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4대 1로 이긴 사건을 두고, 여러 반응이 쏟아졌다. 영화 ‘터미네이터’의 디스토피아를 떠올린 사람도 있고, 인공지능의 현재 수준이 아직 그 정돈 아니라며 놀란 마음을 달래준 전문가도 있었다.
그 중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느낀 반응은 다음이다. “알파고는 이성은 있지만 감성이 없다. 하지만 이세돌에게는 이성뿐 아니라 감성이 있다”, “이세돌은 바둑이라는 게임을 즐길 줄 알지만, 알파고는 알고리즘을 따를 뿐 게임을 즐길 수 없다”, “이세돌이 전 세계 사람들의 낭만을 지켜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기계가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어떤 특성을 언급함으로써 모종의 위안을 찾거나 애써 인간의 우월성을 다짐하려는 말들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됨의 가치나 우월성을 감성이나 낭만에서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근거로 가장 많이 회자된 특성은 생각하는 능력, 즉 이성이었다. 인간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의 중 하나는 ‘생각하는 동물’이며, 사람들은 지성적인 사유 능력이 인간을 규정하는 본질이라고 여겼다. 감성은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흐리는 이차적인 능력으로 간주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의 붕괴
인간이 자연계의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특권적 지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근대 과학 혁명의 여명기에 살았던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년)는 세계를 구성하는 독립적인 실체에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공간적인 위치나 크기를 갖는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사유를 본질적인 속성으로 하는 정신 혹은 마음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과 물질이 결합된 혼합적인 존재다. 반면 동물은 일종의 기계로, 순수하게 물질만으로 이뤄진 존재다. 데카르트의 이 같은 분류에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물질적 존재에 불과한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이성에 입각해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존엄한’ 존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인간은 자연 법칙이 아니라 이성의 도덕 법칙을 따르는 인
격체”라는 이마누엘 칸트(1724~1804년)의 생각도 인간 존엄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는 인간의 지위에 대한 이런 인식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년)는 인간의 순진한 자기애가 세 번의 중대한 모욕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모욕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두 번째 모욕은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세 번째 모욕은 프로이트 본인의 무의식 이론이다. 이 사건들의 공통적인 의의는, 우주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를 격하시키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이론들은 보편적 지식의 체계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상식ㆍ종교ㆍ문화와 심각하게 충돌했고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지동설과 관련해 수많은 종교재판과 처형이 이뤄졌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의 핵심은 지구가 자전하고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었다. 지동설을 인정하면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서 변
방으로 밀려난다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진화론에 따르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신과 같은 지성적인 존재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라 원시적인 유기체로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우연한 진화의 결과이다. 진화론이 참이라면 인간 역시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을 통한 임의적인 진화적 산물에 불과하다. 발생론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다른 생물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지위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연속적인 존재이다.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은 역으로, 인간 지위의 문제와 관련해 진화론이 야기한 충격이 얼마나 근본적인 수준의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간의 기계화, 네 번째 불연속이 온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주장을 위협했다. 데카르트에게 자아란, 이성적 사유 능력을 갖고 스스로 선택을 통제하며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존재다. 즉, 이성적 자아는 도덕적 책임의주체인 동시에 내가 하는 모든 행위의 지배자인 것이다. 반면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많은 부분은 무의식적 본능이나 충동 혹은 억압된 욕망의 산물이다. 의식적 자아 또한 이들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이성에 비해 저급한 것으로 여겨졌던 감정이나 충동, 욕망과 같은 ‘동물’적 요소가 실상은 우리를 지배하는 요소임을 밝혀냈다.
최근의 알파고 쇼크는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 지위의 격하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상징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매즐리시(1923년~)는 저서 ‘네 번째 불연속’에서 “인간의 특권적 지위라는 생각의 배후에는 인간과 다른 존재들 사이에 모종의 근본적인 불연속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놓여 있다”고 주장하면서 또 하나의 불연속이 이미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과 기계 혹은 인간과 기술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부정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알파고의 등장은 인간의 정신까지도 기계적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의 피조물인 기계사이에 단절된 경계는 없으며, 인간 정신을 설명하는 동일한 원리나 개념을 이용
해 생각하는 기계도 만들 수 있다. 인간과 기계 사이에 존재했던 불연속의 해체는, 비단 인공지능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기계화(사이보그)라는 자기 변형의 문제와도 연관돼 있다. 사이보그는 생물체의 자기조절이나 통제 기능에 기계적 요소를 결합해 하나의 통합적인 시스템을 이룬 존재를 일컫는다. 스마트폰 같은 장비들은 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를 통해 점점 더 우리 신체 내부로 들어올 것이며, 우리는 인터페이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다양한 기계ㆍ전자 장비와 결합하게 될 것이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신체, 지능, 감성적 능력을 바꾸거나 향상시키고자 한다면, 현재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슈퍼 인간이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시도는, 인간 역시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의 조작에 노출된 기계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과연 우리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인식해야 할까. 지금껏 그랬듯, 기계가 가질 수 없는 인간적 특성을 나열함으로써 인간과 기계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라는 걸 또다시 주장해야 할까?
