강의 다리가 무너져내리고, 사기꾼들이 중국의 교포 사회를 유린해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되고….

아마 이런 내용의 소설이 10년 전쯤에 발표됐다면 과장이나 비약이 지나쳐 설득력이 없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국가보안법이나 반국가사범과 관련한 의심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훌륭한 SF작가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예측 못지않게 사회 문화의 변화 추이에도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다음의 내용은 작가 복거일이 1992년에 컴퓨터 통신망에 처음 연재하였던 소설 ‘파란 달 아래’의 일부이다.

“내가 남편과 아들을 어처구니 없이 잃었다는 것을, 남반부 건설업자가 철근을 제대로 넣지 않고 지은 영화관에 남반부 영화관 주인이 정원의 배도 넘는 사람들을 들여보내서 이층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남반부 사람들, 당신네들은 그저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입네다’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한 순간 온몸에 움켜쥐었다… 남반부와의 통일을 반기기엔 어려서 받은 남반부 사람들의 인상이 너무 나빴다. 특히 술에 취해서 북반부 녀자들에게 돈다발을 흔들어대던 남반부 사내들의 모습은, 나이가 든 뒤에도, 속을 뒤집히게 했다.”

이 작품은 서기 2030년대 말 달을 배경으로 북의 ‘김일성 혁명 기지’와 남의 ‘장영실 기지’가 우여곡절 끝에 ‘조선공화국 월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 사고, 그리고 중국교포를 상대로 한 대규모 사기사건 등이 일어나기 몇년 전에 발표됐으며, 우리나라에서 전산통신망에 직업 작가가 작품을 발표한 첫번째 경우였다.
 

미래소설의 고전 '1984'의 저자 조지 오웰.


미국 뉴딜 정책에 영향

과거 SF 작가들이 묘사한 미래의 사회상은 이미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거나 앞으로 닥칠 21세기를 예언해주고 있다. 1984년 1월 1일 아침 전 세계에 위성으로 중계된 백남준의 비디오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본 기억도 벌써 13년 전의 과거가 됐다.

조지 오웰(G. Orwell)이 1949년에 발표(탈고는 1948년에 했으며 제목은 ‘48’년을 ‘84’로 뒤집은 것이다)한 미래소설 ‘1984’는 헉슬리(A. Huxley)의 ‘멋진 신세계’(1932)와 자먀친(E. Zamiatin)의 ‘우리들’(1924)과 함께 디스토피아문학의 3대 고전으로 꼽힌다. 어느 SF평론가가 “SF분야에서 ‘1984’를 논하는 것은 곧 성경을 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했을 만큼 사회비평으로서의 SF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3대 강국이 세계를 분할, 지배하면서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국민들은 24시간 ‘빅 브라더’에게 감시당한다. 공용어인 ‘뉴스피크’는 거짓과 조작으로 국민을 기만하는데 용이하도록 개조된 영어이며, 모두가 세뇌를 받기 때문에 개인의 의견이라는건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연애도 금지돼 있다.

워낙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져 온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어느 정치경제학자는 “소설이 아닌 프로파간다(정치적 목적의 선전)”라고 평한 적도 있지만, 사실 ‘1984’의 메시지는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즉 관료적 권위주의가 극에 달하면 결국 소수 특권계급의 독재 체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 입각한 ‘1984’의 재해석으로 꼽히는 작품이 1985년에 테리 길리엄(T. Gilliam) 감독이 발표한 영화 ‘브라질’이다.

런던(J. London)이 190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강철군화’는 먼 미래인 27세기의 유토피아에서 바라본 20세기 초의 디스토피아라는 복잡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20세기 초는 작품이 집필될 당시에서 불과 10년 안팎을 내다본 것인데, 작가 스스로의 경험을 반영해 철저하게 노동계급의 시각에서 서술돼 있다.

27세기의 미래 세계는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인 ‘인류 형제애 시대’이고, 20세기 초는 비참한 환경에서 착취당하는 노동계급의 디스토피아다. 런던이 묘사한 이 디스토피아는 작품 발표 뒤 얼마 안 있어 실제로 미국에서의 가혹한 노동운동 탄압으로 현실화되었다.

기자출신인 미국 작가 벨라미(E. Bellamy)는 1888년에 ‘회고, 2000년에서 1887년까지’라는 유토피아 미래 소설을 발표했다. 19세기말에 가사상태에 빠졌던 주인공이 서기 2000년에 깨어나보니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가 실현돼 있더라는 내용이다. 발표당시 사회적 반향은 대단해서 몇년 사이에 이 소설의 이념을 추구하는 단체가 미국 전역에 조직됐고, 20세기 중반까지도 미국 최고 지성들이 추천하는 세권의 필독서로 거듭 꼽혔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경제 공황에 대처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기를 조절하며 고용 수준을 향상시킨 정책, 1933-1939)에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벨라미는 통계자료까지 치밀하게 제시하는 등 막연한 유토피아가 아닌 구체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도 세계문학사상 가장 널리 읽힌 유토피아 소설의 하나로 남아 있지만, 다소 딱딱한 서술인데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하면서 오늘날 일반 대중들로부터는 거의 잊혀지다시피 됐다.

