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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베르나르트 페링하 교수, 프레이저 스토더트 교수, 장피에르 소바주 교수다. 노벨상의 상금 800만 크로나(약 10억 4000만 원)는 세 명이 나눠 갖는다.]


“전자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하지만 명확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런 기계는 유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런 기계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1959년 12월, 미국 물리학회에서 강연을 하며 던진 질문이다. 아주 작은 세계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알았던 파인만이 나노미터(nm) 크기의 작은 물체를 만들고 제어하는 기술(나노기술)의 태동을 일찌감치 예견한 강연이 었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날 즈음 화학자들은 분자를 이용해 작은 기계들을 구현해 냈다.

그리고 올해 노벨 화학상은 머리카락 굵기의 1000분의 1 크기의 분자기계를 설계하고 합성한 공로로 장피에르 소 바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명예교수, 프레이저 스토더트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베르나르트 페링하 네덜란드 흐로닝언대 교수 세 사람에게 돌아 갔다.


‘움직이는 분자’ 시작은 ‘카테네인’으로부터

분자기계는 빛이나 열과 같은 외부 자극에 반응해 일정한 기계적 움직임(회전, 직선운동 등)을 구현할 수 있는 개별 분자 혹은 분자 집합체다. 기계적인 힘에 의해 기차가 움직이듯, 자외선을 받아 나노미터 크기의 분자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놀라운 기계는 1960년대 초, 카테네인이라는 분자를 합성하면서 시작됐다. 카테네인은 두 개의 고리가 마치 사슬처럼 서로 수직으로 맞물려 있는 구조로, 원자들이 공유결합이 아닌 기계적 결합으로 연결돼 있다. 독특한 구조를 지닌 데다 합성이 쉽지 않았다. 많은 화학자들이 합성에 도전했지만,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고 수율이 너무 낮아 실용적이지 못했다. 카테네인 합성은 20년간 제자리 걸음을 했다.

1983년 소바주 교수가 이끄는 프랑스 연구팀은 카테네인 합성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소바주는 구리이온을 이용해 고리 형태의 분자와 반원 형태의 분자가 서로 붙잡게 만들고, 또 다른 반원을 연결해 새로운 고리가 생기게 했다(아래 그림).
 


 
그리고 난 뒤 구리이온을 제거해 카테네인을 높은 수율로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연구는 많은 화학자들이 카테네인뿐만 아니라 트레포일 매듭, 보로미언 링, 솔로몬 매듭 등 구조가 흥미로우나 합성이 어려운 분자의 합성에 도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 스토더트 교수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전자가 풍부한 방향족 화합물과 전자가 부족한 방향족 화합물 사이의 인력을 이용해 로탁세인(rotaxane)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48화합물을 합성했다. 로탁세인은 막대형태의 분자에 고리 형태의 분자가 꿰어있고 막대의 양끝에는 마개가 달려있어 고리가 빠지지 않는 형태의 화합물이다. 1991년 스토더트 교수는 로탁세인의 일종을 이용해, 사각형 형태의 고리가 긴 축 상에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운동을 하는 ‘분자셔틀’을 합성했다. 이때까지는 평형 상태(외부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분자가 움직였기 때문에 기계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런 기계적 움직임을 외부의 자극으로 조절하려는 분자기계 연구의 출발점이 됐다.
 

 
분자로 만든 엘리베이터와 인공근육

카테네인과 로탁세인을 합성한 소바주 교수와 스토더트 교수는 본격적으로 분자기계의 설계와 합성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스토더트 교수는 2005년, 로탁세인을 이용해 ‘분자 엘리베이터’를 만들었다. 이는 정육각형 모양의 분자 세 개가 각각 120°를 이루고 있는 형태의 트리페닐렌(triphenylene)이 산화, 환원 반응에 의해 위, 아래로 움직인다. 스토더트 교수는 분자 부품을 원위치로부터 0.7 nm 만큼 들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비슷한 시기에 소바주 교수는 외부의 자극에 의해 분자의 길이가 늘어나고 줄어 드는 ‘인공근육’을 합성해 큰 주목을 받았다(왼쪽 그림). 인공근육은 로탁세인 기반의 분자체로, 구리이온(Cu+)을 만나면 길게 펴지고, 아연이온(Zn2+)을 만나면 줄어든다. 전체 길이의 27%가 줄어들며, 실제 우리 몸의 근육 단백질인 미오신의 움직임과 비슷하다.

두 분자기계 모두 외부의 자극에 의해 기계와 같은 움직임을 보여줬다는 점에서는 엄청난 성과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기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기계라면 연속적인 움직임을 통해 유용한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회전운동을 하는 분자기계라면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한쪽 방향으로 연속해 돌아야 한다. 많은 화학자들이 이런 분자기계를 합성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내 1999년, 올해 노벨 화학상의 마지막 주자인 페링하 교수에 의해 꿈이 실현됐다. 그는 화학적으로 연결된 두 개의 평평한 회전날이 한 방향으로만 회전하는 ‘분자 모터’를 합성했다. 이 분자는 빛과 열에 의해 순차적으로 구조가 변하며 회전날이 연속적으로 한쪽 방향으로 회전한다. 2011년 페링하 교수는 이런 분자 모터 4개를 장착한 4륜 구동 분자 자동차를 합성했다(위 그림). 분자 자동차는 고체표면 위에서 빛을 받아 앞으로 이동했다. 이로써 그는 반 세기 전 파인만이 꿈꿨던 나노 자동차를 만들었다.


대가들이 모여 분자기계를 논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한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역사적인 날이 있었다. 2007년 11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열린 ‘솔베이 콘퍼런스’에서였다. 물리학과 화학계의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로 1911년부터 3년마다 열린다. 소바주 교수가 의장을 맡았던 2007년 회의의 주제는 분자기계였다. 스토더트 교수, 페링하 교수는 물론 이 분야를 개척한 석학들이 토론을 이끌었다. 분자기계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필자도 초청돼 간단히 우리의 연구를 소개하고 토론에 참여했다.

솔베이 콘퍼런스에서 나눴던 이야기 중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분자기계가 처음부터 응용을 떠올리고 시작한 연구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분자 사이의 약한 인력을 이용해 카테네인이나 로탁세인처럼 흥미로운 구조를 갖는 분자를 합성하려고 했던 연구는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이 호기심은 인류의 미래를 바꿀지도 모르는 분자 기계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기초과학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이유다.

분자 단위의 기계는 쓰일 곳이 매우 많다. SF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몸속에 들어가서 암세포를 찾아 파괴하는 나노로봇을 비롯해, 지금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더 용량이 큰 메모리칩을 만들 수도 있다. 분자기계에 대한 연구는 아 직 걸음마 단계다. 화학자들은 이제 겨우 에너지를 공급받아 원하는 방향으로 연속해 회전운동을 하거나 직선운동을 하는 분자를 합성했을 뿐이다. 실용성 있는 분자기계가 구현되기까지는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다. 하지만 페링하 교수는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100년 전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에 성공했을 때 불과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제트 여객기가 승객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세계에 발을 성큼 들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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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김기문
  • 에디터

    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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