특권 의식 뒤엔 차별과 배제의 역사
인간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던 시도의 이면에는 언제나 차별과 배제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인종이나 성별, 계급에 따른 부당한 차별이 그 예다. 차별적 태도를 지녔던 과거의 사람들이 특별히 부도덕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대부분은 악하기보다 단지 자신들이 살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 속에 갇혀 있었을 뿐이다. 차별을 정당화하는 과거의 규범적, 실천적 관행은 많은 부분 당시에 통용되던 여러 범주에 의존하고 있었다. 범주적 구분들이 도덕적 규범성을 획득하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인종주의나 성차별주의 같은 부끄러운 역사다.
그러나 최근 중요한 반전이 일어났다. 동물이나 자연이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포함된 것이다. 행위에 대한 책임능력이 있는 행위자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행위의 영향을 받게 되는 피동자의 관점에서 도덕 문제를 바라보게 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호주 출신의 철학자 피터 싱어(1946년~)는 ‘동물해방론’을 통해 도덕적 이해관계를 갖는 피동자의 범위에 동물을 포함시켰다. 현대 환경 윤리의 아버지로 꼽히는 알도 레오폴드(1887~1948년)는 흙이나 산, 바다와 같은 자연 환경의 모든 요소로까지 이를 확대했다(대지윤리). 영국의 철학자 루치아노 플로리디(1964년~)는 기계 같은 인공물도 도덕적 고려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담론들이 암시하는 바는, 우리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야만 하는 문명의 대전환기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 같은 자율 기술의 등장이나 인간의 사이보그화에 따른 사회의 급격한 변동은 우리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근본 개념이나 원리, 관점들과 충돌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 프레임은 많은 부분 서구 근대의 휴머니즘(인간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비인간, 정신/신체, 자연/인공, 유기체(생명)/무기체(비생명), 원본/복제와 같은 견고한 이원적 구분들이 그 뼈대를 이루고 있는데, 그 자체로 이미 많은 가치 판단이 들어 있는 개념들이다. 법, 윤리, 정치, 문화, 예술, 경제와 같은 현실 속 여러 실천적 관행들은 바로 그런 개념들이 강제하는 규정과 구속, 가치를 반영한다. “이세돌이 전세계 사람들의 낭만을 지켜줘서 진심으로 고맙다”라는 말도 이런 프레임 속에서만 의미가 온전히 드러난다.
포스트휴먼과 공존할 새로운 문법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상들은 근대적 삶의 양식 전체를 뿌리에서부터 흔드는 변화다.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근대 휴머니즘에 은폐돼 있는 정치성을 폭로함으로써 근대의 종언을 주장했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야기하는 변화들은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근대의 종말을 알리고 있다.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거나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인공지능 등 다른 존재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인간과는 다른 존재들과 공존하며 번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노력일 것이다. 과거의 관행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인간과 다른 존재들이 공동으로 번영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적 문법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적 적용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 거기에서 파생되는 해로운 결과에 대한 무지나 무책임성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도덕적 상상력 또한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제한이나 금지보다, 가능한 파괴적 결과를 예민하게 고민하면서 창조적인 방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 프레임은 많은 부분 서구 근대의 휴머니즘(인간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비인간, 정신/신체, 자연/인공, 유기체(생명)/무기체(비생명), 원본/복제와 같은 견고한 이원적 구분들이 그 뼈대를 이루고 있는데, 그 자체로 이미 많은 가치 판단이 들어 있는 개념들이다. 법, 윤리, 정치, 문화, 예술, 경제와 같은 현실 속 여러 실천적 관행들은 바로 그런 개념들이 강제하는 규정과 구속, 가치를 반영한다. “이세돌이 전세계 사람들의 낭만을 지켜줘서 진심으로 고맙다”라는 말도 이런 프레임 속에서만 의미가 온전히 드러난다.
포스트휴먼과 공존할 새로운 문법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상들은 근대적 삶의 양식 전체를 뿌리에서부터 흔드는 변화다.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근대 휴머니즘에 은폐돼 있는 정치성을 폭로함으로써 근대의 종언을 주장했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야기하는 변화들은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근대의 종말을 알리고 있다.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거나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인공지능 등 다른 존재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인간과는 다른 존재들과 공존하며 번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노력일 것이다. 과거의 관행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인간과 다른 존재들이 공동으로 번영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적 문법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의 발전적 적용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 거기에서 파생되는 해로운 결과에 대한 무지나 무책임성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도덕적 상상력 또한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제한이나 금지보다, 가능한 파괴적 결과를 예민하게 고민하면서 창조적인 방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