인류의 우주 개척은 시적인 문체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룬 미국작가 브래드베리(R. Bradbury)의 기념비적인 고전 ‘화성연대기’(1950)에서 상징적으로 묘사된다. 1990년대에 이르러 지구인의 화성개척이 이루어지지만, 화성인들은 지구인이 옮겨 온 질병 때문에 죄다 죽어버린다. 2000년대에 접어들자 지구도 핵전쟁으로 멸망하고, 결국 21세기 중반에 접어들 무렵 화성에 남아있던 소수의 지구인들이 새로운 화성인으로 정착하게 된다.

오늘날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걸작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는 서기 2019년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영화는 미국작가 딕(P.K. Dick)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로봇양의 꿈을 꾸는가?’(1968)을 바탕삼아 만든 것이다. 대부분 부유하고 건강한 지구인들은 외계 식민지로 이주해갔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심신이 온전치 못하거나 가난뱅이들 뿐이다. 오염으로 황폐해진 지구엔 동물들도 거의 멸종돼 애완용 로봇 동물들이 고가에 거래된다. 사람들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오르간을 연주하고, 인간과 구별이 안 되는 안드로이드들은 반란을 꾀한다. 영화는 이처럼 원작소설에 담긴 정체성 상실의 허무주의를 시각적으로 잘 형상화시켰다.

우리 나라에는 SF작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적어도 그들의 상상력만큼은 여느 외국 SF작가 못지않게 자유분방하다. 1960년대에 본격 SF소설 ‘완전사회’를 발표하여 한국일보사 주최의 장편 공모에 당선되었던 작가 문윤성은, 심사위원으로부터 “천재 아니면 광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1980년대에 ‘여인공화국’이라는 제목으로 재발간됐던 이 작품은 여성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남성들은 외딴 섬나라에 모두 한데 모여 살고 있다).
 

미국 뉴딜정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파급효과가 컸던 벨라미 작 '회고 2000년에서 1887년까지' 표지.


또다른 현재를 가정

‘대체역사’는 ‘평행우주’라는 SF의 하위 장르 중 한갈래인데, 우리나라에는 1987년에 복거일의 처녀장편 ‘비명을 찾아서’가 발표되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재’란 우리가 존재하는 지금 이 세계만이 아니며, 같은 시간대의 또다른 차원에 여러개의 ‘현재’가 존재한다는 설정이다. 물론 이 현재들의 역사가 모두 똑같을 필요는 없다.

‘대체 역사’를 다루는 SF들은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비명을 찾아서’의 경우 우리 나라가 1945년에 해방이 되지 않고 현재까지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있다는 설정을 취하고 있으며, 미국 작가 딕의 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1962)도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이 패한 뒤 일본과 독일의 지배를 받는 미국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미국 작가 앤더슨(P. Anderson)의 소설 ‘한여름밤의 폭풍우’(1974)는 산업혁명이 실제보다 2세기 일찍 일어난 것으로 묘사했으며, 벤포드(G. Benford)의 장편 ‘타임스케이프’에선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지 않는다. 중세 유럽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정복했다거나 마술이 사회적으로 공인된다는 설정은 꽤 자주 등장한다.

캠프(L.S. Camp)의 단편 ‘둥근 눈의 야만인’(1992)에선 중국인과 콜럼버스가 거의 동시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해리슨(H. Harrison)의 장편 ‘에덴의 서쪽’(1984)은 과감하게 자연의 역사를 소급해 공룡이 멸종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능을 발전시켜왔다고 묘사했다. 이 밖에도 폴(F. Pohl)의 소설 ‘올림피안을 기다리며’(1988)에서는 예수가 사형을 당하지 않고 로마도 몰락하지 않는 등, 대체 역사의 소재는 사실상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대체 역사’나 ‘평행 우주’는 지적 유희로서도 손색이 없지만 현실에 대한 또다른 방식의 논평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신선한 의미를 지닌다. 대원군이 쇄국정책 대신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펼쳤다면? 1945년에 남북이 분단되지 않았다면? 지난번 대통령선거의 결과가 달랐다면? 등등.

미래를 직접 창조하기도

세계 SF문학계의 3대 거장 중 하나로 꼽혔던 아시모프(I. Asimov, 1920-1992)는 ‘로봇 공학의 3원칙’을 창안하는 등 로봇을 다룬 소설에서도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다. 그는 언젠가 회고담에서 밝히길, 현재 산업용으로 쓰이는 로봇을 개발해 낸 사람들 중 한명으로부터 어린 시절 그가 쓴 로봇 소설들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과학기술 발달을 뒷받침하는 창조적 상상력은 상당 부분 SF에서 묘사되는 미래의 다양한 모습들에서 힘입는 바가 크다. 이처럼 SF적 상상력은 단순히 미학적 차원이나 오락적 기능 이상의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으리라고 전망된다. 예측 불허로 치닫는 국제 정세나 문화 조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민족 통일의 과정을 밟아나가야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의 정치적·문화적 변화도 감당하기 수월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세기말의 시대엔 우리가 바라는 미래상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직접 만들어나가는 방법만이 안정된 생존 전략이 될 것이다. 먼저 그러한 미래상을 충분하게 모색하기에는 우리나라의 SF문학 역량이 많이 모자란 만큼, 분발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 SF는 실로 ‘희망의 연대기’를 현실적으로 창조해내는 영역인 것이다.

안드로이드

인간처럼 세포 등의 원형질로 만들어져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전혀 구별할 수 없는 가공의 생물. 그리스어로 '인간을 닮은 것'이라는 의미이며, '복제인간'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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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박상준 SF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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